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TO 학교에 중국을 입학시켜라”
  • 최영재 기자 ()
  • 승인 1999.11.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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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11월 말 뉴 라운드 협상 앞두고 막바지 물밑 교섭... 불발 땐 양국 관계 ‘흔들’

중국은 과연 올해 안에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할 수 있을까? 가부를 결정할 11월 말 미국 시애틀의 세계무역기구 대표 모임에 전 세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만약 중국이 올해 안에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하지 못한다면 그 대가는 엄청나다. 이는 중국뿐만 아니라 중국과 무역을 하는 세계 여러 국가에 공통으로 적용된다. 거대 시장 중국과 전 세계는 끊임없는 무역 분쟁을 감수해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중국 국내 시장엣 일어나는 변화가 더 심각하다. 무엇보다도 13억 인구를 가진 거대한 잠재 시장에 무역 장벽이 그대로 남게 된다. 세계무역기구는 통상 과정에서 일어나는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생긴 국제기구인데, 중국은 이런 해결 구조에서 계속 제외될 것이다. 그만큼 세계 각국이 치러야 하는 비용도 크다.

이는 중국의 권력 구조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하다. 중국 경제의 내부 개혁과 대외 개방을 추진하고 있는 그룹은 주룽지 총리와 주변의 개혁적인 인물들이다. 세계무역기구 가입이 좌절될 경우 이 그룹의 입지는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주룽지 총리는 이미 지난 4월 미국 방문 길에 세계무역기구 가입 협상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본국에 돌아가서 비난을 많이 받았다. 이 때문에 그의 영향력은 크게 약해졌다. 그래서 주룽지 총리 진영은 그의 영향력을 지키고 세계무역기구 가입에 대한 국민적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 지방에 참모들을 파견하기까지 했다.

가입 실패하면 주룽지 총리 입지 크게 불안
세계무역기구 가입에 실패한다는 것은 개혁주의자인 주룽지의 개혁 청사진이 좌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20년 전부터 시작된 중국의 개혁 · 개방이 멈출 리는 없겠지만, 그 속도는 분명히 늦추어질 것이다.

그 조짐은 벌써부터 나타나고 있다. 최근 중국 정보산업부는 에릭슨 · 모토롤라 · 노키아 같은 외국계 회사 생산품에 수입 할당제를 적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는 중국에서 보수파의 입지가 강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계획을 밀어붙인 이는 정보산업부 우지추안 부장이다. 보수파인 그는 주룽지 총리의 강력한 경쟁자이며 세계무역기구가 요구하는 시장 개방안에 결사적으로 저항해 온 인물이다. 그는 최근 중국의 인터넷 산업에 직접 투자 형태로 들어와 있는 외국계 기업의 활동을 금지한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중국이 국내 시장의 빗장을 걸어 잠그려는 시도는 곳곳에서 발견된다. 최근 중국 당국은 외국인 합작 보험회사 네 곳의 면허를 취소했다. 이 회사들은 지난 4월 주룽지 총리가 영업을 허가한 곳인데 실무 관리들이 이를 뒤집은 것이다. 이런 움직임은 중앙뿐만 아니라 지방으로까지 퍼지고 있다. 중국의 각 지방 정부는 외국인 투자를 받아들이기는 하되 해당 지방 산업과 경쟁하지 않는 하이테크 산업 분야 투자만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했다. 전문가들은 세계무역기구 가입이 좌절되면 중국 당국의 보호주의 경향이 더욱 강해질 것이라고 내다본다.

물론 중국이 마냥 보호주의로만 갈 수 없는 사정도 있다. 중국의 산업과 기술력은 외국 자본과 기술이 끊임없이 공급되지 않으면 발전할 수 없다. 중국 현지 정서에 밝은 서방 기업인들은 비록 법적인 보호 장치가 없더라도 중국이 외국 기업을 마냥 몰아세우지는 않을 것이라고 낙관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중국과 무역을 하는 외국 기업은 당분간 막대한 출혈을 감수해야만 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중국의 세계무역기구 가입을 결정하는 데 가장 영향력이 큰 미국 백악관은 최근 이를 허용하는 쪽으로 돌아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1월 2일자 <뉴욕 타임스>는 클린턴 대통령이 10월 16일부터 장쩌민 중국 국가 주석과 전화 통화를 통해 일련의 비밀 협상 안을 교환해 왔다고 밝혔다. 이에 따르면, 백악관은 미국 의회가 내년까지 합의안을 승인할 수 없다 하더라도 11월 안에 협상이 타결되기를 바라고 있다고 전했다. 물론 이는 미국 산업의 출혈뿐만 아니라 클린턴 행정부의 외교 정책 때문이다. <뉴욕 타임스>는 클린턴 대통령이 임기 마지막 해를 남겨두고 중국 포용정책의 마지막 성과물로 중국과의 세계무역기구 가입 협상 타결을 생각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한편 중국은 현재 두 갈래 전략을 펴고 있다. 하나는 유럽연합(EU)에 로비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유럽과 중국 관리들은 10월 25일과 26일 제네바에서 만났다. 이는 워싱턴에 대한 간접적인 압력이기도 하다.

중국 “조건 더 안 달면 클린턴 제안 받겠다”
다른 하나는 미국과의 직접 협상이다. 이는 지난 4월 클린턴 대통령이 내놓은 비공식 제안과 관련되어 있다. 만약에 중국이 이를 받아들인다면 세계무역기구 가입 문제는 쉽게 풀릴 가능성이 높아진다.

중국 최고 지도부는 4월 13일 클린턴 대통령이 주룽지 총리에게 전화를 걸었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이 때는 주룽지 총리가 백악관 회담에서 세계무역기구 가입에 관한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하고 워싱턴을 떠난 뒤였다. 이 날 클린턴 대통령은 주룽지에게 다시 워싱턴으로 돌아오라고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클린턴 대통령이 이처럼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인 것은 의회 반대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클린턴은 당시 몇 가지 조건을 달고 중국의 세계무역기구 가입을 지지하겠다고 제의했다. 클린턴이 주룽지에게 제시한 협상안은 세계무역기구 헌장 13조와 관련된 것이었다. 이 조항은 미국이 신입 회원국에 다자간 무역 협정을 얼마간 적용하지 않더라도 그것을 용인하는 조항이다.

이를 중국 처지에서 풀이해 보면 다른 회원국과의 무역은 세계무역기구 규정을 따르면 되지만, 미국과의 무역은 미국 국내법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미국이 중국과 ‘일반적인 무역 관계’를 유지할 것인가 여부를 세계무역기구가 아니라 자국 의회에서 해마다 판단하겠다는 것이다. 이대로라면 미국은 여전히 자국 판단으로 중국에 무역 제재를 가할 수 있다. 물론 나중에 미국 의회가 중국에 ‘영구적인 일반 무역 지위’(WTO 회원 국가들은 매년 자동적으로 이를 취득함)를 승인한다면 미국은 예외 조항을 거두어들일 것이다. 미국이 이런 식의 예외 조항을 적용하지 않은 선례는 물론 있다. 미국은 최근 그루지야가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할 때 이 조항을 적용하지 말자고 세계무역기구에 요청했다.

하지만 중국은 클린턴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주룽지 총리는 다시 협상을 시작하기 전에 냉각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다가 5월 7일 나토군이 유고의 베오그라드 중국대사관을 폭격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 때문에 중국과 미국의 세계무역기구 가입 협상은 이후 넉달 동안 꽁꽁 얼어붙었다.

협상은 10월부터 다시 시작되었다. 현재 중국은 4월에 미국이 내놓았던 제안을 다시 거론하고 있다. 중국 방침은 4월에 클린턴이 내걸었던 조건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미국이 또 다른 조건을 걸지 않는다면 이를 받아들이겠다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변수가 있다. 미국이 중국에 추가 양보를 요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중국은 지난 4월에 내놓았던 최후 양보선을 절대 지킬 것이라고 버티고 있다.

뉴 라운드 협상이 열리는 11월 말 시애틀 회의를 앞두고 양국이 벌이는 숨가쁜 물밑 협상. 그 결과에 따라 미 · 중 관계는 크게 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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