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평화 운동으로 인동초 ‘새싹’키운다
  • 조용준 기자 ()
  • 승인 2006.05.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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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김대중이는 모든 것을 바쳐 사회의 악과 독을 없애는 인동초의 역할을 할 것임을 굳게 약속합니다.”

 

  가없는 회오의 감정을 뒤로 물리친 채 당사를 떠나는 金大中씨의 머리를 지배한 생각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정계 은퇴를 발표하고 당사를 떠나 동교동 집에 다다랐을 때 그는 선뜻 현관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오랫동안 정원을 쳐다보았다. 정원에는 언제나 그에게 힘이 되어주고 사색할 여유를 주던 나무와 화초가 변함없이 자리하고 있었다. 92년에는 유난히 감나무에 감이 많이 열렸다. 홍시가 되어 다 짓물러 터지도록 그 감을 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까치밥이 되게 내버려 두라고 그가 말렸기 때문이다. 홍시는 이미 모두 까치밥이 되어 메마른 가지만 휑하니 남아 있는 감나무를 그는 오랫동안 응시했다. 그를 수행한 수많은 당직자와 비서가 기묘한 정적에 싸여 그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이상한 쓸쓸함이었다.

  어쩌면 그 순간 그는 지난 87년 9월8일 처음으로 광주 망월동 5·18묘역을 참배하고 눈물을 쏟던 때를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눈부시게 환한 새벽은 고통 속에 밤을 지샌 사람에게만 오는 것입니다. 나는 혹독했던 시절의 정치 겨울에, 겨울을 이겨내는 강인한 덩쿨풀인 忍冬草를 생각했습니다. 인동초는 겨울을 이겨내는 풀이라는 이름인데, 봄이 되어서야 하얀 꽃을 피웁니다. …중략… 추운 겨울의 고통과 외로움을 참고 이기는 인동초가 세상의 악을 물리치고 해로운 독을 풀어주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야말로 참으로 오묘한 하늘의 조화라 할 수 있습니다. …중략… 고난과 시련의 세월을 지나 오늘 나의 소중한 님들 앞에서, 이 김대중이는 모든 것을 바쳐서 이 사회의 악과 독을 제거하는 인동초의 역할을 할 것임을 굳게 약속합니다.”

  김대중씨는 자신의 운명이 바로 인동초와 같은 것임을, 그래서 현실적으로 제왕의 지위에 오르는 영예는 없되 ‘세상의 악을 물리치고 해로운 독을 풀어주는’ 한 포기 풀처럼 사는 것이 거역할 수 없는 운명임을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바로 그랬기에 어른들이, 그것도 양복 상의에 금배지를 단 ‘영감님’들이,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채 눈물로 손수건을 적시는, 참으로 드문 광경이 연출된 지난 12월19일, 오히려 다른 사람의 마음을 다독거리면서 비교적 담담한 얼굴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길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가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가던 그날부터 동교동 집 전화기 3대는 전국 각지에서 몰려오는 전화로 비명을 질렀다. 거의 3초 간격으로 걸려오는 전화로 인해 며칠 동안 통화가 마비될 정도였다. 수화기를 들면 아무 말 없이 울음부터 터뜨리는 전화가 대부분이었다. 어떤 사람은 “우리집 식구의 울음소리를 들어보시오!” 하고 수화기를 통해 자신만이 아니라 모든 가족이 함께 울고 있음을 알려주기도 했다.

  김대중씨가 응접실을 난타하는 전화 소리를 뒤로 하고 부인 李熙鎬 여사와 함께 강릉으로 떠날 때 그의 손에는 책 한권이 들려 있었다. 역사학자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였다. 그가 성경처럼 가까이 두는 책인 《역사의 연구》는 대통령 선거 유세를 위해 지방을 다닐 대도 그의 손을 떠난 적이 없다.

  81년 7월29일 감옥에서 이여사에게 보낸 그의 열두번째 편지는 토인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역사를 도전과 응전의 관계에서 파악한 토인비의 역사철학이 나에게 많은 깨우침과 신념을 주었습니다. 당신이 아시다시피 나는 그의 저서를 거의 읽었는데, 그의 역사 파악의 기본 시점은 도전과 응전의 관계에서 문명의 발생·성장·쇠퇴·붕괴가 결정되어가는 거대한 드라마라는 입장에 서 있는 것입니다. 물론 나는 그에게서 직접 배운 바는 없지만 항시 그를 마음의 스승 중 한 분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낙선자의 동정이 당선자 못지않은 관심을 끄는 이상한 현상이 계속되고 있다. 그가 수없이 쇄도하는 내·외신 언론의 인터뷰와 사진기자와의 접촉을 피해도 언론은 그를 내버려두지 않는다.

 

은퇴 성명서에서 빠진 두가지 내용

  이는 계유년 첫날도 마찬가지였다. 동교동은 새벽부터 김씨에게 세배 겸 작별인사를 드리러 오는 사람으로 시골 장터처럼 북적거렸다. 이날 간단한 차를 대접하는 데 사용한 종이컵은 약 4천개였다. 그러나 보도진의 출입은 응접실로 엄격하게 제한되었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도 1분 이상을 넘기지 않았다. 김씨는 보도진이 조금이라도 인터뷰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면 “더이상 할 말이 없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계속 밀려오는 손님을 피해 그 다음날 교외로 휴양을 떠났다.

  그를 오랫동안 보좌한 동교동 핵심 張誠珉 비서는 이런 현상이 “그에 대한 그리움·실망감·괴로움·자책감·미안함·양심의 가책·서러움·허전함, 그리고 정치가 아닌 그 무엇에 대한 또 한가닥의 기대 등등이 모두 어우러져서 나타나기 때문이 아니겠느냐”라고 해석한다. 장비서는 선거가 끝난 후 동교동 비서진이 완전 해체되어 거의 당에 복귀했는데도 아직 동교동에 남아 있는 유일한 비서다. 그는 앞으로 김대중씨의 연구활동과 저술관계 일을 계속 돕는 한편, 일종의 개인 대변인 역할을 맡을 것으로 알려졌다.

  기자가 김대중씨를 만난 것은 1일 오후 5시께, 방문객이 조금 줄었을 때였다. 기자와 김대중씨의 단독면담은 10분 이상 이어졌다. 비록 인터뷰는 아니었지만 그가 은퇴를 선언한 후 이렇게 긴 시간을 내준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그동안의 성원과 기대에 보답하지 못해 대단히 죄송합니다”라고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얼굴에는 되도록 말을 아끼려는 표정이 역력히 드러났다. 정계에서 은퇴하던 날 그는 당사에서 “할 말이 너무 많은 사람은 오히려 할 말이 없게 마련”이라고 말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는 약간의 망설임 끝에 다음같이 심경의 일단을 피력했다.

  “맨 처음 정계 은퇴 성명서를 작성할 때는 다음의 두가지 내용이 더 들어 있었습니다. 하나는 오로지 국민에 봉사하기 위해 제 자신이 지난 40년 동안 갈고 닦은 바를 펼치지 못해 너무 아쉽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이번 선거가 악마와 같은 지역감정과 용공조작을 또 불러일으켜 제대로 된 심판 기회를 앗아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저는 이 두가지 내용을 삭제했습니다. 자꾸 말을 하다 보면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되고 변명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지역감정과 용공조작 대목에서 “악마와 같은”이라는 수사를 붙여 말할 때 그의 얼굴에는 언뜻 노기가 스쳐 지나가는 듯도 했다. 그는 선거 기간에 나온 그의 책 《세계 경제 8강으로 가는 길》을 건네주면서 “거기에 나의 집권 청사진이 모두 들어 있다”라고 말한 다음 다시 서재로 들어갔다. 이 책은 그가 83년 9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미국 하버드대학 국제문제연구소의 초청연구원으로 있으면서 저술한 논문과 이의 한글판인 《대중경제론》을 개정·증보한 것이다. 정치인 김대중이 저술한 책으로는 마지막이 될 이 책에는 금융·재정·무역·중소기업 등 모두 16장에 걸쳐 그의 정치경제학적 지식이 담겨 있다.

  김대중씨의 정계 은퇴는 결과적으로 우리 정치권의 해묵은 문제를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그의 은퇴는 결국 어떤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또 다른 문제의 시작일 수 있다. 그것은 과연 어떤 정치인이 바른 정치인인가 하는 가장 원론적 수준의 질문에서부터, 정치인의 자질 혹은 도덕성과 정치현실은 과연 무관한 것인가 하는 정치사회학적 질문을 던지게 했다. 정치와 도덕 혹은 양심, 정치와 역사, 현실과 이상 등 많은 형이상학적 가치를 그의 예를 통해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원로 언론인은 “김대중씨는 벌써 대통령이 되었어야 했고, 충분히 그럴 만한 자격이 있지만 왜곡된 사회구조가 이를 투영하지 못했다”라고 평가한다. 김대중씨의 한 핵심 측근은 “남북과 동서로 나뉜 이 두 개의 거대한 분단구조는 결코 김대중씨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그의 정치적 운명은 지정학적 측면으로만 보자면 그가 태어난 荷衣島처럼 일찌감치 결정된 것인지도 모른다. 목포에서 뱃길로 약 2시간 걸리는 하의도는 구한말 덕혜옹주가 시집갈 때 일본에 팔아넘겨, 섬 전체가 일본의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가 되는 바람에 주민이 일시에 소작으로 전락해버린 비극의 섬이다. 이 때문에 주민은 일찍부터 권력에 대한 원망이 가득했고 동학교가 번성했다. 일제 때는 일인에 항거하는 소작쟁의가 끊이지 않았다. 해방 직후 미군정에 맞서 식량 폭동을 일으킨 곳도 하의도였다. 야당생활과 반독재 투쟁으로 일관한 김대중시의 정치적 역정은 그가 태어난 고장의 이러한 비극적 풍토와 연결해 해석할 수도 있다. 그 자신은 “내가 태어난 토양이 민중과 함께 불의에 항거하는 힘을 주었다”라고 술회한 적이 있다.

  또 하나. 정치생활 40여년 동안 굽힘이 없이 일관한 그의 역정을 해석할 수 있는 근거가 있다. 그것은 그가 뛰어난 역사학도라는 사실이다. 그가 즐겨 읽는 책의 상당수는 토인비 슈펭글러 E.H.카 등 역사학자의 저술이다. 동교동 지하 서재를 빽빽이 채운 장서 1만2천여권 가운데 3분의 1이 역사 관계 책이다. 따라서 그의 역사인식은 여기서 나왔을 것이다. 바로 이 점, 그의 역사인식은 그로 하여금 역사를 두려워하게 만들고 후세 사가가 그를 어떻게 평가할지에 대해 항상 걱정하게 만들었다고 측근들은 설명한다. 그를 오랫동안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들은 “투철한 역사의식이 쇠사슬처럼 그를 얽어매, 그는 역사의 평가를 가장 무서워하고 미래에 어떤 평가가 내려질 것인지 두려워했다”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으로 김대중씨를 모두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장성민 비서는 그를 오랫동안 지켜본 자신의 관점임을 전제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김선생님의 정채행태를 분석하면 크게 보아 두가지 측면이 있다. 즉 현실적·실천적 측면과 윤리적·도덕적 가치관이 이중적 복합구조로 정치행태의 근원을 이루고 있다. 이는 현실정치를 추고하고 어디까지나 추구의 대상·가치·과정은 도덕적·윤리적 원칙을 무시하지 않는 선에서 접근하는 것을 의미한다. ‘무엇이 되기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는 그의 좌우명이나 ‘행동하는 양심’과 같은 정치신념은 그의 정치사상이 얼마나 도덕적 합리주의에 기반해 있는가를 잘 나타내준다. 현실정치에서 도덕과 원칙을 중요시한 것은 절제·금욕·의식을 중요시하는 가톨릭의 영향이 아닌가 한다.”

  김대중씨의 역사의식은 3당 합당 당시와 이번 대통령선거에서도 드러났다고 한다. 지난 88년 3·24 총선이 여소야대로 결론나자 盧泰芋 대통령과 당시 민정당 지도부는 김씨에게 합당을 제의했으나 그는 거부했다. “비록 그것이 어떠한 영예와 지위를 가져다준다 해도 명분과 양심에 어긋나서는 안된다”는 것이 그의 거부 이유였다. 내각제도 마찬가지였다. 오로지 권력 취득의 유·불리에 따라 권력구조를 인위적으로 개편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라는 얘기다.

  이번 대통령선거에서도 김대중씨의 이런 정치철학은 유지됐다고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말한다. 그와 30년 이상 같은 야당의 길을 걷던 金泳三 후보가 그를 용공으로 몰아붙였을 때 민주당 선거대책본부에서는 김영삼 후보를 결정적으로 흠집낼 수 있는 자료를 완벽하게 마련하고 그것을 공개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 자료에는 스캔들에 관련된 내용 뿐만 아니라 자질론 등 다양한 내용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 핵심 참모는 이와 관련해 “참모들은 김영삼 후보를 압도할 수 있는 전술을 마련했다. 그러나 김대표가 이를 하나한 체크하면서 참모들을 질책했다. 선거를 치르면서 참모들은 그동안 김대표가 쌓아온 도덕적 행태를 어기지 않으려 무진장 애썼기 때문에 다른 진영의 참모보다 몇배나 힘들었던 것이 사실이다.”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예는 김대중씨가 마키아벨리 같은 책략가가 아님을, 과거 군사정부가 부추긴 대로 과격한 인사가 결코 아님을 입증한다고 그의 측근들은 말한다. 정치인으로서 김씨는 오히려 순진한 점이 없지 않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노대통령이 민자당 탈당과 함께 중립내각 구성을 발표하고 김대중씨가 이를 전적으로 환영한다고 했을 때, 許京萬 국회부의장은 “과거 김대표는 청와대 영수회담을 하고 돌아왔을 때마다 뒤통수를 얻어맞는 배반을 당했다. 5공청산에 합의해주니까 공안정국의 한파가 몰아닥쳐 김대표 자신이 검찰에 출두해야 하는 사태가 발생했고, 중간평가 연기에 동의해주니 3당 합당이 벌어졌다. 이번에도 거의 그럴 것으로 확신한다. 김대표가 이를 알면서도 그러는 것인지 워낙 순진한 것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서 연구활동

  김대중씨는 10일께 영국으로 떠난다. 그의 생일을 맞아 6일과 7일 민주당 당직자를 불러 만찬을 주최한 것이 정치인으로서 그의 마지막 행사였다. 6개월 내지 1년 동안 영국에 머무르며 진행될 그의 연구활동은 케임브리지대학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것 같다. 그가 영국을 택한 것은 영국이 의회민주주의의 본고장이기 때문이다. 그가 쓰기로 작정한 《현대 정치사영ㄴ구》는 그 다음 많은 시간을 들여 구상·집필할 것이다. 각 일간지와 많은 출판사가 독점계약을 맺으려고 벌써부터 로비를 하고 있으나 그는 이를 모두 뿌리치고 있다.

  당초 국내에 있는 것도 검토했으나 결국 떠나기로 결론을 내린 이유는 그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국내 정치상황 때문이다. 그의 한 핵심 측근은 “만약 그가 계속 국내에 남아 있으면 김영삼 당선자는 어떻게 해서든 그를 국내 정치상황에 이용하려 들 것이다”라고 말한다. 민주당의 당권경쟁과 관련해서 소위 “金心”을 들먹이는 것도 김대중씨가 바라는 상황이 아니다.

 

후배 양성 주력… ‘정치학교’는 안 세울 듯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간 김대중씨의 새 구상은 과연 무엇일까. 그의 새 활동은 크게 보아 저술활동과 강연활동, 그리고 후배양성 등 세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강연활동과 토론은 특히 젊은이에게 집중될 것으로 알려졌다. 젊은이들이 개인보다는 국가와 공동체에 관심을 가지도록 하는 데 대한 교육이 부족하다는게 평소 그의 생각이다. 후배양성과 관련해 일부에서는 그가 일본의 마쓰시타 政經熟과 같은 것을 세우려는 구상을 가지고 있다고 보도했으나, 이는 확대해석된 것이라는 게 동교동의 설명이다. 아직 구체적 계획도 세워지지 않았고, 후배를 양성한다고 해도 ‘정치학교’같은 형식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그가 특히 관심을 가진 분야는 △통일문제 △국제적 평화운동 △경제의 분배정의 등 세 가지다. 김대중씨는 그 자신이 통일문제 전문가이므로 정치적 차원이 아닌, 민족생존 차원에서 그동안의 많은 경험과 연구를 통해 조국의 통일에 앞장설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국제적 평화운동은 그가 노벨 평화상 후보에 여섯 번씩이나 오른 것을 상기하면 결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라고 측근은 설명한다. 그는 앞으로 국제적인 인권운동가와 폭넓게 교류해 광범위한 평화운동을 펼쳐나갈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제쳐두고 그가 현 단계에서 가장 많이 생각하는 것은 그를 지지한 사람들에 대한 보답이다. 그는 그들의 기대와 허전함을 그의 봉사활동으로 충족시켜 주기 위해 고민한다. 그러나 이 역시 그가 외유에서 돌아온 다음이라야 그 실체가 드러날 것이다. 그는 평소 사도 바울의 다음 같은 말을 즐겨 인용했다. “인내가 끈기를 낳고 끈기가 소망을 가져옵니다.” 그의 끈기가 배태할 또 다른 소망을 보기 위해서는 적어도 1년 이상 기다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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