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갑자기 귀신이 많아졌을까
  • 장영희 기자 (view@sisapress.com)
  • 승인 1998.08.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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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 영화. PC 통신은 ‘귀신 천국’...사회 불안 심리가 공포물 탐닉 부추겨

깊은 산속, 달빛마저 사라진 음산한 밤입니다. 한 남자가 사생 결단으로 뛰다가 ‘헉’하고 비명을 지르며 멈춰 선다. 그 앞에 머리를 풀어해친 소복 차림의 여자가 서 있다. 공포에 질려 주춤주춤 물러나는 남자에게 여자는 추상같이 소리친다.

  “한낱 미물인 짐등도 저를 길러 준 어미의 정은 안다고 했거늘, 날 죽인 것으로도 모자라 재산을 탐하고 부모님까지 해하려 들어“  여자의 옷자락이 길게늘어지더니 남자의 목을 휘어감는다. 곧이어 남자는 긴 비명을 지르며 낭떠러지로 떨어진다.

  위 내용은 8월4일 방영된 KBS드라마<전설의 고향>‘손각시 ’편. 의붓 오빠에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향이가 복수하는 장면이다.

  요즘 안방 극장에는 귀신 이야기의 원조 격인<전설의 고향>외에도 다큐멘터리 이야기 속으로 (MBC), <토요 미스테리 극장><전설야사>(SBS)같은 귀신을 다룬 프로그램이 안방을 오싹하게 만들고 있다.

  귀신 열풍은 충무로에서도 불고 있다. 여고생귀신이 주인공인 <여고괴담>은 이미 방화 최고 흥행작인 <서편제>의 흥행 기록을 바짝 뒤쫓고 있으며 악령과 싸우는 퇴마사들의 활약을 다룬 <퇴마록>이 8월15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귀신은 사이버공간도 점령했다. 천리안의‘와우 여름이다 (go SUMMER)' 같은 사이트에 네티즌들의 구신 체험담. 구신에 대한 생각을 담은 편지가 연일 수십통씩 올라오고 있다.

  왜 우리 주위에 귀신이 많아졌을까. 이에 대해 심리학자들은 그렇듯한 분석을 내놓는다. 귀신이나 악마를 다룬 공포물이 규범적인 세계의 이면에 숨어있는 환상이나 무의식을 드러내는 매개체구 실을 함으로써, 사람들에게 무서움을 주는 한편 억압에서 풀려나는 듯한 정화 심리를 느끼게 해준다는 것이다. 여기에 세기말의 음울한 정서와 경제 불황에 따른 불안 심리라는 시대 상황까지 보태져 사람들이 공포물을 탐닉한다는 것이다.

한국 여자 귀신은 유교 문화의 산물
  재미있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한국에는 남자 귀신보다 여자 귀신이 훨씬 많다는 사실이다. 서양의 대표작 귀신(혹은 괴물)은 드라쿨라난 뱀파이어(흡혈귀), 프랑켄슈타인, 늑대인간, 좀지(끈질기게 없어지지 않는 시체)등은 모두 남자다 물론 여자 뱀파이어도 있지만 피를 빨아 먹어 멀쩡한 여자를 뱀파이어로 만드는 숙주는 대부분 남자다.

  반면 한구에는 비명 횡사한 처녀 귀신, 뱀으로 환생하는 과부 귀신, 외간 남자손에 죽어 백골이 되어서도 지아비를 섬기는 열녀 귀신, 배반한 청혼자를 혼내는 야물 낭자 귀신, 시체를 찾으러 온 아씨 귀신, 어머니의 원수를 갚는 구미호 등등 여자 귀신 일색이다. 가령 올해 <전설으 고향>의 경우 총 12편 가운데 6편이 전형적인 여자 귀신의 한을 다루고있다. 한국에는 왜 유독 여자귀신이 많은 것일까. KBS드라마 제작구의 <전설의 고향>기획자인 안영동 책임프로듀서는 그 이류를 유교 문화 탓이라고 분석한다. 고려 시대나 조선초기만 해도 글허지 않았는데, 주자학이 조선조를 점령한 조선 중기쯤부터 유독 여자가 한을 품고 귀신이 되었다는 민담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외간 남자로부터 목숨보다 더 귀한 정조를 지키려다 비명에 갔거나, 사모하는 남성엑 차갑게 거절당했거나, 남편이나 시어머니로부터 이유없는 오해나 학대를 받아 원통하게 죽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여성들이 많았던 시대 상황 탓이다.

  비교 문학자 안병국 박사는 이같은 원귀를  쇠없이 죽은 원사 원귀, 시집 장가을 못가 정욕을 풀지 못하고 죽은 정욕 원귀, 이성 간의 정한을 풀지 못한 채 죽은 상사 원귀, 매장이 잘못되어 유골이 드러난 것을 원망하는 골출원귀, 천수를 다하지 못하고 비명사한 미명원귀 등 다섯 갈래로 나눈다.

  대표적인 설화로 ‘아랑 이야기’가 있다. 경상도 밀양 군수의 딸인 아랑은 영남루 후원 연못에서 자신을 겁탈하려는 괴한에게 저항하다가 죽임을 당한다. 그후 이지방에는 깊은밤 곡성과 함꼐 가슴에 칼이 꽂혀 유혈이 낭자한 장자가 나타나 부임는 밀양 군수를 여럿 비명 횡사하게 한다. 이 소식을 들은 한 의기로운 남자가 밀양 군수 되기를 자원한다. 그 앞에 나타난 아랑 자신이 원귀가 된사연을 설명하고 한을 풀어 달라고 간청한다. 아랑은 강간, 미수 살인범을 처단해 달라는 원을 풀고 나서야 인간 세상을 영원히 등진다.

  경북 안동 지방에 내려오는 전설인 조월남이라는 서생을 사랑한 연이라는 처녀 이야기도 당시 여성에게 씌워진 억압된 성문화가 원귀를 만든 좋은 예이다. 연이는 어렵사리 햇던 자신의 구애가 참혹하게 거절당하자 시름시름 앓다 죽은후 구렁이로 변해 여러 차례 조월남과 격렬한 정사를 나눈다. 구렁이에게 정기를 빼앗긴 조월남은 마침내 죽고 만다. 현실에서 사랑의 원을 풀지 못한 여자들은 이렇게 불귀의 객이 되어 성귀로 환신한다.

한풀이 통해 전근대적 가치관 비판
  이런 연유에서일까. 한국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귀신은 처녀 구신인 손각시다. 처녀가 죽으면 시신에 땀냄새 나는 장정의 옷적삼을 입혀 묻는다든지. 남전네들이 잘 나다니는 한길가에 암매장하는 풍습이 생긴 것도 처녀의 저주가 재앙을 내린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서양 구신인 뱀파이어나 드라쿨라가 괴기스런 분위기로 성적욕망, 과학과 이성에 대한 비판, 인간 구원의 문제에 매달린다면 한국 귀신, 특히 여자 원귀들은 주로 개인의 한을 통해 전근대적인 가치관과 체제를 비판하는 것이 특징이다.

  최근 영화인 <여고괴담>도 비슷한 문맥으로 읽을수 있다. 선생님과 친구 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죽은 귀신은 대입 지상주의, 고사의 편애, 무차별 체벌, 성희롱 같은 학내 문제를 고발한다. 관객들은 이런 여귀의 한풀이를 보며 공포와 전복의 쾌감을 동시에 느낀다.

  그러나 한국의 여자 원귀들은 전복에는 성공하지 못햇다. 아니 처음부터 바라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한은 ‘여보 내가 잘못했소’  ‘너는 내 며느리다‘와 같은 남편이나 시부모의말 한마디에 눈 녹듯이 풀려 버리는 응어리다. 이 공식에 가장 충실한 것이 <전서의고향>이다. 이드라마에서 여귀들은 대부분 자신을 해코지한 사람들을 꾸짖어 뉘우치게 한 뒤 유교적 봉건 사상에 충실한 권서 장악의 가치관을 제차 강조하며 조용히 물러간다. 집요하게 원한 대상을 복수하거나 응징하는 처녀 귄신을 빼놓고는 대부분 자신의 억울함만 알아주면 홀연히 사라지는것이다. 한의 대상이 대부분 가족들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타협하는 셈이지만, 결국 여성에 대한 억압 구조는 그대로 남는다.

  페미니스트 저널인 <이프>편집장 박미라씨는 한국의 귀신 이야기는 대부분 남성 (제도)에 의해억울하게 죽은 여자가 원기가 되어 나타나, 남성이 잘못을 뉘우치는 것을 촉구하는 차원에서 끝난다고 분석한다. 한국의 여귀들은 체제를 원망하면서도 체제 순응적인 방법으로 해원을 하고 있는것이다.

  그것이 인간이 아닌 귀신이 갖는 한계일까. 아니면 그 정도의 응징밖에 허락하지 않는 사회가 갖는 한계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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