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밭에 풀뿌리 심기’ 반쪽 자치 3년
  • 장영희 .김은남 기자ㆍ나권일 광주 주재기자 ()
  • 승인 1998.07.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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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체장 육성으로 돌아본 민선 1기 지방자치제

3년전 민선 1기 최연소 단체장으로 당선되어 눈길을 끌었던 경남 남해군 김두관 군수(40ㆍ무소속). 김군수는 지난 3년 동안 ‘최연소’라는 기록보다 지역 언론ㆍ의회ㆍ토호들과 자주 ‘사건’을 일으켜 더 유명해졌다. 그래서 그랬을까. 그는 이번 6ㆍ4지방 선거에서 매우 힘겨운 싸움을 벌였다. 그 지역에서 힘깨나 쓴다는 사람들이 연하 전선을 펼쳐 한나라당 후보에게 힘을 몰아주었기 때문이다. 선거 결과에서 증명되었듯이, 영남 지역에서 한나라당 간판은 당선 보증 수표였다. 그러나 그는 이겼다. 재선에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물론 ‘잘했으니 한번 더 밀어 주자’는 남해군민들의 성원이었다.

자치 옭아매는 중앙 집권제도ㆍ관행
김군수는 남해 군민들의 마음을 어떻게 사로잡았을까. 그는 ‘군민과 함께하는 자치 행정’ ‘열린 행정’을 표방하며 주민 참여 행정을 적극 펼쳤다. 남해군이 발주하는 각종 공사에 주민 의견을 반영하는 ‘주민 명예 감독제’와 주민들의 감시를 자청하는 ‘주민 감사 청원 제도’를 도입해 군민들이 군행정을 미주알고주알 챙길 수 있게 했다.

또 ‘살림 보고 대회’를 가졌으며, 주민들의 삶에 중요하고 이해 관계가 첨예하게 맞서는 사안은 법정으로까지 끌고 갔다. 각계 각층을 망라한 배심원단을 구성해 이들이 마을버스 허가ㆍ어장 이설 같은 사안에 대해 평결하게 하는 ‘민원 공개 법정 제도’를 만든 것이다. 김군수는 이런 다양한 시도를 통해 주민들의 참여를 끌어내 그들이 가진 힘을 군 행정에 접목시킨 것이다.

‘주민과 함께한’ 지방 행정은 6월말 종료된 민선 1기 지방자치제가 이끌어낸 가장 밝은 면이다 물론 이것이 빛이라면 그늘도 있다. 단체장들이 인기에 연연해 선심 행정을 일삼고, 방만하게 예산을 썼으며, 최근 일부 단체장의 호화 취임식에서 보듯 구설도 많고 탈도 많았다.

학자들 가운데는 이만하면 출발치고는 괜찮지 않느냐고 평가하는 이도 적지 않지만, 실제로 행정을 펼친 단체장들의 생각은 다르다. 한국의 지방 자치는 선천성 불구여서, 교정하지 않는 한 올 7월부터 4년간 계속되는 민선 2기에도 별로 기대할 것이 얿으리라는 비판이 만만치 않다.

최각규 전 강원도지사 등 상당수 단체장들은 현재의 지방 자치가 중앙 집권 시대의 제도ㆍ관행과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는 상태에서 단체장과 지방의회 의원만 덜렁 뽑아놓고 자치하라는 격이라고 꼬집는다. 이들의 공격 화살이 먼저 중앙 정부를 향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최각규 전 강원도지사는 도청 안에 관광국을 신설하고 싶어했다. 산자수명한 강원도의 최대 자산이 관광 자원이라고 생각해,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개발을 위해서는 전담 조직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는 당시 내무부 지침에 묶여 결국 전국에서 강원도에만 있던 산림국을 농정국에 흡수시키는 우여곡절 끝에 관광국을 만들었다.

사람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 문희갑 대구시장은 효율적으로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국제금융ㆍ무역ㆍ문화ㆍ환경 전문가를 영입하려고 시도했지만, 겨우 무역에 정통한 정무 부시장을 데려오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김두관 남해군수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자시의 뜻을 받쳐줄 만한 참모를 데려오고 싶었지만, 그는 중앙 정부 공무원으로부터 ‘남해군 공무원(5백 80명)이 다 당신 참모인데 왜 그러느냐’는 핀잔을 들었을 뿐이었다. 김군수는 자리를 하나 조정하는 데도 행정자치부장관의 도장이 필요하다며, 이렇게 시시콜콜하게 자치권을 제약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자치를 하느냐고 되묻는다. 최근 행정자치부는 각 지방자치단체(지자체)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한마디 의견도 묻지 않은 채 군 단위까지 실ㆍ국ㆍ과 인원을 어찌어찌 조정하라는 지침을 보내 물의를 빚고 있다. 이에 대해 한 단체장은 “2백48색일 수밖에 없는 2백48개 지자체를 한 색깔로 칠하려는 한심한 발상이다. 중앙 정부가 말하는 ‘자율권 시장’과 ‘권한 이양’은 한낱 수사일 뿐이다”라고 비난한다.

“중앙 정부에 돈 구걸하러 다니기 괴로웠다”
사람과 조직 문제보다 더 단체장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돈이다. 돈줄을 쥐고 간섭하는 중앙 정부에 투덜거리기만 할 뿐 ‘반기’를 들지 못한다.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는 “대부분의 지자체가 재정여건이 극히 나쁜데 중앙 정부와 척을 지고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다. 5선 국회의원이라는 관록을 지닌 허경만 전남도지사가 지난 3년 내내 중앙 정부에 돈을 구걸하러 다닌 것이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었다고 토로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허지사는 이렇게 몸을 굽힌 덕분에 자신도 가장 큰 성과라고 꼽는 무안 국제 공항ㆍ목포 신외항 착공, 율촌 1,2사업단지ㆍ삼호 산업 단지 조성을 위한 사회 간접 자본 확충 같은 대형 사업을 벌일 수 있었다.

현재 2백48개 지자체의 59%인 1백47개가 거두어들이는 세금으로는 사업은커녕 공무원 인건비도 대지 못한다. 국세로 지방세 비율이 78대 22로 극히 불균형하기 때문이다. 신구범 전 지사는, 전국 13개 카지노 가운데 8개가 제주도에 있는데, 거기서 걷히는 세금이 모두 국세로 편입되어 제주도 사람들은 손도 못댄다며,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고 비판한다.

광역 단체장보다 기초 단체장은 더 딱한 처지. 지역에서 걷히는 세금 중 현재 중앙 정부가 79%, 지방 정부가 30%를 갖는 구도이지만 그나마 광역단체가 30%의 절반을 가져가기 때문이다 김학문 문경시장은 그래서 ‘15% 자치’에 그칠 수밖에 없다고 항변한다. 올해 지방 정부 사정은 더 좋지 않다. 불황 탓에 지방세의 60% 이상을 차지하는 부동산 관련 세수가 예년보다 훨씬 덜 걷혀 2백48개지자체의 60% 가량이 부도가 날지 모른다는 걱정이 중앙 정부로부터도 나오는 판이다.

단체장들은 점진적으로 국세를 지방세로 이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중앙 정부의 생각은 다르다. 행정자치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세금을 국세로 많이 거두어 어려운 지자체에는 교부금과 보조금을 더 주고 그렇지 않은 곳에 덜 주면 지자체간 불균형을 해소하는 결과를 낳지 않겠느냐고 주장한다. 중앙 정부는 균형 배분을, 지방 정부는 재정 독립성 확보를 각기 주장하고 있는 형국인데, 그 간극은 좀처럼 좁혀질 것 같지 않다.

지방자치법이 상위 법률이나 대통령령에 구속되기 때문에 벌어지는 충돌도 적지 않다. 허경만 전남도지사는 여천의 율촌 2 산업단지 지정과 관련해 중앙 정부와 2년여 실랑이를 벌였다. 해외에서 돈을 꾸어오는 일도 쉽지 않다. 문희갑 대구시장은 11개월간 노력한 끝에 지난해 10월 중앙 정부의 지급 보증 없이 순전히 대구시 신용으로 국제 금융 시장에서 3억달러어치 양키본드 발행에 성공했다. IMF 사태로 국가 신인도가 투자 부적격 수준으로 떨어져 빌린 돈을 곧 되갚을 수밖에 없어 그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지만, 해외기체를 위해 문시장은 2년 동안 기억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중앙 정부와 싸웠다. 신 전지사도 마찬가지, 그도 올 3월 사무라이 본드 2백억엔을 연리 3%, 10년 뒤 상환이라는 좋은 조건으로 빌릴 수 있었는데 문시장과 비슷한 어려움을 겪었다.

지방 언론ㆍ토호ㆍ지방 의원, 수시로 발목잡기
지방 정부끼리의 갈등도 없지 않다. 광주시 김태홍 전 북구청장은 97년 재정경제부와 환경부를 끈질기게 설득해 도시형 폐기물 처리 단지와 관련된 예산 6백5억원(국비 1백65억원, 시비 1백65억원)을 천신만고 끝에 확보했다. 그러자 광주시가 틀었다. 사전 조율이 안되었고 시 재정이 넉넉하지 않다며 시비 지원을 거절한 것이다. 그래서 김구청장은 올해 이미 내려온 1차분 국고 지원금 16억5천만원을 반납할 수밖에 없었다.

단체장들을 괴롭히는 것은 중앙 정부나 상위 단체만이 아니다. 전문성이 박약한 지방의회 의원, 사익을 추구하는 지방 토호와 지방 언론들도 그에 못지않다. 신구범 전 지사나 김태홍 전 구청장은 이 세력들과 일전을 불사한 것이 재선 실패 요인이라고 주장한다. 신 전지사는 지자제가 잘되려면 모두에게 이로운 공정한 경구 규칙을 만들어야 하는데 토호 세력과 지방 언론이 번번이 발목을 잡았다며, 지난 3년은 이들과의 전쟁이었다고 회고한다. 김태홍 전구청장도 재임 기간 내내 구의회 의원들의 불합리한 인사 청탁이나 구청이 발주하는 공사와 관련한 수의 계약 요구를 거절하느라 진따을 뺐으며, 지방 유지들이 활개를 쳤던 관변 단체에 대한 지원금을 끊고 기자들에게 촌지를 주지 않아 집요한 공격과 비난을 받았다고 말한다. 문희갑 대구시장 역시 언론과 원만한 관계를 맺지 못했다고 ‘점잖게’ 표현하는데, 이런 갈등은 거의 대부분의 단체장이 경험한 것으로 보인다. 김홍식 장성군수는 지방 토호들이 대거 의회에 진출하고 지역 언론사를 경영하면서 단체장과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전국적 현상이 아니냐고 반문했다.

자연히 재선에 이롭다고 생각해 이들과 결탁하는 단체장들도 생겨난다. 임도빈 교수(충남대ㆍ지방자치)는 민선 자치제 실시 이후에 나타난 흥미로운 흐름을 분석했다. 단체장-소수 엘리트-지방 언론을 주축으로 한 ‘철의 삼각 관계’가 형성되어 주요 결정 과정에서 주민이 배제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대체로 지방 언론이 단체장에 대한 ‘지나친 관심’으로 다리를 건다면 중앙 언론은 무관심으로 일관해 지방 자치를 실종시키고 있다. 양재호 전양천구청장(서울)은 “요즘 중앙지를 보라. 재ㆍ보선 뉴스만 잔뜩 다루지 민선 1기에 대한 보도가 있는가”라며, 스타 단체장이 부각되지 않는 것도 단체장의 자질보다는 중앙 언론의 무관심 탓이 더 크다고 주장한다.

지역민 집단 이기주의도 무서운 적
단체장들은 안팎으로 시달리는 신세를 면치 못한다. 안으로는 관선 때나 민선 때나 변함없이 피동적이고 경직된 부하 직원들로 인해 속앓이를 하고, 지역 주민들의 집단 이기주의라는 밖의 저항에 고통을 겪고 있다. 심대평 충남도지사와 문희갑 시장은 ‘지방 공무원들은 그동안 중앙 정부가 통제하고 시키는 대로 따르는 역할만 수행하다 보니 기획 능력과 정책 수립 능력이 크게 떨어진다“라고 지적한다. 김두관 군수를 한 술 더 떠 이런 행탤르 ’하청 행정‘이라고 꼬집었다. 신구범 전 지사는 단체장이 무슨 일을 추진하려하면 공무원들이 중앙 정부 규정과 지침만 붙잡고 앉아 있다고 공박한다. 그래서 심지사는 도 공무원들에게 ’당신은 시간당 얼마짜리 공무원‘이라는 것을 늘 강조했고, 김홍식 장성군수는 ’민원인 10대 권리 장전‘을 제정해 민원처리 시간을 오해 끈다든가 친절하지 않으면 벌칙을 가하는 시도를 했다. 이런 노력들이 지방 공무원 사회에 작은 변활ㄹ 가져오고 있지만, 결국 지방 공무원들의 발상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자치의 의미는 빛이 바랠 수밖에 없다.

집단 이기주의도 큰 문제, 김학문 문경 시장은 자기 이익만을 생각하는 일부 지역만이 가장 골칫거리였다고 토로한다. 김시장은 석탄산업이 사양화하면서 문경이 살아 남을 수 있는 길은 관광휴양 도시로 변신하는 길밖에 없다고 보고 도시개발 계획을 짰는데 번번이 거센 민원에 직면했다. 길을 하나 내려고 해도 감정가가 만원인 땅을 40만~50만원 주어야 팔겠다고 억지를 부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기 땅을 다른 곳에 원형 그대로 복원해 내라고 생떼를 쓰는 사람까지 있었다는 것이다. 김시장은 점촌에 있는 쓰레기 매립장을 이전하라며 도로를 점거하고 농성하는 일부군민을 집요하게 설득해 결국 무마했지만, 나인수 전 나주시장은 손을 들고 말았다 나시장은 95년부터 쓰레기 매립장을 만들려고 했는데 그 지역 주민들의 반대로 끝내 무산된 것이다. 주민들의 냉소와 무관심도 집단 이기주의 못지 않게 단체장의 의욕을 꺾는 요인이었다. 양재호 전 양천구청장은 “서울 주민들은 애향심이나 고향 의식이 거의 없다”라며, 주민들의 관심과 참여없이는 지방 자치가 제대로 자리잡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대도시 단체장일수록 주민들의 참여가 부족해 좌절하는 일이 많다는 것이다.

‘공천’이라는 또 다른 족쇄
단체장들을 수렁에 빠뜨리는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단체장들이 행정에만 전념했다가는 큰코다치기 십상이다. 공천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선 자기 지역 국회의원을 극진히 모셔야 하고, 당행사에도 얼굴을 내밀지 않을 수 없다. 임기중에 비교적 잘했다고 평가받은 서울의 양천ㆍ강서ㆍ도봉 구청장이 이번 선거에서 국민회의 공천을 받지 못해 낙선했다 이들의 낙선이 이 때문만은 아니라는 반론도 있지만, 공천 탈락이 가장 주요한 이유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단체장들은 단체장이 중앙 정치와 100% 단절될 수는 없지만, 단체장을 정당의 하부 구조화ㆍ예속화하는 것은 큰 문제라고 비판한다. 신구범 전 지사는 6ㆍ4지방 선거는 중앙 선거이지 지방 선거가 아니라고 잘라말한다. 지자제가 중앙 정치에 지나치게 휘둘리다 보니 재선을 위해 수시로 당을 옮기는 철새 단체장이 생겨나는 것도 사실이다.

단체장들의 주장이 모두 옳은 것은 아니다. 중앙 정부의 통합ㆍ조정 능력이 필요하다는 심대평 지사의 주장처럼, 상당수 지자체 사업이나 조직 등에 대해 중앙 정부가 ‘노’라고 말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또 일 절한다고 평가받는 단체장 가운데서도 지방의회의 견제 기능을 무시하거나 언론의 건전한 비판 기능까지 싸잡아 비난하는 등 독선적인 단체장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이 중앙 정부가 자치권을 제약하고 지방 행정을 중앙 정치에 복속시키는 현실은 가냘프게 서 있는 풀뿌리 민주주의를 뿌리째 흔드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중앙 정부는 권한을 점차 이양해 지자체의 자율권을 신장시키겠다는 말을 거듭하지만 이 말을 그대로 신뢰할 수 없다는 사실은 지방 사무가 고작 18%라는 통계 하나로도 드러난다.

최근 김대중 대통령이 진 념 기획예산위원장에게 시장ㆍ도지사가 치안ㆍ교육에도 관여할 수 있게 하라고 지시했지만 아직 이 분야에는 단체장의 권한이 완전히 봉쇄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제대로 된 잔디 구장 하나 없는 나라에서 월드컵 축구 16강에 들기를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건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지방 자치가 좋은 열매를 맺기를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단체장ㆍ의회ㆍ언론ㆍ주민 모든 주체가 열정을 쏟고 가꾸어야만 제대로 성장하는 것이 지자제라는 나무다. 경제학에서 말하듯 공짜 점심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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