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된 개혁’ 안기부 대수술
  • 김 당 기자 ()
  • 승인 1998.03.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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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공개‘안기부 개편 최종보고서’… 여권핵심이 작성, DJ에게 제출

3월5일 오전 10시 서울 내곡동 안기부 청사에는 어느때 보다도 긴장감이 흘렀다. 전신인 중앙정보부 시절을 포함해 안기부 37년 역사에서 처음 겪는 정권 교체를 실감케하는‘새 주인’을 맞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이날 안기부를‘접수’한 신임 이종찬부장은 80년에 안기부 기조실장을 지냈다. 그래서인지 이부장은 취임사에서 18년전 자신이 기조실장 직을 떠나면서 안기부 직원들에게 당부했던 이임사의 한 대목을 인용해 이렇게 말했다.

“당시 본인은 안기부인이 최고의 정보요원으로서 정보활동에 긍지를 가져야하며, 정보활동은 국민과 더불어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정보활동의 과학화를 추구하라고 촉구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러한 저의 바람이 얼마나 이루어졌는지 회고해 볼 때 아쉬움이 없지 않습니다.”

 이부장의 아쉬움은 곧 과거의 오류에 대한 반성과 질책으로 이어졌다. 이부장이 부장으로서 부여받은 모든 권한과 책임을 다하여 직분을 수행하겠다고 강조하고“특히 지연이나 학연 또는 사적인 계파나 조직이 기득권을 행사해 온 병폐를 일신하겠다”라고 지휘 방침을 힘주어 말할 때 긴장의 강도는 최고조에 달했다. 이부장이 밝힌 지휘 방침은 △고비용 저효율 구조개혁과 누적된 인사병폐쇄신 △정보화 사회에 걸맞는 부(部)의 과학화와 경제 · 통상분야 정보수집 활동 강화 △활력있는 근무 환경 조성 및 민주 조직으로의 변화 등이다.

 이날‘작고 강력한 안기부’를 만드는 것을 개혁의 첫걸음으로 삼겠다고 천명한 이부장의안기부 개혁방안은 이미 대선직후부터 여권 핵심부가 치밀하게 준비해온 안기부 개편 마스터플랜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는 이종찬 대통령직인수위원장과 천용택 의원(현 국방부장관)그리고 나종일 인수위 행정실장(현 안기부2차장)등을 통해 안기부의 문제점과 개편방안을 보고받고 안기부의 과도기를 관리해 왔다. 그 중 김대통령에게 최종 보고된 것이‘현행 안기부의 문제점과 개선방향’이라는 제목의 6쪽짜리 문건이다(16쪽참조)

 <시사저널>은 지난 2월 중순 여권 핵심부가 김대중 대통령에게 최종 보고한‘현행안기부의 문제점과 개선방향’등 여권 핵심부의 안기부 개혁지침 문건들을 입수했다. 이 문건은 △북풍 개입같은 정치 공작 △비효율적인 조직운영 △불합리한 인사 관행 등 많은 문제점을 지적하고, 기능 및 조직을 재정립해 안기부가‘통치권 보위’라는 목적을 수행할 수 있도록 거듭나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안기부개편의 마스터플랜이다.

 이 마스터플랜은 현재 검찰과 안기부가 진행하고 있는 북풍 공작수사가 야당 압박용이나 정계개편의 신호로 이루어지고 있다기보다는‘준비된 개혁’의 하나임을 입증한다는 점에서주목된다. 이 문건은 우선 안기부가 지닌 문제점으로‘지역차별 인사등 불합리한 인사관행’과‘고위간부의 사조직 형성’을 지적하고 있다.

안기부 조직 쇄신해야‘통치권 보위’가능
 즉 이 문건은 구체적으로‘김현철은 김기섭을 통해 PK출신과 영남지역 고교출신을 주요 보직에 배치하여 안기부내 소안기부를 형성해 정보유출과 반DJ활동을 주도했고, 이 인맥은 아직도 잔존해 있다’라면서, 그 예로 주요 보직에포진한 신정용 기조실장(사임), 정형근의원등의 인맥 10여명을 적시했다(16쪽에 인용한 김대통령에게 보고된 최종 보고서에는 사조직 명단이 빠져 있으나, 초안에는 이들의 보직과 직급이 상세히 기록되어있다).

 또 이문건은‘이들 영남 출신 고위 간부들이 반DJ 활동을 주도해 왔기 때문에 향후 이들을 기술적으로 정리하지 않을 경우 안기부 장악에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 문건은 인사개혁 방안으로‘무능 · 정치개입 · 반 신정부세력처리’방침을 제시하고 구체적으로 △정치적 의도로 특별 채용된 자, 정치 개입에 적극 가담한 자 등을 정치관여금지 위반 등으로 해임처리 △조직 개편안 확정 후 호남 · 충청 · 서울 · 경기 · 강원출신 직원 중 유능하고 신망 있는 자를 엄선하고, TK · PK출신 중 유능한 인사를 선별하여 화합인사를 단행해야 한다고 했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북풍 공작 진상 규명의 종착역이 어디인지는 이 문건의 말미에 적시된 인사개혁 방안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이문건은 △1차장(국내담당)△기조실장(예산 및 계획) △101실장(국내 정보 종합)△102실장(국내 정보 수집)△103실장(대공 수사)△202실장(해외공작)△감찰실장(부원 기강)△총무실장(부 운영 및 인사)등 핵심 부서를 열거하고‘특히 이와같은 요직은 대통령에게 충성할 수 있는 요원을 배치해, 안기부 장악 및 통치 보위권에 만전(萬全)을 기할 필요가 있다’라고 적시했다. 이는 지난 37년동안 사실상 반DJ 활동을 중심으로 운영되어 온 조직의 뿌리 깊은 반감과 체질을 인사를 쇄신해 바꾸지 않고서는‘안기부를 장악’하거나‘통치권을 보위’할 수 없다는 인식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인식에기초한 새 정부의 안기부 개혁과제는 <시사저널>(제435호)이 보도한‘안기부개혁조감도’와도 일맥상통한다. <시사저널>은 당시 안기부내 사조직의 폐해와 북풍 공작 개입 사실과 관련한 개혁 방향을 이렇게 보도했다.

‘조직의 익명성과 사조직화가 낳은 가장 큰 폐단 중의 하나는 지난 대선대 북풍 공작으로 나타난 정치개입이다. <시사저널>은 일련의 북풍 예보기사를 통해 그 진상을 추적한 바 있지만, DJ진영은 안기부 개혁 제1과제로 새 정부 출범 위에 신임 안기부장 책임 아래 북풍 공작에 대한 전면적인 진상 조사 작업을 진행할 계획이다. 북풍 공작에 직 · 간접으로 개입한 인사로는 권영해부장, 박일룡1차장, 엄익준3차장, 이청신1특보, 남역식3특보, 임ㅇㅇ실장, 고ㅇㅇ실장, 이ㅇㅇ실장, 김ㅇㅇ공사 등 핵심 간부 40여명이 거론되고 있다. 국민회의 고위 관계자에 따르면, 안기부가 다시는 국가안보를 이용해 국내정치에 개입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김 차기 대통령의 확고부동한 의지인 만큼 이들 가운데 일부는 안기부법상의 정치관여죄(제18조)로 처벌되건 해임될 가능성이 크다.’

 정무직 차관급 이하 보직자를 익명처리한 것은 정보기관의‘인물보안’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신임 안기부장 취임을 앞두고 안기부내 소외 세력들이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각종 괴문서가 정치 · 언론계에 유포되고 각 언론이 이 괴문서에 근거해 북풍 개입 혐의자들을 보도하면서 인물 보안은 깨져버렸다.여권핵심부가 파악한, 북풍 공작에 관여한 핵심 간부의 명단을 다시 정확히 밝히면, 권영해부장, 박일룡1차장, 엄익준3차장, 이청신1특보, 남영식3특보, 임광수 101실장, 임경묵 102실장, 고성진 103실장, 이길용 104실장, 이대성 203실장, 김선태 모스크바 공사등 40여명이다. 여권핵심부는 이중 국내공작은 임경묵 실장이, 해외공작은 이대성 실장이 핵심역할을 했다고 파악한다.

기득권 세력과 구 여권의 ‘권력 복합체’해체  
 이 밖에도 여권 핵심부가 파악한 이른바 5대 사조직 인맥은 △김현철계: 김ㅇ식(정보연수원 교수) △오종소(전 1차장)계: 이ㅇㅇ · 정ㅇㅇ실장 △김기섭(전 운영차장)계: 임ㅇㅇ실장, 손ㅇ정(102실),이ㅇ신(전 감찰처장),백ㅇ태(감찰실),안ㅇ진(기조실) △신정용계: 이ㅇ수 · 원ㅇ연단장(102실),김진세단장(105실),홍ㅇ희(감사관실),이ㅇ영(감찰실),조ㅇ섭(총무관리실),강ㅇ민(정보관리실) △정형근계: 홍ㅇ영 · 박ㅇ열 · 이ㅇ희 · 강ㅇ선 · 김ㅇ천 · 김ㅇ태(이상103실),손ㅇ식(부산지부) 김ㅇ갑(경남지부), 이ㅇ천(경기지부),박ㅇ규(101실) 최ㅇ제(공보관실)등이다. 이들 중 상당수는 조직 및 인사개편 과정에서 정리 또는 재배치될 예정이다. 그러나 인맥이라는 용어 자체가 갖는 모호성 때문에 철저하게 옥석(玉石)을 가리는 작업을 선행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교각살우(矯角殺牛)의 위험성은 현재 언론 및 정치권에 나돌고 있는 출처 불명의 괴문서에서도 엿보인다. <시사저널>이 입수한 괴문서 4종(△안전기획부 문제점 및 개선방향 △97.12대선당시 북풍사업 관련 내용 △문제 인물 명단 △문제 실태 및 사례)을 보면 일부 내용이 사실과 다르고, 하나같이 비난 · 음해성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문건들은 여러 내부자가 집단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구체적인 내용(보직 · 직급 비리등)을 담고 있지만, 문장이 조잡하고 조직보안을 유지하려는 흔적이 엿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생존을 위한 교란목적을 가지고 특정세력이 의도적으로 작성해 유포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진행중인 북풍 공작 수사가‘정치 개입 적극 가담자를 정치 관여 금지 위반 등으로 해임 처리한다’는 마스터플랜 상의 당초계획을 뛰어넘는 훨씬 더 방대하고 강도 높은 대수술 쪽으로 바뀐 것도 이처럼 개혁을 교란하려는 내부 반발과 저항 기류가 감지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여야 협상의 결과에 따라 북풍 공작 수사의 속도나 종착역은 조절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종찬 부장은“정치적 고려에 따라 진상 규명이 중단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단언했다. 그런 점에서 어쩌면 북풍수사는 정치권사정이나 안정의석을 확보하는 수준의 정계개편 차원을 뛰어넘어, 개혁의 최대 걸림돌인 기득권 세력과 구 여권의 권력 복합체를 해체하는 대수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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