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림길에 선 기아차 ‘핸들’은 포드손에 독자회생 · 3자인수 결정권 가져
  • 박재권 기자 ()
  • 승인 1998.04.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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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냐 삼성이냐’는 채권은행단이 결정

 “한국 기업들은 왜 그런지 모르겠다.” 3월26일 산업은행을 방문한 포드사의 폴 드렌코 아시아 · 태평양담당 이사의 불만은 대단했다. 포드와 손잡으려는 국내 자동차 업체들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이들의‘언론이용하기’가 상식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지난 3월초 삼성은 포드와 전략적 제휴에 합의 했다.고 발표했지만, 바로 이튿날 거짓으로 판명 났다. 기아 역시 3월25일 “포드가 현대와는 손잡지 않겠다고 밝혔다”라고 발표했지만, 이것 역시 사실이 아니었다. 드렌코 이사와 만난 산업은행의 한 관계자는 국내 업체간의 과당경쟁이 포드의 입지만 강화시켜주고 있다고 우려했다.

 이처럼 국내 업체들이 포드를 끌어들이지 못해 안달하고 있는 것은 포드가 바로 기아의 최대 주주이기 때문이다. 현재 포드가 지닌 기아지분은 마스다 지분가지 합칠 경우 16.9%나 된다. 과연 기아를 독자회생 시킬 것이냐, 아니면 제3자에게 인수시킬 것이냐는 전적으로 포드의 결정에 달려있다. 지난 3월25일 기아를 방문한 드렌코 이사는 “기아가 독자회생 할 수 있다고 판단되면, 단독으로라도 기아를 회생시키는데 앞장서겠다”라고 밝혀, 독자회생 가능성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음을 내비쳤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기아가 독자 회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 때문에 제3자 인수 논의가 무성하게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IMF 사태 이전에도 경쟁력을 잃고 사실상 부도 상태에 빠진 기아가 어떻게 내수가 절반 이하로 뚝 떨어진 최악의 경제 상황을 헤쳐갈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미 기아의 부품업체들은 10%정도가 부도 난 상태이고, 나머지 업체들도 어음이 결제되지 않아 하루하루를 근근이 버티고 있다. 이 같은 불황이 2~3년 계속된다고 가정할 때, 기아가 어떻게 소생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현대, 왜 뒤늦게 기아차 인수 나섰나
 이 같은 인식을 한층 강화시켜 준 것은 현대의 기아 인수 전 참여 선언이었다. 사실 삼성 혼자 기아 인수를 시도했을 때만 해도, 논의는 온통 삼성을 비난하는 쪽에 쏠려 있었다. 그런데 현대마저 기아 인수전에 뛰어들자 기아의 독자 회생론은 수면 아래로 잠기고, 현대냐 삼성이냐로 논의의 틀이 바뀌어 버렸다. 그런데 최근에는 대우까지 가세해 전망을 더욱 불투명하게 만들고 있다.

 사실 현대는 기아차 인수에 부정적이었다. 지난 1월 정몽규 현대자동차 회장은 <파이낸셜타임스>와 가진 기자회견에서, 현재 기아가 안고 있는 엄청난 부채와 지급보증 채무를 떠안고는 어떤 기업도 살아남을 수 없다며, 기아를 고사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라고 밝혔다.

 그러다가 갑자기 태도를 바꾼 것은 오로지 정주영 명예회장의 ‘결단’ 때문이다. 3월19일 김대중대통령이 기아 조기처리지침을 지시하기가 무섭게 현대는 기아인수 의사를 밝히고, 그룹전체가 달려들어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삼성이 기아를 인수하려고 시도하자 이를 비난했던 현대가 뒤늦게 기아인수전에 뒤어들면서 내놓은 논리는 이렇다.‘작은 내수시장을 놓고 현대 · 기아 · 대우 ·  삼성이 출혈경쟁을 벌이면 결국 모두 죽는다.’‘죽음의 질주’를 멈추기 위해서는 현대가 앞장서 현대 · 대우의 2강 구도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업계 관계자들은 또 다른 이유를 제시한다. 현대가 삼성-포드 제휴 가능성에 위기 의식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는 분석이다. 대우가 GM과 협력을 모색하고, 삼성마저 포드와 손잡게 되면, 결과적으로 현대는 국내시장에서 GM · 포드와 경쟁하는 셈이다. 물론 현대도 일본의 미쓰비시와 손잡고 있고, 미쓰비시가 미국의 클라이슬러와 협력관계를 맺고 잇지만, 이들은 현대에 커다란 힘이 되지 못한다. 결국 현대는 기아가 절실히 필요해서가 아니라, 국내시장에서 미국의 ‘빅2’와 부딪치는 최악의 상황을 피하려고 기아 인수전에 뛰어들었다는 것이다.

 현대가 기아 인수전에 참여함으로써 기아 처리에는 가속도가 붙게 되었다. 게다가 현대는 재벌 그룹간 빅딜 요구에도 적극 나서겠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어, 정부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고 기아를 인수하는 일이 현대에게 무조건 유리한 것만은 아니다. 기아를 회생시킬 수 있는 최선의 대안이 현대인 것은 분명하지만, 현대는 적지 않은 약점을 지니고 있다. 우선 생산하는 차종과 해외 판매망이 서로 겹치기 때문에 현대에 득 될 것이 별로 없다. 이것은 대우가 쌍용을 인수한 것과 분명히 대비된다. 대우는 쌍용을 인수함으로써, 자기들이 생산하지 않는 2000cc이상 대형차와 벤츠의 기술력을 얻게 되었지만, 기아는 현대에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 생산규모를 단번에 2백50만대로 늘릴 수 있다지만, 현재의 생산시설도 남아도는 판에 시설 확충은 그리 중요한 것이 못된다. 그만큼 설득력이 부족하다.

 기아 직원들이 현대에 등을 돌리고 있다는 점도 약점으로 작용한다. 지금가지 ‘반(反)삼성’을 소리 높여 외쳤던 기아인들은‘현대와 삼성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면 삼성을 택하겠다’는 쪽으로 돌아서고 있다. 모든 것이 겹치는 현대보다는 삼성으로 가는 것이 유리하다는 현실적 판단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산업자원부는 기아 사태를 어떻게 처리할지 구체적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이것이 확정되면 채권은행단이 칼자루를 쥐고 기아사태처리에 나설 것이다. 포드가 기아를 독자회생 시키겠다는 뜻을 포기하면 채권은행단은 제3자 인수절차를 밟을 것이다.

 기아 사태 처리가 3자인수로 결론 날 경우, 우선해야 할 일은 기아의 부채와 자산 실사 작업을 벌이는 것이다. 그 결과에 따라서 감자여부가 결정되는데, 현재로서는 감자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채권은행단의 한 관계자는‘정확한 것은 조사해보아야 하겠지만, 현재 기아가 자본 잠식 상태에 들어가 있는 만큼 감자가 불가피할 것 같다“라고 내다보았다.

 이렇게 되면 소액주주와 기아직원들은 엄청난 피해를 보게 된다. 최대 주주인 포드의 손해는 물론 말할 필요가 없다. 감자 조처를 받아들일지, 아니면 추가 출자해 기아를 독자회생 시킬지는 전적으로 포드의 판단에 달려 있다. 최근 드렌코 이사와 만난 산업은행의 한 관계자는“포드는 모든 사정을 알고 있다. 그들이 어떤 결론을 내릴지는 두고 보아야 하겠지만, 어떤 경우에도 한국시장을 떠나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라고 말했다.
 
현대 · 삼성,경쟁 치열할수록 부담커져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현대와 삼성의 물밑 거래가능성을 점친다. 기아를 인수하려는 양사의 치열한 경쟁이 자칫 포드에게 추가출자를 하지 않고도 현재의 지분율을 보장하는 ‘특혜’를 베푸는 결과를 부를 수 있다고 우려하는 것이다. 국내 업체들이 그 비용의 전부를 부담할 가능성은 높지 않지만, 일부를 부담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감자조처가 단행되면 산업은행은 곧바로 대출금 3천2백억원을 출자 전환할 계획이다. 이것은 기아 전체 지분의 35%정도를 차지한다. 현재 기아차 지분의 10%정도를 보유하고 있는 현대나 삼성으로서는, 산업은행 지분을 확보하는 것이 기아차를 인수하는 데 관건이 되는 셈이다.

 산업은행이 제3자에게 기아자동차 지분을 넘길 경우에는 △기아자동차를 어떻게 회생시킬 것인가 △부실 계열사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채권은행단에 부채를 어떻게 갚을 것인가 △기아종업원들의 고용안정은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판단할 것이다.

 현재 정부는 기아사태 해결을 가로막고 있는 기아특수강 처리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황경로 전 포항제철 회장이 한보 · 삼미 · 기아특수강 일괄처리 작업을 도맡고 있고, 그 결과가 머지않아 발표될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 기아차가 기아특수강에 지급 보증한 채무를 얼마나 떠안을 것이냐에 따라 기아차 처리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또 기아차의 부채 상환조건을 어떻게 설정하느냐도 중요한 과제다. 기아를 인수하려는 현대와 삼성의 경쟁이 치열할수록 양사가 떠안게 도리 부담은 그만큼 커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과연 기아의 운명은 어디로 귀착될까. 독자회생이냐 제3자 인수냐 하는 결정권은 포드손에 달려있고, 3자 인수일 때 현대냐 삼성이냐를 결정하는 것은 채권은행단이다. 그런데 지금은 양측 모두 확실한 입장을 유보한 채 탐색전만 펼치고 있다. 확실한 것이 있다면 이 탐색전이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朴在權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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