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하산 의장’ 구습은 접었으나...
  • 오민수 기자 ()
  • 승인 1998.08.13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상 최초 경선 의한 의장 탄생...‘권력과 한몸’ 불미스러운 전통 끊을지 관심

헌정 사상 처음으로 ‘선출된’ 국회의장이 탄생했다. 지금까지는 청와대 지명을 받은 후보가 ‘자동으로‘ 입법부 수장이 되었다. 따라서 이번 신임 국회의장 선출의 유일한 덕목은 여야간 표 대결에 의해 뽑혔 다는 점이다. 적어도 구태는 벗어난 셈이다. 그런 면에서 박준규 신임 의장의 탄생은 비록 많은 논란과 정쟁의 빌미를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치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법적으로 국회의장의 지위는 구가 서열2위이다. 대통령 다음이고 대법원장이나 국무총리보다 앞선다. 예우도 서열에 준한다. 이는 대통령 전용차가 1호차이고 의장 전용차가 2호인 데서도 잘 드러난다. 해외 순방 때는 국가 원수 대접을 받는다. 물론 어디까지나 의전상의 예우다. 지위에 걸 맞는 ‘권위‘를 확보하려면 아직 멀었다. 당장 신임 박 준규 의장이 과연 ‘낙하산 의장’ 이라는 오명을 벗었는지 여부도 불투명하다. 다수당임에도 표 단속에 실패한 야당은 권력의 강압 과 협박으로 의 직을 빼앗겼다고 주장한다. 그런 야당에게 신임 국회의장의 권위가 세워질 리 만무한 일이다.

‘백두진 파동’ md 오욕의 역사 점철
  ‘낙하산 의장’ 이라는 말은 여. 야간 극한대립과 여당의 날치기로 점철된 오욕의 국회 50년을 상징하는 대명사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이른바 ‘백두진 파동’이다.

  백두진 의장은 8대와 10대 국회에서 국회의장을 역임했는데, 두 차례 모두 막다른 골목에 몰렸었다. 71년 국가보위 법 변칙 처리와 관련해 당시 야당인 신민당은 ‘의장 불신임 결의안’을 발의했고, 백 의장은 스스로 사퇴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백 의장 사퇴는 야당인 신민당이 불참한 상황에서 여당인 공화당 단독으로 부결 했다. 그러자 신민당은 이번에는 ‘의장직 사퇴 권고안’을 제출했고, 일부 이탈 표를 염려한 집권당은 의정 사상 첫 백지 투표로 야당의 공세를 막았다. 결국 그 직후 유신 헌법이 선포되었고, 출범 2년3개월 만에 8대 국회는 해산되었다.

  10대 국회에서는 원 구성 때부터 파동이 일었다. 당시 공화당이 유정회 소속 백두진 의원을 의장 후보로 재정하자. 야당은 “지역구 출신이 아닌 유정회 소속 의원이 국회의장 직을 맡는 것은 불합리하다“며 표결 자체를 거부하기로 당론을 정했다. 제2차 백두진 파동이다. 이때도 의장선출은 야당의 불참 속에 여당 단독으로 처리었다. 이렇게 등장한 백의장은 결국 그해 10월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에 대한 의원직 제 명안을 날치기로 처리하는 악역을 맡았다.

  오직 권력의 요구만을 온몸을 던져 관철해 온 낙하산 의장의 전통은, 5공과 6공에 이은 문민 정권 들어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5공 때는 아예 국회의장 자리가 국보위 출신 몫이었다. 전두환 국보위원장 시절 입법회의 부 의장을 맡았던 정래혁. 채문식 두 사람은 5공출범과 더불어, 각각 전.후반기 국회의장으로 ‘기용’되었다.

  노태우 정권 때인 13대 국회는 각각 김재순. 박준규 의원이 전. 후반기 의장직을 나누어 맡았다. 특히 민정당 대표를 역임한 박준규의원은 권력 핵심부의 절대적인 신임을 바탕 로, 13대 후반기와 14대 전반기 의장으로 기용되어 80년대 이후 유일한‘연임 의장’을 기록했다. 당시 박의장이 연임할 수 있었던 것은 90년 광주 민주화 운동 관계자보상법등 26개 법안을 날치기 처리한 ‘업적’에 대한 권부의 배려였다는 평. 여하튼 김재순.박준규 두 사람은 YS 정권 이 들어서면서 재산공개파문에 휩싸여 여론으로부터 집중 포화를 맞아 나란히 ‘팽’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YS 정권 때도 ‘의장 선임’ 에는 권력의논리가 그대로 적용되었다. 박준규 의장 후임으로 등장한 이만섭 의원은 권력과 일정 거리를 유지했지만, 14대 후반기와 15대 전반기는 모두민주 원로급인 황낙주. 김수한 의원이 차지  했다. 특히 황낙주 의원은 국회 부 의장으로서 93년 예산안을 날치기 처리해 의장으로 ‘승진’한다. 김수한 의장도 96년 노동법을 날치기 처리함으로써 오점을 남겼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