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의 응달이었던 ‘동교동’
  • 김 당 기자 ()
  • 승인 2006.05.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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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전권 아래서 ‘無名’ 냉대에 인격 매도까지… 정계은퇴 후 ‘환대’


 

  제 14대 대통령 선거 개표중계가 끝나고 김대중씨의 정계은퇴 기자회견을 텔레비전으로 지켜본 한 언론인은 선거결과를 이렇게 평했다.

 “YS를 대통령으로 만든 것이 언론이고 DJ를 ‘평범한 시민’으로 만든 것 또한 언론이다.”

  이간은 평가는 비단, 이번 선거에서 대다수 언론이 보여준 ‘될 사람 밀어주기’의 결과로 나타난 ‘친YS 성향’과 그에 따른 ‘반DJ 성향’을 지적하는 것만은 아니다. 물론 이번 선거에서도 여전히 골이 깊은 지역감정과 호남 대 비호남 구도로 상징되는 지역패권주의, 여전히 위세를 떨친 색깔론, 그리고 누구를 적당히 밀면 엉뚱한 후보가 당선된다는 투의 ‘누구는 안된다’는 식으로 전파된 배타적 논리 등이 당락을 결정지은 것으로 분석되었다. 문제는 비이성적이며 비정책적이고 감성적인 이미지에 좌우된 이같은 결정요인들이 ‘역사성’을 갖는다는 데 있다.

 

유신 시절엔 생사조차 모를 정도

  이는 지난 70년대 이후 늘 권력의 반대편(상대적 진보, 약한 자, 못가진자의 편)에 섰던 야당 또는 재야 정치인이 겪어야 했던 업보였다. 그리고 이는 박정희 대 김대중, 전두환 대 김대중, 노태우 대 김대중, 김영삼 대 김대중으로 이어지는 정치대결의 역사에서 늘 권력의 편에 섰던 이른바 제도언론이 전파한 시대상황의 논리였다. 김대중이라는 이름은 언론의 필요에 따라 등장하기도 숨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필요 이상으로 미화되기도 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언론은 그를 비난했으며 그가 정작 언론을 필요로 할 때 많은 언론은 그를 외면했다.

  71년 대통령 선거에서 46% 득표로 박정희 후보의 간담을 서늘케 한 김대중 의원이 일본 동경에 간 것은 72년 10월13일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나흘 뒤에 이른바 10월 유신이 선포되었고 불과 1년 전만 해도 대통령후보였던 김대중이라는 이름은 그때부터 이 땅의 신문 방송에서 사라졌다. 73년 8월 이른바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망명 아닌 망명 생활을 끝낼 때까지 10개월 동안 그는 일본과 미국을 왕래하면서 성명과 기자회견, 집필과 대담, 강연 등을 통한 활발한 반유신 활동을 펼쳤지만 그가 외국에서 무엇을 하는지 아는 국민은 없었다. 그에 관한 것이라면, 외신을 통해 역수입하는 그 흔한 ‘세탁한 기사’도 한줄 비치지 않았다. 오히려 망명시절 미국, 일본에서 관여한 한국 민주회복 통일촉진 국민회의(한민통) 조직과 관련한 용공성 시비로 언론은 87년 대선 때까지 그를 괴롭혔다.

  김대중의 말할 권리는 그가 동경에서 끌려와 기자회견을 하던 8월13일 밤과 그 이튿날로 한정되어 있었다. 8월15일부터 신변보호를 핑계삼아 가택연금이 시작되었고 그로부터 70여일 뒤에 뜻밖의 기자회견이 허용된 때를 빼고는 기자와 만날 수 없었다.

  국민은 김대중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고 정치인 김대중으로서는 기자가 그리운 시절이었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85년 2월8일 귀국과 동시에 연금된 시절에는, 연금되고 있다는 사실이 한줄짜리 기사로는 실렸지만 이때는 그가 서울에 있는지 미국에 있는지, 집에 있는지 감옥에 있는지 그리고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조차도 의심할 만큼 철저히 언론과 격리되어 있었다. 그래서 더욱 ‘살아 있음’을 알릴 필요가 있었다. 윤보선 함석헌 문익환 정일형 등과 함께 75년 3월1일 명동성당에서 3·1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했을 때도 신문에는 단 한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김대중은 이 사건으로 최종심에서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을 선고받았지만 법정에서의 투쟁을 통해 자신의 ‘살아 있음’을 알릴 기회를 갖게 된다. 신문에는 그에 대한 재판이 언제 있었고 재판이 어떻게 진행되었다는둥 비교적 상세하게 김대중 피고의 동정이 실렸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80년의 봄까지 실리지 못했다.

  77년 12월27일 9대 대통령 취임을 기해 진주교도서에서 형 집행정지로 석방됨과 동시에 연금된 그의 이름 석자는 다시 증발했다. 사람들은 그를 김대중 후보 또는 김대중 선생이라고 불렀지만 신문은 ‘형 집행정지로 출옥한 원외 모인사’ ‘당외 인사’ ‘재야인사’ ‘동교동 모씨’ 또는 아예 ‘동교동’이라는 동네 이름으로 고유명사를 대신했다. 70년 긴급조치 시대에 양산된 재야인사가 한둘이 아니고 동교동에 사는 주민 또한 한둘이 아니었지만 국민은 용케도 숨은 이름 찾기를 통해 그임을 알 수 있었다.

 그의 복권이 있기 나흘 전인 80년 2월25일 밤 서울 계동 인촌기념관에서 모인 정계 실력자들과 동아일보 간부들의 모임을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를 보더라도 그가 10년 동안 얼마나 언론으로부터 격리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김종필 공화당 총재, 김영삼 신민당 총재와 재야인사는 서울시 종로구 소재 인촌기념관에서 베풀어진 만찬 자리를 통해 개헌, 복권문제 등 정치문제에 관해 자유로운 의견을 개진하면서… 이날 인촌기념관에는 재야인사가 예정시간보다 5분 빠른 6시25분에 도착, 김상만 회장의 영접을 받았고….”

 

정계 떠날 때까지 “언론에 감사”

  관심의 초점이었던 이 ‘재야인사’의 말은 ‘정치문제에 관한 자유로운 의견 개진’의 분위기에 걸맞지 않게 일절 인용되지 않았다. 다만 김상만 회장 옆에 나란히 서서 찍은 사진 한 장 속에 71년 선거 이후 실로 10년 동안 숨은 그림이었던 재야인사의 얼굴이 담겼을 뿐이다. 그러나 80년의 짧았던 봄이 5·17로 사라지면서 김종필 김영삼 두 김총재와 나란히 실리던 ‘김대중씨’라는 이름은 다시 사라졌다. 그의 이름이 매스컴에 등장했을 때 그는 이미 ‘정치인 김대중씨’가 아니라 공산주의와 손잡고 민중을 선동하여 정부를 뒤집어 엎으려 한 국사범으로서의 김대중이었다.

  80년의 이른바 김대중내란음모 사건을 보도한 언론의 경향성은 ‘선동·권모술수로 얼룩진 변신의 화신 김대중을 벗긴다’라는 제목과 ‘공판과정에서 드러난 출생서 친북괴 활동까지’라는 제목을 단 자극적인 특집기사로 그를 매도한 한 신문의 9월 11일자 보도에서도 드러난다.

  “김대중, 그는 어떤 인물인가. 달변과 간교한 재략을 내세워 한국의 케네디라는 허상 속에 철저히 가려졌던 그의 참모습은 어떤 것일까.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마키아벨리즘의 화신’ 바로 그것이었다. 말과 행동이 다르고 이중 인격과 위선에 가득찬 그의 인생경로는 급기야 자신을 환상적 사이비 지도자로 착각토록 하는 망상 중에 사로잡히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형을 구형받은 그는 법정 밖에서의 ‘여론재판’을 통한 사형선고를 알지도 못한 채 9월13일 제18회 공판에서 “내가 죽더라도 다시는 이러한 정치보복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유언으로 남기고 싶습니다”라는 최후진술을 했다. 그는 ‘유언’의 맨 마지막에서 “내외신 기자의 노고에 감사”를 잊지 않았다. 92년 12월19일 정계은퇴 성명에서 “그동안 언론계 여러분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해서도 깊이 감사”했듯이.

  72년 유신 이래 일방통행적 비난을 감수해야 했던 그가 감사한 ‘은혜’는 무엇이었을까. 그가 은퇴를 선언한 며칠 뒤 한 조간에 실린 ‘역사는 과연 무엇에 쓰는 것인가’라는 제목의 독자편지는 그 은혜를 이렇게 묘사했다.

  “요즈음 갑작스레 우리 사회에 ‘역사’라는 단어가 회자한다. 자기에 대한 모든 평가를 ‘역사’에 맡기고 조용한 시민생활로 돌아가겠다는 김대중씨의 정계은퇴 성명을 두고, 평소 비판·비난의 경지를 넘어 그를 매도하는 데 앞장섰던 한 조간신문조차 그의 40년 정치 ‘역사’를 찬양하고, 앞으로 그의 일생이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라고 떠들어댄다. ‘역사’는 이렇게 편리한 것인가. 기회주의자들의 도피처가 역사일 수 있다면, 역사는 과연 무엇에 쓰이는 것일까. 지고의 가치와 지선의 진실이 내동댕이쳐지고 과거의 오류와 모순이 현실에서 거침없이 되풀이되는 상황에서 역사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언론이 필요 이상 일방통행식 칭송을 한 점을 선의로 해석하면 진 빚을 갚는 것이고 악의로 해석하면 ‘죽은’ 정치인의 무덤 위에 비석을 세워 다시는 못나오게 하려는 불안감의 표출일 수 있다. 둘 중 어느 하나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김대중씨의 말대로라면 평가는 역사가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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