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유는 유해하고 분유는 안전한가
  • 정희상 기자 ()
  • 승인 1992.12.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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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사부, 분유 원유에서 항생물질 검출



현행법·검사방법에 한계 ‘유야무야’

생후 4개월 난 여아의 엄마인 이미선씨(29·서울 대림동)는 지난 10일 이후 걱정이 태산 같다. 출산 후 젖이 모자라 줄곧 조제분유로 아이를 키워왔는데, 보사부에서 그 분유가 항생물질이 섞인 원유로 만들어졌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불안한 이씨는 제조 회사인 남양유업측과 소비자단체 등에 안전성 여부를 계속 문의했다. 그러나 답변은 “안심하고 계속 사용하라”거나 “어렵더라도 모유로 키우도록 노력하라”는 내용뿐이었다.

이씨는 항생물질이 섞인 원유로 제조했다는 문제의 분유 대신 다른 회사 제품으로 바꿀까 생각도 했지만 역시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보사부가 매일유업과 파스퇴르유업 제품에 대해서도 제조일을 늦추는 방식으로 유통기한을 허위 기재하는 하면, 수입신고하지 않은 염화칼슘 등 첨가물을 무단 사용했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씨는 문제점이 드러나 시한부 제조 정지처분을 받은 분유를 체크한 후 이름이 오르내리지 않은 제품으로 바꾸기로 했다.

국내 유명 유가공업체들이 항생제나 화학물질이 첨가된 분유를 만들어 시판해왔다는 보사부의 발표는 큰 파문을 던졌다. 신생아의 75%가 분유를 먹고 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아이를 둔 부모의 불안은 누구보다도 컸다. 발표 후 각 언론기관과 소비자단체에는 문의전화가 쇄도했고, 심지어 성인용 우유까지도 소비율이 5% 가량 떨어졌다는 게 업계의 설명이다. 문제가 된 항생물질은 일부 목장에서 환경오염 등으로 젖소의 유방염이 늘자 그 치료를 위해 먹이거나 주사함으로써 축적된 것으로 알려졌다.

파문이 확산되자 보사부는 12월15일 서둘러 국립보건원의 검사 결과를 발표했다. 유가공 3개 사의 분유를 수거해 정밀 검사한 결과 완제품에서는 항생물질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내용이었다. 이 발표가 있자 해당 분유회사측에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주요 일간지에 전면 광고를 실어 ‘결백’을 강조했다.

 

보사부 “유해 발표한 일 없다”

그렇다면 당초의 보사부 발표는 잘못된 것이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게 보사부와 소비자단체의 설명이다. 보사부 위생관리과의 한 관계자는 “당초 보사부 발표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항생제가 섞인 원유를 사용한 사실이 분명해 부적합한 원료를 쓰지 말라고 시정 명령을 내린 것이지, 완제품을 문제삼아 국민에게 분유가 유해하다고 발표한 일은 없다”고 말했다. 보사부는 항생물질 함유 여부에 대한 검사 결과 남양유업이 지난 1월부터 8월까지 14차례에 걸쳐 양성반응이 나타난 원유 2천4백kg을 깨끗한 원유에 섞어 분유를 제조한 것으로 밝혔다. 보사부측에 따르면 결국 불량 원유를 사용한 사실에는 변함 없으나 검사 방법에 한계가 있어 완제품에서는 유해 수치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소비자단체의 입장은 보다 단호하다. 10여년 전부터 ‘모유 권장 캠페인’을 끈질기게 벌여오며 지난해에는 분유 광고금지 합의까지 이끌어냈던 ‘소비자문제를 연구하는 시민의 모임’(이하 시민의 모임)의 김규옥 사무처장은 이렇게 말한다.

“항생물질이 함유된 원료임을 알고서도 사용했다는 것은 완제품에서의 검출 여부와 관계없이 기업 윤리상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보사부가 모처럼 위생검사를 과감하게 실시·발표한 것을 환영했으나 파문이 일자 슬그머니 꼬리를 감추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데 대해서도 분노를 느낀다.”

보사부의 식품행정 및 유명 유가공업체의 부도덕한 상술에 대해 소비자단체가 불만스러워 하는 것은 비슷한 종류의 사건이 터질 때마다 결과가 천편일률적이었다고 보는 데서 비롯된다. 남양유업은 지난 88년 4월 러시아 체르노빌 방사능에 의해 오염된 지대로 알려진 네덜란드에서 싼 값으로 원유를 수입해 국내 원유와 혼합, 이유밀을 제조한 사실이 문제가 됐을 때도 이번처럼 “완제품에는 유해 수치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사과는커녕 안전성만 연일 광고했다. 당시 보사부는 파문을 수습하기 위해 완제품의 안전성을 보증하는 역할을 자임하고 나선 바 있다.

 

남양유업 “위법하지 않았다”

이번 파동으로 홍역을 치른 남양유업측은 국립보건원의 완제품 검사 발표에 안도감을 내비치며 파문이 확산되는데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항생물질이 검출된 원유를 사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검사 제도상 불가피했다는 주장과 함께 결코 위법은 하지 않았다는 게 이 회사의 주장이다. 남양유업 성장경 홍보실장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전국 1만여개 목장에서 하루에 65만kg의 원유를 수집하므로 사실상 분유제조 후에 검사를 많이 한다. 나중에라도 양성반응 판정이 난 목장에 대해서는 축산물위생처리법에 따라 사흘간 수유를 정지한다.”

그는 이번 파문에 대해 소비자에게 사과를 할 수 없는 이유로 이런 논리를 폈다.

“시판되는 채소류에 농약의 잔류량이 남았다 해서 이를 재배한 농민이 소비자에게 사과하기 어려운 것과 같은 이치 아닙니까.”

결국 이 회사는 현행 검사방법 및 법규 등 제도 개선이 이뤄지기 전에는 항생물질이 섞인 원유라도 사용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같은 검사방식을 채택하고 있는 다른 유가공업체들은 빼고 남양유업이 자체 감사한 자료를 토대로 유독 문제 삼는 보사부의 처사도 납득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소비자단체의 반박도 만만치 않다. 보사부 발표 이후 사실을 시인하고 사과하기 보다는 결과를 부인하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인 기업의 태도는 소비자를 우롱하는 처사로밖에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시민의 모임측은 “이런 태도는 마치 서울 시민의 식수원인 팔당수원지에 멋모르고 농약 몇병을 풀었다가 발각되었는데도, 서울 시내의 수돗물에서 농약성분이 검출되지 않으면 괜찮다는 식의 논리와 다를 바 없다”고 빗대 말하고 있다.

기업윤리 문제로까지 비화한 이번 사건의 발단은 유가공 3개 사의 소비자에 대한 약속위반에서 비롯됐다. 분유 광고 문제가 그것이다. 지난해 5월 시민의 모임측의 주선으로 보사부와 분유제조 3개 사 대표가 모여 세계적 추세에 발맞춰 분유 광고를 일절 중지하기로 합의 서명했다. 그러나 그동안 이들 3개 사는 교묘한 방법을 통해 편법 광고를 일삼았다. 매일유업은 분유라는 표현 대신 ‘맘마’로 바꿔 광고했고, 남양유업은 액상분유(액체분유)를 만들어 가루가 아니라는 명분으로 ‘치고 빠지기식’ 광고를 해오다 소비자단체의 고발로 중지하기도 했다. 또 파스퇴르유업은 특수아동을 위한 특수분유 광고를 통해 제품홍보에 열을 올렸다.

 

소비자단체 “유아 상대로 한 범죄 행위”

분유제조회사의 소비자에 대한 약속 위반은 지난 11월 매일유업의 맘마 오메가 광고로 극치에 달했다. 매일유업측은 일간지 광고를 통해 ‘세계 최초’ ‘모유에 가깝다’ 등의 금지된 문구를 써가며 공정거래법을 정면으로 위반했다. 시민의 모임은 이를 즉시 보사부에 고발했고, 이를 계기로 보사부의 특별 위생검사가 실시되면서 항생제 파동에 이른 것이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보사부의 식품행정 정책도 다시 한번 허점을 드러냈다는 지적이다. 불량 원유로 분유를 제조하고 있다는 내용을 밝히기는 했으나 이를 중지시킬 제도적 대안도 없이 ‘완제품 안전’이라는 결론을 내려 소비자의 불안과 혼란만 가중시켰기 때문이다.

시민의 모임측은 분유업계와 보사부의 이같은 태도가 결국 소비자의 불신을 부추겨 앞으로 외국의 우유 제품이 급속도로 시장을 파고 들어올 빌미를 제공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보사부는 시급히 불량 원유 사용을 금지할 수 있는 제도를 정비해야 하고, 분유업계는 질 좋은 제품을 생산하려는 각오를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유아를 상대로 한 식품 원료에 불량 성분이 든 것을 알고도 사용한다는 것은 범죄 행위와 다름없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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