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김 대결, 아들로 이어지나
  • 서명숙·조용준 기자 ()
  • 승인 2006.05.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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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일·현철 씨, 정치 기반 ·영향력 확보 ···盧·全 장남도 ‘수업중’



 지난 2월5일 민주당 목포지구당 개편대회가 열렸던 목포시 보광동 항운노조회관 3층, 金大中 전 민주당 대표의 장남인 弘一씨(46)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정치무대에 공식적인 첫 발을 떼 놓던 바로 그 순간, 내빈석 한쪽 구석에서는 그의 부인 尹惠羅씨가 내내 소리죽여 울고 있었다.

 아버지가 정계를 떠남으로써 그가 비로소 정계에 입문할 수 있게 된 것은 한국적 정치 상황에서 말미암은 아이러니로 볼 수 있다. 김대중씨가 회고록과 ‘한국현대정치사’ 집필을 구상하게 되어서야 그는 정치현실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게 되었다.

 그는 “20여년 넘게 어깨 너머로 정치를 들여다보았지만 현실은 다른 것 같다”고 조심스럽게 데뷔 소감을 말한다. 현재 그를 가장 짓누르는 것은 김대중씨의 엄청난 후광이다. ‘그 아버지에 그 자식’이기를 기대하는 많은 사람의 눈길이 버거운 무게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잘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과욕은 화를 부르기 마련” 이라고 말한다.

‘김대중이라는 겉옷’ 벗기에 주력

 그는 개편대회가 열리기 전, 다른 언론매체들의 인터뷰 요청을 물리치고 아버지와 사이가 별로 원만하지 못했던 <ㅈ일보>와 맨처음으로 인터뷰를 했다. 이는 오랜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이에 대해 그는 “김대중 이라는 겉옷을 벗어버리고 내 자신의 옷을 보여주지 못하면 정치인으로서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한다.

 그는 지구당 개편대회를 마치고 영국에 있는 김대중씨와 전화통화를 했는데 김씨가  “인터뷰 접근 방법이 좋았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김위원장이 영국에 있는 김씨와 전화통화를 하기는 이번이 세 번째, 그때마다 김씨는 자기가 국회의원에 두 번 당선됐던 목포지역구에 대한 참고사항 정치인이 지켜야 할 덕목에 대한 조언을 빠뜨리지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의 후광 말고도 현실 정치에서 김위원장에게 부담으로 작용하는 것이 또 있다. 그 하나는 ‘민주연합청년동지회’(이하연청)와의 관계에서 오는 것이다. 연청은 전국 시 ? 도에 15개 지부를 두고 각 시 ? 군 별로 2백87개 지구회를 둔 방대한 조직으로 민주당내 제2의 공직이라 할 만하다. ‘연청대학’출신이 기초의원에 46명, 광역의원에 27명 당선되었고, 14대 총선에서는 국회의원 7명을 배출해냈다.

 따라서 김위원장은 韓光玉 權魯甲 韓和甲 金玉斗 의원 같은 동교동 가신그룹고 연청그룹의 이중 지원을 받는 셈이다. 그러나 바로 이점이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측면도 이 점이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측면도 있다. 그를 잘 아는 민주당 인사들이 “좀더 표용력을 기를 필요가 있다”고 충고하는 것은, 그가 이 두사람 그룹 사라들에게 둘러싸여 다른 쪽의 목소리에는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뜻이 포함돼 있다. 총선 공천 때만 되면 당내에 “누구 누구는 김홍일 지분이다”라는 말이 오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에 대해 그는 “지금이야 사정이 달라졌지만 3공이나 5공 시절에는 젊은 사람을 구하기가 참 어려웠다. 내가 젊은 인재를 끌어들이는 역을 맡았는데,  그들이 사무처에서 점차 국장급으로 올라가고 공천도 받고 하니까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일 뿐, 내가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전혀 근거 없는 말이다”라고 항변한다. 연청과 관련해서도 “연청은 개인 영달을 위한 집단이 전혀 아니기 때문에 나도 연청이 문을 닫기 전까지는 연청 일에서 손을 뗄 수 없다”라고 말한다.

“벙어리 심정으로 살아온” 김홍일

 당 대표 경선과 관련해 그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해야 하는 것도 그에게 닥친 첫 번째 시련이다. 그는 그에게 지역구를 물려준 권노갑 의원 중심의 한정회와 관련해 “한정회가 어느 누구를 위한 특정 단체 단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정계은퇴 이후에도 계속 결속을 다지는 모임이라니까 가입했을 뿐이다 개소식에 참석한 뒤로는 한번도 가보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권의원을 도와 주어야 한다는 생각은 불변”이라고 밝혔다.

 당내 경선과 관련해서는 “어떻게 하겠다고 결정은 내렸지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 고민중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또 “누가 이기든 결과에 승복하고 승자에게 기대를 거는 풍토가 이번 전당대회에서도 자리잡을 것이다. 당이 깨지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라고 장했다.

 김홍일 위원장은 한마디로 아버지와 똑같은 정치역정을 걸어온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김대중씨의 걸음걸이가 자연스럽지 못한 것처럼 그 역시 시원스럽게 걷지 못한다.

 이는 80년 신군부가 그를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가담한 혐의로 구속하여 숱한 고문을 했던 흔적이다.

 71년 대통령선거 당시 경희대 정외과 재학생이던 그는 친구들과 함께 아버지의 선거운동을 돕는 것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서슬퍼런 3공 시절에 단지 ‘DJ의 아들’이란 이유로 취직은 물론 사업도  할 수 없었던 그는 한때 신촌에서 갈비집을 경영한 적이 있으나 당국의 세무조사로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80년 김대중씨가 정치활동을 재개하면서 그 역시 ‘운동’을 시작해 그 해2월 청년 전위조직인 연청을 조직했지만, 5 ? 17을 맞아 연청은 강제로 해산당했고, 그의 아버지가 신군부에게 끌려갈 때 그도 같이 끌려갔다. 그가 서울 강남의 초대형 중국음식점 ‘중국성’의 실제 주인이라는 흑색선전에 피해를 당한 것도 아버지를 닮았다.

 그가 이번에 지구당위원장으로 선출되기 전에 그의 측근들은 그를 일컬어 “50만명의 정치조직(연청)을 거느린 유일한 비정치인”이라는 소리를 자주 했다. 이는 그가 연청의 명예회장으로서 실질적으로 연청을 이끌었으면서도 당의 공식적인 직책을 맡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언제나 아버지의 그늘에 묻혀 있었고, 또한 좀처럼 자기 존재를 겉으로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그는 “그동안 벙어리 심정으로 살아왔다”고 말한다.

 전남 지역에서 유일한 원외 지구당위원장이 된 그는 목포의 민심과 관련해 “지구당 개편대회 이전에 목포 사람들을 많이 만나 그분들의 뜻을 알아보았다.  아직까지는 내게 따뜻한 시선을 보내지만 워낙 자아가 강한 지역이고 보니,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매우 엄격한 질책이 떨어질 것 같다”라고 말했다. 그는 그만큼 김대중씨뿐만이 아니라 목포 시민에 대히서도 마음의 부채를 느끼는 셈이다.

 현재는 그의 정치적 역량에 대한 판단을 유보할 시기이다. 많은 민주당 인사들은 그에게 걱정 반, 기대 반의 눈길을 주고 있다. 홀로서기를 시도한 그가 아버지처럼 정계의 거목으로 자라기 위해서는 앞으로 무수한 험로를 헤쳐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 것이다.

 그는 지금 그 길의 초입에 서 있다.

김현철 YS에 ‘직선제 고수’ 확신 심어

 김홍일씨가 아버지의 좌절로 말미암아 본격적으로 정치에 입문하게 됐다면, 김영삼 차기 대통령의 차남 賢哲씨 (34)는 당분간 공개적인 정계 진출을 꿈꿀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동안 김 차기대통령은 차남의 정치입문설이 나돌 때마다 “내가 집권하면 그 기간에 내 아들이 정치에 입문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라고 단호하게 그 가능성을 차단해 왔다. 14대 대통령선거 결과는 양김의 정치적 명암을 극명하게 갈라놓았을 뿐만아니라, ‘정가의 리틀 양김’으로 불리던 두 사람의 정계입문 방향을 결정지은 셈이다.

 그러나 지난 대통령선거 기간에 아버지의 ‘보이지 않는 보좌역’을 톡톡히 해온 현철씨에 대한 정가의 관심은 사그라지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다.

 그의 앞날에 대한 관측은 정반대로 엇갈린다. 그 하나는 김 차기대통령의 자녀 가운데 국내에 남아 있는 유일한 혈육인 데다. 치열한 당내 권력 다툼과 대통령선거라는 어렵고 중대한 시기를 같이하며 아버지의 신뢰를 얻어온 점을 감안하면, 앞으로도 ‘보이지 않는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리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떠도는 정가의 풍푼도 가지가지이다.

 주된 내용은 “각계 요로에 있는 인사들이 현철씨를 만나려고 줄을 섰다” “차기대통령이 각료 추천 작업을 차남에게 맡겼다” "각료 중 3 ∼ 4명은 현철씨 몫이다“ ”그에게 잘못  보이면 차기대통령 눈 밖에 난다“라는 것들이다. 그러나 정반대로되는 관측도 있다. 김 차기대통령의 친인척에 대한 엄정한 관리 방침과, 현철씨의 활동이 ‘아버지를 돕기 위한 극히 사적인 이유’에서 출발한 점을 감안하면, 그의 영향력과 활동반경은 급격히 줄어들고 좁혀지리라는 것이다.

 고려대 사학과를 졸업한 현철씨는 미국 사우스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뒤  한동안 쌍용투자증권에서 평범한 샐러리맨의 길을 걸었다. 험난한 역정을 걷는 야당 총재의 아들이면서도 ‘정치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던’ 그가 정치판에 뛰어든 것은 지난 87년 대선 때부터다. 당시 그의 활약은 홍보물을 배포하고 경남 ? 부산 출신 청년조직을 관리하는 수준의, 그야말로 ‘가족적 헌신’ 차원이어서 언론의 관심권 안에 들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대선이 끝나자 여론조사기관인 중앙조사연구소를 설립해 운영하면서 본격적으로 아버지의 정치생활을 거들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그는 언론의 눈길을 받기 시작했고, 연구요원 5명밖에 없는 연구소가 일부 언론에 의해 "YS의 대언론 홍보조정기관“으로 과대포장되기도 했다.

 그가 아버지의 단순한 조력자이자 민심 전달자에서 정치적 결저에 간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실질적인 측근으로 활약하기 시작한 시기는 3당합당 때부터다.  기존 여론조사기관에 통일민주당의 전산팀을 흡수해 새로 설립한 민주사회연구소 활용, 단순한 여론조사나 민심동향 파악만이 아니라 민자당 안팎의 각종 정치 정보를 수집하고 YS의 이미지를 관리하는 역할까지 맡은 것이다.

가신 그룹과의 갈등이 낳은 유학설

 90년대 내각제 각서파동이 일어난 어려운 국면에서 그의 보좌 역할은 두드러졌다. 당시 김영삼 민자당 대표는 당내의 각서 유출 파문에도 불구하고 내각제를 파기하고 직선제를 고수하는 대담한 승부수를 던졌다. 민심이 내각제에 별로 호응하지 않고 여전히 대통령직선제를 선호한다는 강한 ‘자기확신’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 확신을 뒷받침한 자료 가운데 하나가 차남 현철씨가 운영하는 연구소에서 극비리에 수행한 내각제 관련 국민여론조사 결과였다. 당시 김대표는 여론조사 주요 수치를 요약한 메모를 양복 안주머니에 늘 넣어 가지고 다니며, 주위 사람들에게 “민심을 확신하고 버티자”고 설득했다는 후문이다.  그는 민자당 대통령후보 경선 과정에서도 ‘아버지의 사적인 대리인’으로서 뒤켠에서 상당한 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진다. 김영삼 차기대통령의 한 측근인사는 “적으로 둘러싸인 민자당 안에서 생존을 꾀하며 권력을 획득해야 한는 상황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가장 사심없이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였겠는가. 아들을 통해 여러 가지 정보를 전달받고 그것을 신뢰한 것은 사실이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5년 간의 정치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단순 조력자로 머물렀던 87년 대통령선거 때와는 달리 지난해 대통령선거에서 상당히 폭넓은 행동 반경을 그리며 활약했다. 서울 여의도 한서오피스텔에 개인 사무실을 낸 그는 김영삼 후보를지지 하면서도 민자당과는 드러내놓고 접촉하기를 꺼리는 교수 법조인 언론인 들을 만나 여론을 수집한는 한편, 김후보의 자문교수단과도 자주 접촉해 그때그때의 여론 동향을 아버지에게 전달했다.  김후보가 바뻐서 직접 접촉하기 힘든 인사들을 만나는 ‘대역’을 맡은 것이다. 그는 또 대선 유세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매주 일요일 가족 오찬모임 때 여러 여론조사기관의 조사결과를 토대로 한 민심 향배를 김후보에게 ‘총괄보고’하기도 했다.

 선거기간에 바쁜 아버지를 대신해 ‘대역’을 맡았던 그를 두고 주변의 평가는 다소 엇갈린다. 상도동의 오랜 측근정치로 말미암아 자칫 차단될 가능성이 높은 민의를  가감없이 전달하는 ‘환기구’ 역할을 했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그 하나다. 공 ? 사조직이 포용하기 힘든 분야나 각종 단체의 민원을 수렴해 김후보의 정책 결정에 도움을 주었다는 평가도 받는다.

 그러나 김현철씨에게 일부 역할을 빼앗기거나 김현철씨가 내놓은 ‘측근들의 행태에 관한 보고’ 내용 때문에 김후보에게 혼쭐이 났던 상도동 일부 측근들 사이이ㅔ서는 “차남의 입김이 너무 커지는 것 아니냐” 하는 반문과 함께 은밀한 반발 기류도 형성되고 있다.  지난해말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명단이 전격 발표 되자 그날 오후 시내 모처에서 모임 김 차기 대통령의 오랜 ‘가신’들은 자기들의 전혀 감도 못 잡는 상태에서 인수위 참여자 명단이 발표된 정황에 나름대로 불만을 통로했다. 참석자들 사이에서는 “김윤환 의원과 현철이만이 내용을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오기도 했다.

 지난 1월초 일부 일간지 정치 가십란에 “김차기대통령 차남 미국유학‘ 보도가 나간 경위도 알고 보면 측근들과의 이같은 갈등이 낳은 것이다. 즉 김 차기대통령이 가족 모두를 불러놓고 ”처신에 각별히 유의하라“고 당부한 사실을 근거로 차남의 유학설을 일부 언론에 흘린 것이다. 김 차기대통령이 언론 보도 경위에 분노를 터뜨린 것도 일부 측근의 ’장난‘임을 감지했기 때문이라는 후문이다.

 차남 현철씨의 이제까지의 행보는 비록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행동반경과 활동폭을 넓혀 오기는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여론 전달자’ ‘정책 보좌역’의 범위를 벗어나지는 않는 것이다.  자신이  돆자적으로 권한을 행사하거나 아버지의 정치적 결정을 좌우한 흔적은 아지까지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이제부터다. ‘대통령의 신임을 받는 아들’ 이라는 저을 이용해 자신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관철시키려는 권력 주변 인사들이 그를 향해 모여들 가능성이 있다. 대통령선거 직후 그를 향해 면담 요청이 쇄도한 사실에서도 그 가능성은 충분히 엿보인다.

 김 차기대통령이 이 문제를 십분 감안하고 있다는 흔적도 나타나고 있다. 그는 선거 때만 해도 현철씨의 행동 반경을 한껏 넓혀 주었다.  그러나 지난 연초부터 아들의 활동폭을 크게 좁혔다.  그를 찾는 전화조차 철저히 체크되고, 외부 인사와의 접촉도 제한받고 있다.

  상도동의 한 측근 인사는 YS는 친인척 과 측근을 잘못 관리해 종국에는 엄청난 부담을 지게 된 지난 정권의 아킬레스건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차남에 대해서도 본인이 ‘제약을 받는다’고 느낄 만큼 철저히 관리하고 있다. 사적인 애정과 공적인 처신은 별개 문제이며, 특히 청와대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그 분별은 엄정하게 적용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또 현철씨의 향후 거취에 대해서도 ”공부를 마쳐야 한다“라는 본인과 아버지의 희망대로 장차 고려대 대학원에 진학할 예정이라는 게 이 인사의 귀띔이다.

“정치 젊어지면 盧? 全 장남 뜻 이룰 것”

 한편 김홍일씨의 정계입문을 계기로 우리나라에서도 본격적인 2세 정치인 시대가 열릴 징후가 보이고 있다. 盧泰愚 대통령의 장남 載憲씨(29), 全斗煥 전 대통령의 장남 *國씨(35) 들도 앞날을 대비해 정계 입문 수업을 받는 것도 관측된다

 특히 노재헌씨는 지난 91년 12월 朴浚圭 국회의장의 국제담당비서관(별정직 4급)으로 특채되어 현재도 계속 업무를 맡고 있다.

 재헌씨와 가까운 민자당의 한 의원은 “재헌씨는 앞으로도 계속 국회에서 일할 것이며 또 그것이 그의 희망이다. 그 자신이 정치를 하고 싶은 생각을 가진 것은 확실해 보이는데, 정치가 앞으로 젊어지면 그가 자신의 뜻을 이루기가 쉬워지겠지만 지금처럼 계속 늙어가면 어렵게 되지 않겠느냐”라고 전망 했다.

 재헌씨는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스탠포드 대학교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은 다음, 워싱턴의 국제전략문제연구소 (CSIS)에서 연구원으로 일한 만큼 정치에 입문하기 위한 기초는 쌓아놓은 셈이다. 그가 국회에서 일하겠다는 뜻을 밝혔을 때 노대통령과 가족들이 만류했으나 그는 “우리나라 정치 현장에서 연구를 계속하고 싶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전재국씨는 지난해 총선 때 전두환씨의 고향인 경남 합천 출마설이 무성했으나 결국 성사되지 못했다. 당시 그의 큰아버지 全基煥씨가 소유한 동호실업의 사장 安柄列씨가 ‘내고장사랑회’란 모임을 조직함으로써 그의 출마설은 더욱 증폭됐다. 연세대 경영학과를 나오고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과정을 마친 재국씨는 현재 ‘時空社’란 출판사를 경영한다. 그의 정치 입문은 아버지의 명예 회복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만큼, 앞으로 전씨의 거취에 따라 그의 행보도 달라지리라는 것이 연희동 측근들의 대체적인 관측이다. 전두환씨는 김영삼 차기대통령과 김대중씨에게 두아들을 보내 인사를 시키는 등 다음 정권에서 그의 입지를 넓히기 위한 노력을 한 것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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