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리 찾아 해외로! 해외로!
  • 김방희 .이철현 기자 ()
  • 승인 1998.06.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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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이후 ‘국외 탈출’ 붐…“도대체 이 나라는…” 절망감도 한몫

젊어 한때를 중동에서 보낸 김부군씨(52)는 그 시절을 회고할 때면, 왠지 기분부터 들뜬다. 사우디아라비아 건설현장에서 중장비 기사로 보낸 70년대 후반 3년. 힘은 들었지만, 인생에서 그때보다 신났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돈? 삼사십만원 하던 월급을 한푼도 건드리지 않고 집에 부쳤으니까, 돈 좀 만졌지. 1년 만에 전세 끼고 성남에 집을 샀으니까. 그래도 그 시절이 좋았던 게 꼭 돈 때문만은 아녀.” 김시는 그 시절을, 뭔가 하려고만 들면 뭐든 할 수 있었던 꿈 같은 시절로 회고한다.

 중동에서 돌아온 뒤 여러 사업에 손을 댔던 그에게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들어서면서 였다. 건설업체에 건축 자재인 밸브를 납품하는 중소기업을 차렸는데, 건설 경기가 가라앉으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2년 전부터는 빵집을 차렸지만 이도 영 시원치 않다. 가끔씩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던 것일까 하고 과거를 돌이켜 보지만, 딱히 짚히는 것이 없다. 그저 막막하고 답답할 뿐이다.

 그래서 그는 다시 중동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왜외건설협회(02-274-1611)가 모집하는 해외 파견 건설 인력 모집에 응모해, 건설회사의 전화를 기다리고 잇는 것이다. 물론 가족을 비롯해 그의 주변에서는 한사코 만류한다. 취재 도중에도 아내가 걱정스러운 투로 “정말 갈려우?”하고 묻지만, 그의 태도는 단호하다. “애들 뒷바라지를 위해서 돈을 더 모아야겠지만, 그보다도 그때처럼 신나게 일해 봤으면 원이 없겠어.”

 김씨같은 사람이 적지 않은 모양이다. 해외건설협회에 따르면, 당초 5백명을 목표로 했던 모집 행사에 응모한 사람이 무려 2천8백명에 이른다. 지난 5월 초 응모를 마감한 뒤에도 문의 전화가 끊이지 않는다. 게다가 실리콘 밸리 취업 설명회나, 돈도 벌면서 여행도 할 수 있다는 워킹 홀리데이에 인파가 몰리는 것을 보면, 한국 사람들이 전보다 훨씬더 해외 노동 시장에 끌리기 시작한 것 같다.

 이는 통계로도 입증된다. 외교통상부 재외국민 영사국 재외국민이주과에 따르면, IMF 관리 체제 이후 이민자가 점차 느는 추세다(아래 표 참조). 그 가운데서도 취업 이민증가율이 가장 높다. 대상 지역은 주로 미국과 캐나다. 최근 들어 호주 지역이 새로운 기회의 땅으로 각광받기 시작했다는 것도 이채로운 점이다.

 물론 이렇게 해외로 떠나는 것은 일자리를 찾기 위해서다. 국내에서 취업 기회가 줄어들면서 해외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미국 진출이 확정된 최관식씨(33)가 좋은 예다. 그는 92년부터 지난 3월까지 쌍용정보통신 자동화 소프트웨어 개발팀에 근무해 온 프로그래머다. 최근 개발팀이 없어지는 바람에 팀원 대다수와 함께 회사를 나왔다. 퇴직한 직후에는 열심히 재취업을 준비했다. 국내 업체에 숱하게 이력서를 냈지만 감감 무소식, 경기가 나빠져 있는 삶도 줄이는 판에 인력을 새로 뽑을 회사가 있을리 만무했다. 해외 직업 시장으로 눈을 돌린 것은 그 때문이었다.

전산 요원들, 해외 취업 제철 만나
 회사 동료들과 함께 맨 처음 접촉한 곳은 일본의 한 소프트웨어 업체. 얘기가 잘 되어 회사측은 집과 연봉 5백만엔(약5천만원)을 제시했다. 그러나 해외 일자리의 무궁 무진한 가능성을 발견한 그로서는 성이 차지 않았다. 그래서 포기, 대신 국내 헤드 헌팅 업체의 중개로 미국의 인력 공급 회사인 DPRC사에 입사하기로 결정했다. 이 회사가 그에게 제공하기로 한 조건은 연봉 5만달러 이상 (약 6천8백만원). 이전 직장에서 받았던 연봉이 2천8백만원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매우 잘한 선택인 셈이다.

 낯 설고 물 선 이국 땅에서의 삶이 혹시 힘들지는 않을가. “언어 문제가 좀 걸리긴 하지만, 괜찮을 것이다. 미국 회사가 경영대학원(MBA)에 보내 준다고 했으니까 전문 지식을 더 쌓고, 약간이나마 사업 자금도 마련하는 마지막 자기 구조 조정 기회로 삼겠다.” 3~6년 정도 미국에서 생활하다 보면 한국도 IMF관리 체제를 벗어날 테고, 그때쯤에는 귀국해서 벤처 기업을 차린다는 것이 최씨의 인생 설계도이다.

 특히 최근 들어서는 미국에서 한국의 전산 인력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국내 전산 인력들이 제철을 만났다. 누구나 한번쯤은 해외 취업을 생각해 볼 만큼 기회가 늘고 있다는 얘기다. 전산직은 전산 인력들 스스로가 ‘신 3D 업종’이라고 부를 만큼 힘들고 고된 직종, ?은 야근과 비상 대기로 직장 생활과 사생활을 구분하기가 힘들정도다. 그런 이유로 한창 호황인 미국 기업체들은 외국 인력, 그것도 우수하고 성실한 한국 전산 인력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데이터 베이스나 네트워크 관리자, 프로그램 개발자가 주대상이고, 최근에는 밀레니엄 버그(2000년 문제)를 다룰 코볼(컴퓨터언어의 일종) 전문가도 찾고 있다. 일단 취업이 확정되면 취업 비자를 받을 수 있는데, 채용을 결정한 회사가 미국 이민귀화국에 통보하고 처리하는데 3개월 정도 걸린다.

 어떤 사람들은 이 모든 장면이 마치 흘러간 옛 영화를 다시 돌려 보는 것 같다고 말한다. IMF관리 체제 이후 허탈감에 빠진 직장인을 대상으로 한 무료 상담기관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이훈구 교수(연세대·심리학)의 말을 들어 보자. “내가 젊었을 때는 대학 갈 형편이 안되는 사람들이 독일로 돈 벌러 갔다.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갔다고 보면 된다.”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요즘 벌어지고 있는 직장인 해외 진출 붐의 모든 것을 설명해 주는 얘기는 아니다. 거기에는 일자리나 새로운 기회를 찾아 떠나는 밝고 긍정적인 면말고, 어둡고 칙칙한 구석도 있다. 한미유학원 노영수 사장은 이렇게 말한다. “최근 들어 실직한 30대 직장인들의 유학 상담이 부쩍 늘었다. 답답해서 상담을 원했지만, 이들이 유학원을 다시 찾는 경우는 거의 없다.”한국 상황에 절망한 나머지 해외행을 고려하는, 이른바 심리적 이민자·유학자가 크게 늘고 있다는 얘기다. 외교통상부에 따르면, 이민자 가운데서도 최근 들어 가장 크게 느는 계층이 30대다. 유학은 IMF한파 이후 크게 줄고 있지만, 30대 유학은 오히려 다소 느는 추세다(교육부는 유학에 관한 통계를 집계하려면 시일이 걸린다는 이유로, 통계를 제공하지 않았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잘 나가던 은행원이었다가 지금은 유학을 결정한 정선호씨(가명·39)가 그런 예다. 그는 최근 고심 끝에 명예 퇴직을 신청했다. 그는 명문대 출신으로 은행 내에서 비교적 인정을 받았다. 그래서 지난해부터 ‘구조 조정’이라는 말이 나왔어도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그가 직장 생활을 돌아보게 된 계기는, 회사가 명예퇴직자 신청을 받는다는 소식이었다. 그 순간 미래가 너무 뻔하다는 결론이 섰다.

 그는 자신의 결정에 아파트를 비롯한 전재산을 걸었다. “나이 사십이 다 되어 실직한 직장인이 다시 취직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고, 대학 캠퍼스도 마음 놓고 돌아다닐 수 없을 것 같고, 차라리 남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7월게 미국으로 가게 된 정씨의 말이다. 그는 미국에서 공부가 끝나더라도 돌아오지 않고 현지에서 기회를 잡아 볼 생각이다.

 직장 생활에 치인 사람들의 경우는 유학이 일종의 안식처 구실을 한다. 이미 직장 내에서는 ‘에이, 유학이나 가 버릴까’가 유행어가 되다시피 했다. 경영대학은 전문 유학 학원인 JCMBA에서 만난 한 직장인은 유학을 준비하는 사실을 회사에 숨기고 있으며, 어떤 방식으로 회사에 알려야 할지 고심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미국 유수의 경영대학원에서 국제금융을 전공하고 돌아오면 상황이 지금보다 훨씬 나을 것으로 본다.

 일자리를 찾아 떠나든, 막연히 심리적 상실감 때문에 감행하든, 해외행이 지나치게 늘어나면 사회에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우선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두뇌 유출 문제, 이미 전산 인력의 경우는 그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또 한 가지는 해외 진출의 주역이라고 할 수 있는 30대가 한국 사회와 기업의 허리에 해당한다는 점이다. 이들이 흔들리면 개인적인 불행뿐만 아니라 사회와 기업에 이상 징후가 나타날 수 있다고 걱정하는 이들도 있다.

 직장인들의 해외 진출이 느는 것은 해외 진출 경로가 확대된 데도 원인이 있다. 단순한 이민이나 유학말고도, 새로운 형태의 진출 방법이 속속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현지에서 일자리를 구해 돈을 벌면서 여행도 하는 워킹 홀리데이 제도가 좋은 예다. 이 제도는 영국연방 국가들사이에서 시작한 비자의 일종. 1년 기한으로 취업이 허용되기 때문에 여행 경비를 벌어 쓸 수 있어, 최근 젊은이들 사이에서 크게 인기를 끌고 있다.

‘현실 도피파’는 현지 적응 어려움 많아
 95년 호주 한인 사회의 건의로 호주에 대한(對韓) 워킹 홀리데이 비자 제도가 도입된 이래 한국인 약 3천5백명이 이 제도를 이용했다. 지금은 아예 호주의 일자리를 알선하는 워킹홀리데이협회(02-723-4646)가 생겼을 정도다. 워킹 홀리데이 정현태 소장에 따르면, 그동안은 대학생 이용자가 많았는데 요즘은 실직자나 퇴사 예정자가 크게 느는 추세라고 한다. 이렇게 현실 도피의 방편으로 해외 진출을 결정한 경우는 대부분 현지에서 적응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해외에서 일하기도 했던 정소장은, 한국 사람들이 해외에서 일자리를 찾기 시작하면서 일에 대한 개념에 변화가 오고 있다고 주장한다.“외국에서는 사무실에서 일과 끝난 후 간단한 음식을 차려 놓고 파티를 자주 열었다. 노래도 하고 춤도 추고, 한국 사무실이야 어디 그런가, 하지만 해외 취업자가 늘면 재미있고 즐거운 일을 선호하는 경향이 나타날 것이다.”

새로운 유형의 ‘구직 세대’ 탄생
 워킹 홀리데이 제도를 이용해 호주에서 생활한 이성은씨(28)의 경우를 보면, 확실히 그런 것 같다. 물리치료사인 이씨는 2년 동안 다녔던 병원을 96년에 그만두었다. 10대 때부터 꾸어 온 꿈인 해외 여행을 실행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호주행 비행기를 탔다.

 호주에서 그는 일자리를 찾아 어디든 달려갔다. 국내의 학력과 경력을 증명할 수 있는 영문 서류들과 적극적인 태도로 서투른 영어를 보완했다. 그래서 구한 일자리가 외단 농장의 가정교사 자리. 나중에는 구직에도 이력이 붙어 전공을 살릴 수 있는 물리치료사 자리까지 구했다. 그는 타국에서 본업인 물리치료사를 하면서 현지 물리치료사들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다. 환자를 극진하게 돌보는 태도 때문이었다. 시설이 좋고 보수가 후해서이기도 하겠지만, 남에게 봉사하는 자신의 일을 즐기지 않고서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것이 이씨의 판단이다. 그런 경험이 그를 예전과는 딴판인 새로운 직업인으로 바꾸어 놓았다.

 물리치료사를 천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는 이씨는 꿈은 무엇일까. “당장은 외국 물리치료사 면허를 따는 것. 그리고 그 일이 끝나면 캐나다 같은데서 일하는 것이다. 그곳은 근무 조건이 좋다.” 그야말로 새로운 구직 세대의 탄생을 알리는 선언 같은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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