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 진보 정파 모두 모여라”
  • 허광준 기자 ()
  • 승인 1998.03.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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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블레어총리, 중도 좌파 국제 연대회의 추진… 미국 민주당과 유대 강화로 ‘시동’

 지난 2월 초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미국 클린턴 대통령은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성추문 사건으로 한바탕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두 나라 정상이 회담 결과를 발표하는 자리에서도 미국 기자들은 블레어는 제쳐놓고 온통 이 추문만을 붙들고 늘어졌다. 그러나 그 때 마흔 두살 먹은 영국 총리의 머리에서는 원대한 구상이 그려지고 있었다. 바로 전세계의 진보적 정파를 하나로 아우르는 국제회의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블레어 총리는 영국 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 세계의 모든 중도 좌파가 연대하는 회의를 구상하고 있다고 밝혔다.

 전세계 진보 전당의 단결. 이는 유럽 대륙에 혁명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던 1864년 조직된 제1차 인터내셔널 이래 사회주의자들의 오랜 꿈이었다. 물론 토니 블레어의 구상이 현실적 적합성에서 이미 용도 폐기된 마르크스주의에 근거를 둔 것은 아니다. 유럽의 다른 진보 정당들이 20세기 초반을 뒤흔든 마르크스주의 열풍에 직 · 간접으로 뿌리를 두고 있는 것과 달리, 영국 노동당이 마르크스주의를 채택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블레어의 구상은 서부와 동부 유럽, 남북 아메리카를 비롯해 많은 나라에서 경제적 세계화라는 시대현상에 대해 이해를 함께하는 진보 정당을 폭넓게 아우르자는 것이다. 그는 이 모임의 목적이 오늘날 세계 환경에 맞도록 중도 좌파의 철학을 새롭게 규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세계 경제 체제의 변화에 대처해 사회연대와 복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중도 좌파가 전면에 나서지 않을 수 없다. 전통적 좌익은 이러한 변화를 거부하며, 우익은 이러한 변화를 관리하기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 첫 작업으로 블레어 총리와 클린턴 대통령은 5월에 버밍엄에서 열리는 선진8개국 정상회담(G8)직후 런던에서 만나 미국 민주당과 영국 노동당 간의 정책 연대를 강화하기 위한 회의를 열예정이다. 전세계 중도 좌파 모임을 미국 민주당과 영국 노동당 간의 긴밀한 유대에서부터 시작하자는 것이다. 올해 말이나 내년 초에는 국제회의로 확대될 것이다. 블레어 총리는 이 모임을 대서양 양안(兩岸)뿐 아니라 전세계로 확대할 것임을 강조했다.

사회주의 인터내셔널보다 현실적  
이 신판 인터내셔널에 끼려면 어떤 자격을 갖추어야 할까. 블레어 총리는 이 회의의 목적이 단합이지 분열이 아니라고 강조하면서, 중도 좌파의 선명성을 시험하는‘가입시험’을 치르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했다. 남북 아메리카 대륙의 중도 좌파와 프랑스 사회주의자,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모두 대상이 된다. 네덜란드 · 이탈리아 · 포르투갈 진보 정당도 마찬가지다.

 현재 좌파를 아우르는 국제기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것은 사회주의 인터내서널이다. 이 조직은 민주적인 사회주의 형태를 옹호하는 국제 사회주의 정당들의 연합체로, 51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창립되었다. 현재 이 조직은 전세계 1백39개 정당 · 조직들을 회원으로 갖고 있으며, 유엔 소속 비정부기구(NGO)로 활동하고 있다. 76년부터 92년 가지 빌리 브란트 전 독일 총리가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의 의장이었다.

 그러나 블레어 총리가 구상하는 국제회의는 사회주의 인터내셔널보다 이념적으로는 좀더 다원적이고 현실적으로는 보다 활동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 같은 배경에는 최근 세계화를 향해 줄달음치는 국제 경제 환경이 한 나라 차원에서 대응하기에는 버거운 데다, 그 과정에서 다시 도마에 오르는 실업과 복지 같은 전통적 사회 이슈에 대해 비슷한 철학적 기반을 가진 정파가 힘을 모아 대처해야 한다는 인식이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얼마 전 독일 니더작센 주의회 선거에서 슈뢰더가 이끄는 사민당이 압승한 것처럼 지난해부터 유럽에서 진보 정당들이 약진하고 있다는 점도 블레어의 자신감으로 연결되고 있다.

 이념과 정책을 놓고 치열한 대립과 분화를 거듭해 온 세계 진보 정파들이 블레어 총리의 구상대로 국제 경제 환경의 극심한 변화라는 세기말적 현상 앞에서 일치된 모습을 보일 수 있을지 궁금하다.                                                     許匡畯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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