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달 아래서 만나는 상상의 세계
  • 이상용 (영화평론가) ()
  • 승인 1999.09.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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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에 볼 만한 비디오 · 영화/ 셰익스피어 명작 등 좋아

추석이 되면 온 가족이 모여 즐겁게 식사를 한다. 문제는 식사를 마친 뒤다. 텔레비전 앞에 앉아 해마다 반복되는 그렇고 그런 특집 쇼 프로에 눈을 고정시키기 일쑤다. 이럴 때 신나고 재미있는 비디오를 보면 어떨까. <편집자>

영화로 보는 텔레비전의‘선과 악’
  텔레비전을 어떤 사람들은 바보 상자로 취급하지만, 교양도 주고, 음악도 주고, 정보도 주는 오늘날의 텔레비전을 무지랭이 취급하는 것은 이제는 좀 곤란하다. 영화 속에서도 텔레비저을 중요한 소재다.

  미래 사회를 그린 <트루먼 쇼>는 개인을 구경거리 삼는 사람들의 비인간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트루먼은 쇼를 위해 태어날 때부터 방송에 그의 모습에 비쳤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성장기 사랑의 키스마저 온 세계 사람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생중계’되었다.

  텔레비전 속 세상이 비록 인공적이고 만들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때로는 작은 감동도 있다. 로버트 레드퍼드가 연출한 <퀴즈 쇼>는 퀴즈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사람들의 사연과 그들이 펼쳐 보이는 게임이 스포츠 못지 않게 박진감과 긴박감이 있어 지켜보는 사람들을 동화시킨다. 방송이 이렇게 매력적이다 보니 해방과 욕설로 무기를 삼는 불법 방송도 있다. <볼륨을 높여라>는 해적 방송을 통해 젊은이들의 자유를 상징화한다.

  최근에도 텔레비전과 방송을 소재로 한 영화는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그 중 하나는 텔레비전 연속극으로 들어가는 남매의 이야기를 다룬 <플레전트 빌>.

  50년대의 시트콤 <플레전트빌>을 시청하는 일이 전부인 데이비드와, 학교의 스타가 되기를 꿈꾸며 놀기 좋아하는 쌍둥이 여동생 제니퍼는, 성격 차이 때문인지 평소에도 티격태격한다. 그런데 남자 친구를 초대한 제니퍼와 채널을 다투던 데이비드가 리모컨을 망가뜨린다. 이때 느닷없이 나타난 이상한 수리공이 건네준 리모컨의 단추를 누르는 순간, 남매는 흑백 시트콤 <플레전트빌> 속으로 빨려들어 간다.

  그곳은 텔레비전 밖의 세상과는 너무나 다른 별천지다. 날마다 화창한 날씨, 불이 붙지 않는 라이터, 키스도 모르는 젊은이들, 예의 바른 사람들 그리고 흑백의 사물들, <플레전트빌>을 즐겨 보았던 데이비드는 그래도 마을 생활에 그럭저럭 적응하지만, 천방지축 제니퍼는 이 단조로운 마을에 사랑과 섹스 바람을 불러일으킨다.

  그 덕분에 비로소 사랑을 알게 된 사람들 사이에서 큰 변화가 일어난다. 얼굴과 몸에 점점 색깔을 지니게 된 것. 관능과 자유 의지를 찾아 가면서 풍경과 사람은 하나둘 빛깔을 띠기 시작하고, 마침내 보수적인‘흑백인’들은‘유색인’들을 탄압한다.

  <생방송 에드 TV>는 좀더 과감하게 소재를 풀어낸다. 샌프란시스코의 한 방송사가 시청률을 올리려고 대담한 프로그램을 기획하는데, 그것은 평범한 시민의 일상을 24시간 동안 생중계하는 것이다. 비디오 가게 점원인 에드는 우연히 카메라 테스트를 받은 뒤 귀여운 외모와 유머 감각 덕에 발탁된다.

  방송을 통해 에드의 사생활이 모두 공개되자 에드는 일약 스타덤에 올라앉는다. 방송사는 한술 더 떠서 섹시한 여배우 질을 에드의 새로운 여자 친구로 붙여 준다. 에드의 생활은 점점 엉망이 되어간다. 텔레비전의 병폐를 꼬집으면서도 청춘 영화의 맛을 지니고 있다.

셰익스피어와 ‘연애’한 번 해볼가
  이번 추석에 걸린 영화들의 제목을 살펴보면 낯익은 이름 하나가 있다. 주인공을 맡은 배우들도 케빈 클라인 · 미셸 파이퍼 · 소피 마르소 등 매우 화려하다. 도대체 할리우드는 무슨 일을 벌이려고 한 것일까. <한여름밤의 꿈>은 지금 할리우드가 셰익스피어와 열애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이다. 이 작품은 무성 영화 시절 이후 벌써 다섯 번이나 영화로 만들어졌다. 미국의 대표적인 코미디 감독인 우디 앨런은 <한여름밤의 꿈>에서 모티브와 제목을 빌려와 <한여름밤의 섹스 코미디>라는 영화를 만들었을 정도. 두 쌍의 연인과 요정 들의 세계가 어우러지면서, 인간의 애욕을 담백하게 묘사한 작품 세계는 오늘날 돌아보아도 음미할 구석이 많다.

  올 초반에 셰익스피어의 기세는 대단했다. 그의 원작들을 비틀어 혼합한 <셰익스피어 인 러브>가 아카데미 시상식장을 휩쓸며 작품성과 대중성을 인정받았다. 이 정도면 할리우드에서 셰익스피어 르네상스라는 말이 나도는 것도 수긍할만하다.

  그러나 셰익스피어 르네상스가 언제 따로 있었던가. 셰익스피어 작품은 언제나 영화 각색 대상 1호다. 대부분의 경우 감독을은 명성에 누가 되지 않도록 원작에 충실하려고 노력한다. 시대적 배경이나 주인공 의상은 변할지라도 원작의 대사에 충실함으로써 기교 넘치는 화술을 즐기는 경우가 많다. 오죽 원작의 말맛이 좋았으면 스포츠카와 총을 난사하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판 <로미오와 줄리엣> (우일)에서도 원작의 대사를 그대로 실려 두었을까.

  그러나 말맛뿐만 아니라 분위기에서도 올리비아 핫세가 주연한 <로미오와 줄리엣> (CIC)을 잊을 수 없다. <말괄량이 길들이기> <햄릿> 등 셰익스피어 작품을 여러 편 연출한 프랑코 제피렐리 감독은 이 영화 한편으로 무명이던 올리비아 핫세를 일약 스타덤에 올려놓았다.

  90년대에 이를 다르게 계승해야 했던 디카프리오판 <로미오와 줄리엣>의 바즈 루어만 감독은 제피렐리의 <Romeo and Juliet>과 다르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 우선 영문 제목 표기를 <Romeo + Juliet>로 했다. 사소한 차이지만 영화를 놓고보면‘+’의 의미는 신세대의 MTV적 감각을 이야기하는 거이 되었고, 컴퓨터 그래픽과 테크노 사운드가 첨가된 셰익스피어극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셰익스피어에 대한 할리우드의 두번째 사랑법은 원작이 지닌 풍부한 영감을 빌려오는 경우다. 우디 앨런의 <한여름밤의 섹스 코미디>도 그랬지만 호주 출신 여성 감독 조슬린 무어하우스도 셰익스피어의 아성에 도전했다. 그녀는 전작 <아메리칸 퀼트>로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는데, 퓰리처상 수상자인 스마일리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1000 에이커> (폭소)는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1000 에이커에 달하는 농장을 소유한 래리 쿡은 리어왕의 고집을 닮은 인물. 그는 세 딸 지니 · 로즈 · 캐럴라인과 함께 광할한 땅에서 산다. 그러던 어느날 우리의‘리어왕’은 딸들에게 땅을 나우어주고 관리하라고 선포한다. <리어왕>의 대본대로 막내인 캐럴라인은 이를 반대했다가 쫓겨난다. 주인공들의 이름도 원작을 교묘히 비틀어 놓았다. 고전에 등장하는 리어 · 거널리 · 리건 · 코델리아의 머리 글자가 농장 주인들의 이름 앞 글자로 교묘히 새겨진 것이다.

  그러나 퓰리처상 수상작답게 고전을 그대로 해석하지만은 않았다. 원작에서 리어왕의 몰락은 단순히 두 딸의 욕심 때문이었지만 이 작품에서 두 언니는 이유 있는 항변을 하고, 그것이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횡포에 맞서 동생을 보호한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양념 <십이야> (DMV):1596~1602년에 셰익스피어는 희곡 여섯 편을 내놓았다. 이들은 모두 가상 공간을 배경으로 하여 인간의 욕망과 사랑을 시각적인 대사로 묘사한 작품들.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는 <한여름밤의 꿈> <헛소동> <베니스의 상인>을 들 수 있는데, 그 중 <십이야>는 남녀의 성이 뒤바뀌는 기묘한 소동을 그린 코미디다.

매력적인 애니메이션의 세계
  요즘 아이나 어른 할 것 없이 애니메이션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매년 여름마다 선보이는 디즈니의 <타잔> <뮬란> 등은 물론이고, 열광적인 팬들은 불법으로 떠도는 일본 애니메이션 한두 작품을 소유하고 있을 정도. 미국 애니메이션은 출판 만화와 깊은 유대를 맺고 있다. 배트맨 · 슈퍼맨 · 스파이더맨과 같은 초능력자들을 다룬 시리즈물은 영웅 이미지를 지닌 출판 만화 속의 주인공이다. <스폰>은 선이 아니라 악을 택하는 반영웅적인 인물. 국내에서도 상영되었는데 그 진가는 애니메이션에 있다. 복수를 해가는 지옥의 영웅 스폰의 모습은 인간의 이중성과 바로 맞닿아 있으며, 미국에서는 이러한 면모 때문에 더 사랑을 받았다.

  <스폰>의 어두운 면이 좀 걸리면, 미국 중산층 가족을 엿보는 것은 어떨까. 국내에서 방영되었던 <심슨 가족> (폭스)은 작년 초에 200회 특집극이 방송되는 등 10년간 꾸준히 인기를 누리는 <심슨 가족>은 캐릭터들의 독특함도 있지만 패러디를 주 소재로 삼는다는 점에서 특이한 애니메이션이다. 가령 <타이타닉>을 패러디하여 유머를 선사한다.

  이제 애니메이션은 미국과 일본의 전유물만은 아니다. 3편의 <한국 단편 애니메이션 모음> (유네클럽)집은 한국 애니메이션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대다수 작품들은 이미‘98 한국 단편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 선보인 작품들이다. 수상작을 비롯해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성향을 드러내는 작품에서부터 사적인 체험이나 경험, 혹은 사라져 가는 향수를 달래는 서정적인 작품에까지 다양한 세계를 3개의 비디오에 담았다.

  1편 수록작의 대표 격인 <덤불 속의 재>는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추상적인 형식으로 담아낸, 한국의 대표적인 단편 애니메이터 이성강씨의 작품이다. 해외에서도 각광받았다. <Subway>는 95년 서울 국제만화페스티벌 대상 수상작. 지하철로 대변되는 현대의 차가움과 복잡성을 다양한 시각으로 그린 수작이다. 2편의 서두를 여는 <꿈꾸는 종이인형의 살인>은 97년 동아 · LG 애니메이션 영화제 대상 수상작이다. 깔끔하면서 깊이 있는 화면 구성으로 로봇을 만드는 박사와 현실 부적응자인 소녀, 그리고 불법 메모리가 내장된 사이보그와의 삼각 관계를 통해 초현실적인 이야기를 그려낸다. 2편과 격차를 두고 제작된 3편에서는 기술의 발전을 더 엿볼 수 있는 3D 애니메이션이 많다는 것도 이채롭다.

  양념 <희망으로 그리는 세계> (케이제이엔터테인먼트): 이 작품은 유엔어린이구호기금(UNICEF)이 캐나다 국립영화위원회에 의뢰해 어린이의 인권을 주제로 만든 작품집이다. 첫 수록작인 <코코의 산수>만 보아도 단박에 알 수 있다. 수학을 싫어하는 코코가 어떻게 숫자와 친해지게 되는지를 발랄한 상상력으로 그려낸 단아한 작품. 소재의 폭도 넓다. <마리아와 새 가족>은 해외 입양아 문제를 다루었다.


가을에 느끼는 공포의‘참맛’
  <대부>를 감독한 프랜시스 코폴라가 뱀파이어 영화를 완성하고 심경을 고백한 일이 있다. 흡혈귀의 송곳니가 여인의 흰 목에 박힐 때 묘한 쾌감을 느꼈다고 말이다.

  여하튼 공포감 때문인지 아니면 성적 판타지 때문인지 드라큐라는 꽤 오랜 생명력을 지닌 영화 속 괴물이다.최근 <미라>가 부활하기는 했지만, 드라큐라가 등장한 편수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란다.

  흡혈귀 이름도 가지가지. 뱀파이어 · 드라큐라 · 레버난(revenant) 등 변신의 천재답게 이름도 다양하다. 요즘은 퇴마사들도 한몫 한다. 지금 국내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는 <미녀와 뱀파이어>는 할리우드의 신예 사라 미셸 겔러를 괴물을 처치하는 퇴마사로 삼아 하이틴 로맨스와 호러를 자연스럽게 결합한 시리즈물. 요즘 할리우드를 들여다보면, 청춘물과 호러의 결합은 별스러운 현상도 아니다.웨스트 크레이븐의 <스크림>이 성공한 뒤로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라는 긴 제목의 <스크림> 아류작들이 급습했다.

  정신분석학자들이 들으면 그 사회의 10대들이 억압받고 있다는 증거로 삼을테지만, 유행인 것만은 확실하다. 국내에서도 <여고괴담> <링>, 공포와 멜로를 뒤섞은 <자귀모> 등 공포 영화 붐이 있었고, 특히 10대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10대 공포 영화의 주인공들이 대부분 소외당하는 학생으로 묘사됨으로써,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인공을 소외시키는 데 동참해 그것이 묘한 안도감을 준다. 그러나 뒤집어 보면 더 중요한 것은, 불안한 미래의 10대들이 불안감을 느끼는 주인공과 동화되는 탓일 것이다.

  <킹덤>과 같은 시리즈물이나 공포 고전들도 추천하고 싶다. 고전 흡혈귀물인 <노스페라투>(시네마떼끄), 정신 병자를 다룬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시네마떼끄)은 모두 독일 무성 영화 시절의 대표작들이다. 독일 표현주의 영화 시절 프리츠 랑 감독이 만든 공포 영화의 원조 격인 <M>(씨네아떼끄)도 빼놓을 수 없다. 사이코 살인마를 주인공으로 삼은 이 작품은 과격한 살인 장면은 하나도 없지만, 스릴러 기법이 어떻게 음악을 통해 구현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모범적인 영화. 공포 스릴러의 기초가 모두 포함되어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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