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녹색당 지도부 무기 거래 속임수 의혹
  • 프랑크푸르트. 허광 통신원 ()
  • 승인 1999.11.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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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탄압국 터키에 전차 수출 ‘겉으론 반대, 속으론 찬성’ 물의

녹색당의 종말을 알리는 검은 수요일? 적 · 록 연정이 무너지는 신호탄? 지난 10월 20일 슈뢰더 정부가 터키에 시험용 전차(레오파드 모델 ⅡA5) 1대를 보내기로 한 결정에 독일의 일부 언론과 정가에서는 이런 의문을 던지고 있다. 언뜻 보아 대수로울 것이 없는 무기 거래에 왜 이 같은 의문이 따르게 된 것일까.

터키 정부는 앞으로 10년에 걸쳐 3백10억 달러를 투입하는 군 장비 현대화 계획을 갖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신형 전차 천 대를 보유한다는 것인데, 터키 군부는 여기에 맞는 모델을 국제 무기 시장에서 구하고 있다.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우크라이나 등 각국의 신형 전차를 1년 반 동안 시험한 뒤 구입하거나 합작 여부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터키는 이 같은 방침을 독일에도 전하고 1년 전부터 시험용으로 쓸 신형 전차를 보내라고 요구했다. 전차 구입 액수가 70억 달러이니 서방의 어느 군수 기업도 놓치기 아까운 황금 시장이다. 독일 정부도 레오파드 1대를 시험용으로 보내기로 했는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

독일, 터키의 21세기 지역 패권 전략 지원?
첫째, 유럽연합(EU)은 터키 정부(군부)가 쿠르드 족 탄압 등 인권 탄압을 지속하는 한 유럽연합 가입을 거부한다는 방침인데, 이들에게 무기를 대준다는 것은 인권 탄압을 방조한다는 뜻이다. 유럽연합 리더라고 자처하는 독일 정부가 이 같은 반론을 무시하기는 쉽지 앟다. 그래서 나온 해답인즉, 독일 정부는 단지 시험용 모델을 보낸 것일 뿐 전차 천 대 매각은 터키의 인권 상항이 개선될 때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독일이 터키에 전차를 보낸다는 것은 국제 무기 박람회에 전차 1대를 출품한 것이나 다를 바 없고, 터키 군부가 독일 전차를 구입할 생각이 있다면 인권도 개선할 것이니 걱정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여기에 몇 가지 의문이 있다. 독일 정부 쪽에서 무기 거래를 최종 결정하는 기구는 국가안보회의인데, 이곳에서는 인권 문제 해결을 터키에 공식으로 요구하기는커녕 거론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인권 문제 해결과 결부해 무기를 수출한다는 말은 그저 무기 거래에 대한 반발을 무마하려고 꾸며낸 것이 아닐까?

또 하나, 국가안보회의 자체가 지닌 문제다. 이 곳에서는 적 · 록 연정의 대표 5명(사민당에서 셋, 녹색당에서 둘)이 다수결 표결을 하는데, 마지막 결정권은 슈뢰더 총리가 쥐고 있다. 다시 말해 의회의 의견이나 결정권은 처음부터 배제되어 있다. 그래서 사민당 소속 유럽의회 의원들은 ‘국가안보회의가 당론에 맞지 않고 도덕적으로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결정을 했다“고 반발한다. 국가안보회의가 독주하는 한 독일 전차는 이미 팔린 것이나 다름없다고 이들은 본다.

물론 독일 전차가 실제로 팔리게 될지는 터키 정부의 판단에 달려 있다. 터키는 19세기 말부터 전통적으로 독일의 전략 요충지였고 독일의 지원을 받아 무장해 왔다. 독일 정부가 전후 나토에 가입한 후 터키에 팔아온 무기만 해도 70억 마르크 어치가 넘는다. 통일 뒤에는 옛 동독군 무기 대부분을, 예를 들면 방어용 전차 3백대, 포 10만 문, 소총 25만 자루, 탄환 4억 발을 거저 넘겨주기도 했다. 병력 규모에서 나토 제2의 규모를 자랑하는 터키는 사실상 독일 무기로 무장하고 있다고 보아도 된다. 두 나라의 무기 거래는 언제나 호황을 누리고 있는데, 독일 정부는 지난해에도 약 4억5천 만 마르크어치의 무기 수출을 허가했다. 게다가 터키 육군은 10년 전부터 레오파드 전차 구형 모델(1A1, 1A3) 약 4백대를 보유하고 있고 전차병 훈련은 물론 정비 공장도 독일 모델에 맞추고 있다. 터키가 독일제 신형 전차를 택할 확률은 그만큼 높다.

그런데 적 · 록 연정은 출범 당시 바로 이 같은 전통적인 무기 수출 정책에 분명한 선을 그어 눈길을 끌었었다. 그 한 가지 예로, 연정 합의문에는 무기 수출에 인권 상황을 고려한다는 조항이 있다. 바로 이 점을 근거로 삼아 안보회의 결정이 부당하다는 반론에 대해 국방장관 샤핑은 새로운 해석을 하고 있다. 이 조항이 ‘나토 밖’에만 해당하므로 나토에 속하는 터키는 예외라는 것이다.

터키에 들어갈 독일 전차 천 대는 어디에 필요한 것일까? 샤핑은 터키에 방어용으로 전차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터키가 신형 전차 천 대를 필요로 할 만큼 외부로부터 위협받고 있을까? 터키가 주변국, 예를 들어 그리스나 중동의 몇 나라와 분쟁 관계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리스와는 키프러스 점령 정책 때문에, 또 중동국들과는 수자원 확보를 둘러싼 문제로 대립하고 있다. 다시 말해 터키는 자국의 이익을 확보하려고 분쟁을 일으키는 당사자이지 외부로부터 위협받는 나라가 결코 아니다. 따라서 이 분쟁은 터키의 정치적인 협상 의지로 풀어야 할 것이지 군사력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

터키의 실제 외교는 어떤가. 터키는 유엔이 쿠르드 족 보호 지역으로 설정한 이라크 영토를 불법으로 침범하고 있다. 또 서방은 이를 지금껏 묵인하고 있다. 군사 전문가들은 신형 레오파드 전차가 주로 산악 지대인 터키 내부보다는 터키 외부에서 벌이는 작전에 적합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독일은 터키의 2000년대 지역 패권 전략을 서방의 어느 나라보다도 앞장서서 지원하려는 것일까.

녹색당원들, 줄줄이 당적 이탈 가능성
안보회의 결정에 누구보다 커다란 타격을 받은 것은 녹색당원들이다. 그들은 연정 협상에서 녹색당의 당론을 담은 합의 사항이 깨진 점에 반발하고 있다. 어쩌면 코소보 전쟁에 이어 또다시 당적 이탈 사태가 줄을 잇게 될지도 모른다. 그 때문인지 녹색당 지도부는 외무장관 피셔(녹색당)가 안보회의에서 반대표를 던진 사실을 들어 ‘우리는 떳떳하게 싸운다’며 기세를 올리고 있다. 전차 매각은 결코 있을 수 없으며 ‘장외 투쟁’을 통해서라도 저지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독일의 보수 정론지라고 자처하는 신문(FAZ)은 안보회의 결정이 있은 지 닷새 만에 새로운 사실을 보도했다. 녹색당 지도부가 보여주고 있는 투쟁 의지가 체면치레용 연극이라는 것이다. 그 내막은 이렇다. ‘피셔 외무장관은 안보회의에서 무기 수출 금지 조항을 강화하는 방안에 반대했다. 그 시점은 지난 8월이었고, 피셔가 반대한 안건은 사민당 일부에서조차 격분하고 있다. 피셔는 그후 터키에 또 다른 무기를 수출하는 문제에서도 슈뢰더의 압력에 굴복해 무기 수출에 반대하는 경제 원조부 장관을 고립시켰다. 따라서 피셔는 지난 여름까지만 해도 생각지 못했던 노선을 이제 갖고 있는 듯 속임수를 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슈피겔> 발행인 아욱슈타인은 “녹색당의 본질을 완전히 파괴해서 껍질뿐인 당을 만드는 것이 기회주의자 피셔에게는 드넓은 세상으로 나가는 입장료가 될 것이다”라고 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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