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부끄러운 ‘개병대’는 없다
  • 이정훈 기자 ()
  • 승인 1997.09.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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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예절 모르는 부대’오명 벗기 위해 고심

몇 년 전만 해도 고향으로 가는 야간열차에 휴가 나온 해병대원이 올라타면, 이따금 시끄러운 일이 벌어지곤 했다. 모자를 벗어든 해병대원이 타군 사병들을 찾아다니며 돈을 거두다가 뜻대로 되지 않으면 행패를 부렸기 때문이다.

한때 해병대 훈련소의 모토는 ‘때리고 부수고, 강병이 되자’였다. 일부 해병대원들은 ‘해병대 이등병은 육군 대위와 동급이다’ ‘때리고 오면 용서해도, 맞고 오면 용서 못 한다’는 악습을 이어주곤 했다. 상륙전 감행 후 적군을 향해 쓰여야 할 용기가 아군과 민간인에게 발휘되자 자연적으로 생겨난 말이 ‘개병대’였다.

개병대처럼 해병대의 명예를 갉아먹은 단어도 없을 것이다. 이두호 해병대 1기 전우회장은 ‘적진에 상륙하라면 개처럼 충성스럽게 목숨을 걸고 상륙하기 때문에 개병대이다’라고 둘러대기는 했지만, 개병대는 버려야 할 악습이다.

전도봉 해병사령관도 ‘해병대가 기본예절도 모르는 개병대’로 평가 절하되는 데 대해 절치부심하고 있었다. 전 사령관은 “한국전과 월남전에서 목숨을 걸고 싸운 후유증 때문에 해병대가 난폭해진 것 같다. 미국 해병대도 전쟁 후유증에서 벗어나는데 20년이 걸렸다고 한다. 이제 우리도 월남전의 상처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라고 말했다.

부마사태와 광주 항쟁은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와 서울의 봄, 신군부 출범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터져 나온 대사건이었다. 광주민주화운동 때 계엄군은 곤봉으로 머리를 가격하며 시위대를 진압했다. 당시 머리에 피를 흘리며 진압군에 끌려가는 시위대의 모습이 광주 시민의 항쟁심을 촉발했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회자되는 분석이다. 예비역 해병대원들은 부마사태 때 해병대 1사단 7연대가 그와는 다른 방법으로 시위대를 상대했다고 한다.

해병대 쪽 주장은 이렇다. 박구일 대령(현 자민련 의원 · 대구 수성을)이 이끄는 7연대는 부산시청 삼거리에서 날아오는 돌멩이를 맞기만 했다. 전우들이 쓰러지는데도 해병대원들은 진압 봉을 빼들지 않고 안으로만 오그라들었다. 그러자 시민들이 시위대를 말리기 시작했고 분위기가 역전되어다. 부마사태가 광주민주화운동과 달리 대규모 유혈 사태로 발전하지 않은 데는 ‘국민에게 저항하지 않는 해병대’ ‘어느 상황에서도 지휘관이 통제할 수 있는 해병대“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신을 배출하고 길러준 국민에게 충성할 때 개병대가 아닌 명예로운 해병대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개병대’라는 말 속에는 ‘해병대 = 게릴라 부대’라는 뉘앙스가 숨어 있다. 전도봉 사령관은 해병대가 정규 상륙전을 감행하는 정규전 부대라는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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