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 뜻에 따라 ‘누더기 유적지’ 만드나
  • 나권일 기자 ()
  • 승인 1999.12.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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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 황토재 전적지 또 확장…전북도청, 졸속 · 전시 행정 비판에 “대통령 지시 사업”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에는 동학 농민군의 첫 전승지였던 황토재에 사적 제295호로 지정된 동학혁명 유적지가 조성되었다. 5만평 가까운 넉넉한 공간에는 녹두자군 전봉준의 동상과 기념관 · 기념탑 · 제민당 · 구민사가 있다. 황토재 전적지는 동학농민혁명 관련 유적지 중 가장 잘 보존된 지역으로 꼽힌다.

그런데 전라북도(도지사 유종근)는 현재 무려 4백64억원(국비 3백93억원)을 들여 황토재 유적지를 9만6천 평으로 확장하는 ‘동학농민혁명 기념관 건립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전시관 · 농민광장 · 야외 교육 행사장을 갖춘 대규모 기념관을 건립한다는 이 사업은 2002년 완공을 목표로 12월부터 공사에 들어갈 예정이다.

전라북도가 추진하는 이 기념관 건립 사업은 4백억원에 가까운 구고가 지원되는 대규모 사업인데도 동학 관련 단체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 채 관이 주도하는 졸속 사업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현재의 황토재 유적지조차 남아도는 땅을 연못이나 잔디밭 등 조경 시설로 만든 처지에서 또다시 기념관을 건립한다는 것은 국고를 낭비하는 전시행정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는 것이다. 또 동학 관련 단체나 학자의 의견을 배제한 채 행정기관이 일방적으로 주도한다는 비판도 거세다.

동학농민혁명 기념관 건립 사업은 애초 전라북도와 현안 사업이었는데 예산이 부족해 미루어 왔다. 그러다 지난해 8월 25일 호남을 방문한 김대중 대토령이 전북도청에 들러 건립 지원을 약속하면서 전격 결정되었다.

그러나 전라북도가 계획한 대로 사업이 진행될 경우 머지않아 황토재 기념관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대통령의 지시로 돈을 쏟아 부은 ‘누더기 유적지’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현재 황토재 유적지 기념탑은 63년 박정희 대통령 재임 시절에 정부가 주도해 건립했고, 기념관과 제민당은 83년과 87년 전두환 전 대통령 재임 시절에 정부 도움으로 세웠다. 아버지가 동학접주였던 것으로 알려진 박정희 전 대통령은 5 · 16 쿠데타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우리나라의 혁명은 동학혁명과 5 · 16혁명 둘뿐’이라고 강조했고, 전두환도 12 · 12 쿠데탈 정권을 잡은 뒤 같은 성씨인 전봉준 고택과 황토재르 사적지로 지정하는 등 전봉준 장군 선양에 열을 올렸다.

김대중대통령 역시 정읍 황토재와 인연이 있다. 김대통령은 5 · 18 광주민중항쟁 직전인 80년 5월 10일 황토재에서 열린 갑오농민혁명 문화제에 참석해 10여 분간 기념사를 한 일이 있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이를 빌미로 삼아 정읍군수와 정읍경찰서장을 해임했고, 정읍의 동학 관련 단체 간부를 구속했다. 김대중 대통령으로서는 ‘빚’을 졌다고 할 수 있다. 결국 김대통령 지시에 따라 전북도청은 황토재에 지금까지보다 더 많은 돈을 들여 교육관과 전시관을 세울 계획을 세웠다.

역대 정권, 동학농민혁명 축소 · 왜곡
정권이 바뀔 따마다 들먹여지는 동학농민혁명, 거기에 정읍 황토재에만 집중되는 기념사업에 대해 관련 단체의 비난 목소리가 높다. 더구나 유종근 전북도지사의 출신지가 정읍인 까닭에 눈길이 곱지 않다.

동학농민혁명을 기리는 기녀사업은 이처럼 한국 근 · 현대사의 부침에 따라 왜곡되어 왔다는 것이 관련 연구자들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역대 정권은 전국적 항쟁이었던 동학농민혁명을 고부나 정읍 지역의 민란 정도로 축소해 왔고, 때문에 기념사업도 정읍 황토재에 집중되었다는 것이다.

현재 기념사업의 ‘빈익빈부익부’ 현상을 보여주는 사례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김제시 금산면 원평 지역은 1893년 3월 동학교조신원운동이 벌어진 금구집회가 열렸던 곳이자 이듬해 11월 농민군과 일본 · 조선 연합군 사이에 피어린 ‘구미란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현재 구미란 지역 야산에는 무며 농민군의 무덤으로 확인된 봉분이 수십여 기 널려 있지만 말 하나 없이 방치되어 있다. 완산군 삼례 지역도 마찬가지. 1892년 동학교도의 교조신원운동이 벌어진 현장이며 1894년 9월 일본 침략에 대항해 농민군이 재봉기한 삼례 지역에는 겨우 민간단체가 4천만원을 들여 조성한 기념비만 서 있을 뿐이다.

‘앉으면 죽산(竹山)이요, 서면 백산(白山)’으로 알려진 부안군 백산면 백산 성지는 채석장으로 활용되다가 사적지로 지정된 최근에 와서야 제대로 보존이 이루어지고 있다. 또 전봉준 장군의 생가 터로 확인된 고창군 죽림리 당촌마을은 배추밭이었다가 고창군이 최근 땅을 사들여 푯말 하나만 달랑 세워놓았을 뿐이다.

때문에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와 유족회 등 관련 단체들은 황토재 유적지에만 집중하는 현재까지의 기념사업을 중단하고 관련 학자와 동학 관련 단체가 공동으로 참여하는 ‘기념과 건립 추진위원회’를 구성해 ‘백년, 천년을 내다보는’ 기념관을 건립하자고 주장한다. 추진위원회에서 기념관에 들어갈 유물과 자료 수집을 논의하고, 정읍 고창 전주 부안 순천 공주 상주 등 전라도와 경상도 · 충청도 · 경기도 등 전국에 흩어져 있는 유적지를 보존하는 방안도 결정하자는 것이다.

박찬승 교수(목포대 · 사학)는 "동학농민혁명은 전국 농민 봉기이므로 전라도 이외 지역의 봉기도 자세히 설명하고, 해당 지역 연구자를 자문위원에 포함해야 한다. 기념관을 건립할 경우 반드시 연구소를 설립해 지속적인 연구 활동이 진행되도록 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전라북도는 현재 관련 단체들의 이런 의견을 무시한 채 정읍 황토재에 기념관 건립을 서두르고 있다. 이제라도 관련 단체와 연구학자의 의견을 수렴할 기구를 구성해 혈세 4백억원이 낭비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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