“잊혀져가는 아버지像을 되찾자”
  • 여운연 기획특집부 차장 ()
  • 승인 1992.03.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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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아버지 모임’서 자녀와 수평관계실습…‘아버지와 기차여행’ 마련

 우리의 전통적 가족윤리가 변화하면서 아버지의 자리는 ‘가장’의 위치에서 점차 가족구성원의 한 사람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가부장적인 아버지像이 무너지자 중간층 세대인 30·40대 아버지들은 자신의 위치를 어디에 둘 것인가 고민하고 있다.

 요즘 아이들에게 비치는 아버지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아마도 ‘돈 벌어다 주는 사람’ ‘눈뜨기 전에 나가고 눈감은 뒤 들어오는 하숙생’ ‘신문이나 뒤적이는 로봇’ 따위 모습으로 비치고 있을 것이다.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얼마나 소원한 존재인지는 어린이눈높이·한국갤럽이 지난해 실시한 한 조사에서도 나타났다. 국민학교 어린이 1천2백명을 대상으로 한, 고민거리가 생겼을 때 누구와 의논하는가라는 질문에 48.6%가 ‘엄마’라고 답했고, 그 다음이 친구 14.6%, 형제·자매 13.6%였다. 아버지는 9.1%로 친구나 형제·자매보다 뒤떨어지는 위치에 그쳤다.

가장은 단지 가족 구성원일 뿐
 그러므로 아버지의 손을 잡고 함께 대화를 나누며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자녀라면 행복한 어린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평소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바람을 읽어내기라도 한듯 지난 2월22일엔 1박2일의 ‘아버지와 함께 기차여행을…’이란 여행프로그램이 마련돼 눈길을 끌었다.

 ‘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사람들의 모임’(이하 ‘좋은 아버지 모임’) 회원 25명은 자녀와 함께 경남 진해에 있는 임광사로 여행을 다녀왔다. 아버지와 아이들이 모처럼 함께 기차를 타고 구경하고 그림도 그리고 얘기도 나누는 가운데 아이들에게 아버지의 위치를 확인시켜주고 시대흐름에 따라 변모된 수평적 관계의 아버지 역할을 실습하는 기회를 마련해본 것이다.

 ‘좋은 아버지 모임’을 이름 그대로 좋은 아버지가 되고자 하는 소박한 뜻을 지닌 30·40대 평범한 가장들의 모임이다. 평소 아이들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품어온 까닭에 좀더 나은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줘야겠다는 취지에서 모인 지 3개월째. 당초 이 모임은 오화그림작가 강우현씨(39·아시아문화교류연구소 소장)가 아이들에게는 꿈을 키워주고 부모들에게는 보람을 주자는 의도로 만든 《아버지가 쓰고 그린 그림책》 만들기 모임에서 싹이 텄다. 이에 앞서 강씨는 주부들과 함께 《엄가가 쓰고 그린 그림책》을 지도해 함께 펴내기도 했다. 아버지들의 그림책 모임은 10명의 뜻있는 아버지들이 모여 그림책 작업을 끝낸 작년 10월 서울도서전에 ‘작품’을 출품해 호평을 받았다.

 이 때를 계기로 ‘잊혀져가는 아버지像을 되찾자’는 생각으로 시작한 게 ‘좋은 아버지 모임’이다. 가정의 행복을 지켜가는 아버지, 이웃간에 정을 나누며 사는 아버지, 사회에 평화로움을 전하는 아버지, 가정의 안전을 지켜주는 아버지, 미개사회의 어른을 지향하는 ‘젊은’ 아버지가 되자는 게 이등의 목표다. 출발 당시 30여명이었던 회원은 두세달 만에 2백여명으로 불어났다. 구성원의 직업도 다양하다. 군인 소방수 교사 의사 변호가 등 각 분야 직업인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만큼 아버지 모임에 대한 열의는 대단하다. 이들은 집회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다만 소속감만 가질 뿐 각자가 자유롭게 자기 가정에서 실천할 프로그램을 운영해가고 있다.

 매월 첫째주 목요일 저년에 월례모임을 갖는데 3월초부터는 격월로 《아버지 소식》을 발간해 현대사회에 알맞는 새로운 아버지像을 각종 프로그램·정보와 함께 알려줄 예정이다.

“생활의 주체로써 새로운 계기 찾으려”
 이번 기차여행은 주말이 돼도 가족들과 무엇을 해야될지 몰라 하는 회원들이 자녀에게 평생 추억거리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보자는 회원 김동열씨(40·사업)의 제안에 의견을 모아 이루어졌다.

 오랫만에 동심 가득한 여행길에 오른 아버지들은 “엄마와는 대화를 나눌 시간이 많은데 이번 기회에 분명히 아이들에게 점수를 딸 수 있을 것”이라며 들뜬 모습이었다. ‘좋은 아버지 ○○○’란 명찰을 자랑스럽게 달고 털어놓는 여행소감도 제각각이다. 그중 일부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국민학교 3학년때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아버지 사랑을 받지 못한 탓인지 이 모임에 더 애착을 갖게 됐다. 토요일엔 5시 퇴근인데 부장님이 걱정말고 편히 다녀오라며 쾌히 양해해 주셨다. 이러한 모임이 아이들이 커서까지도 이어졌으면 좋겠다.”(이우범씨·42·천일화물 영업부)

 “처음으로 혼자 두 딸의 손을 잡고 여행을 가려니 쑥스러운 생각이 든다. 핵가족화에 따라 이제는 승용차여행이 대중화되었는데 기차여행은 아이들에게 신선하게 받아들여질 것이다.”(김병건씨·39·회사원)

 “30·40대 가장들이 반드시 자식과의 관계로만 국한시키지 않고 생활의 주체로서 새로운 사회분위기의 모티브를 찾으려 한다. 개인이 못하는 것을 ‘친구’의 개념으로 여럿이 힘을 모아 해보고 싶다.”(한기천씨·36·문예진흥원)

 “5시간씩이나 기차를 타니 아이가 몹시 지루해 하여 어쩔 바를 몰랐다. 기차를 타기 전까지만 해도 잠을 설칠 정도로 가슴이 설렜는데 아이들과의 긴 여행은 마치 큰 숙제를 치르는 기분이다.”(신왕철씨·35·광고디자이너)

 국민학교 4학년짜리 외아들과 동행한 박상훈씨(55)는 유일한 50대 회원. 그러나 모임에 대한 열의는 젊은 아버지들을 능가한다. 그는 회원 중에서 가장 ‘엄한 아버지’이다. 아버지의 권위가 제대로 서야 좋은 자식을 만들 수 있다는 신념에는 변함이 없으나 “요즘 젊은 아버지들이 자녀를 대하는 자세와 모습을 보고 싶어 참여했다”면서 자녀에 대한 부드러운 태도를 배운다고 했다.

“아버지 한명이 스승 백병보다 낫다”
 일 속에 묻혀 지내다 보면 가정과 사회에서 소외감을 느끼기 쉬운 가장들. 끼리끼리 뭉친 ‘좋은 아버지 모임’은 간혹 주위로부터 ‘좀팽이들의 모임’이 아니냐는 야유를 듣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은 “설령 좀팽이 소리를 듣더라도 좋은 아버지 소리를 듣는다면 족하다”며 소신이 분명하다. 한 시대의 중간 다리 구실을 학 있는 젊은 아버지들이 제자리를 잡는다면 수십년 후 더욱 꿈이 많은 사회가 될 것이란 바람 때문이다. 이 모임의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는 강우현씨는 “한두번의 행사로 끝나는 데 아니라 수십년 앞을 내다보고 장기적 차원에서 꾸준히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 나가겠다”며 의욕을 보였다.

 어린이날 70주년이 되는 금년 5월1일에는 정식으로 이 모임을 출범시켜 방정환 선생과 같은 역할을 다짐하는 ‘아버지의날’선포식을 가질 예정이다.

 1박2일의 짧은 여행이 과연 아이들에게 어떤 아버지 像과 어느 만큼의 사랑을 느끼게 했을까. ‘한 명의 아버지가 백 명의 스승보다 더 귀중하다’는 교훈을 남겨줬을지. 혹시나 아버지들만 들떠 좋아한 행사에 머무르지는 않았을까.

 이런 물음에 대해 회원 김상태씨(의사·가톨릭의대 성안드레아정신건강센터)가 아주 명쾌하게 답변해 주었다. “함께 있는 시간이 길다고 자녀와의 관계가 좋은 건 아니다. 짧은 기간이라도 사랑을 확인시켜 준 것, 좋은 아버지가 되려 노력하고 있다는 마음을 아이들에게 전달한 것만으로도 이번 여행은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아버지 모임 연락처 512-3948, 3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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