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세탁 천국’ 미국 검은 돈의 지옥 된다
  • 워싱턴 변창섭 편집위원 ()
  • 승인 1999.12.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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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세탁 규제 법안’ 마련 … 외국 ‘부패 자금’ 관리 은행에 철퇴

97년 미국 금융 당국은 부유한 고객의 비밀 계좌를 관리해 온 시티은행 사 금융(프라이빗 뱅크)에 오마르 봉고 가봉 대통령 명의 비밀 계좌에 들어 있던 5천만 달러의 출처를 대라고 요구했다. 당시 시티은행은 ‘봉고 대통령의 위치와 가보에 진출한 프랑스 석유 회사들이 제공한 기부액’을 감안할 때 이 돈은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해명했다.

그런데 최근 시티은행은 이 돈의 출처가 ‘불분명하며 검증이 불가능하다’는 쪽으로 결론을 짓고, 봉고 대통령의 계좌를 폐쇄했다. 근래 출처 불명인 외국계 ‘검은 돈’이 시티은행을 포함한 일부 미국 은행에서 대대적으로 ‘세탁’되고 있다는 혐의를 잡은 연방 의회가 이를 추궁하자 시티은행이 두 손을 든 것이다.

돈세탁 규제 법안, 외국인 처벌 길 터
시티은행은 출처가 확실치 않은 외국계 검은돈과 관련한 돈세탁 사건에 연루되어 존 리드 회장이 상원 청문회에 불려나가는 등 곤욕을 치렀다. 특히 시티은행 자회사인 시티은행 사금융사가 카를로스 살리나스 전 멕시코 대통령의 친동생 라울 살리나스가 소유한 거액 불법 자금을 몰래 세탁한 사실이 드러나자 클린턴 정부가 검은돈이 미국에 유입되는 것을 원천적을 방지하기 위한 법안을 마련했다.

연방 재무부와 법무부가 공동으로 마련해 의회에 제출한 가칭 ‘돈세탁 규제법’의 골자는 한마디로 미국 은행이 외국 관리의 부정한 돈을 예치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스튜어트 아이젠스타트 재무 차관은 “이 법안이 부정한 방법으로 미국에 돈을 예치하려는 외국 관리를 기소할 법적 근거를 마련해 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외국 관리들이 지금까지는 마음 놓고 미국 은행을 통해 돈세탁을 할 수 있었지만, 새 법이 제정되면 이런 불법은 용납될 수 없다고 말했다. 이번에 마련된 돈세탁 규제법안은 해당 미국 금융기관이 예금 계좌 소유주에 관해 정확한 기록을 확보하지 않는 한 외국계 예금을 일절 받을 수 없도록 하고 있다.

86년 미국 정부는 마약 · 유괴 · 도박 · 세금 포탈 · 조직범죄 · 밀수 등 불법 행위와 관련된 돈세탁을 처벌할 수 있도록 했지만, 처벌 대상은 미국인에 국한했다. 그러다 최근 러시아 마피아 조직 소유로 보이는 검은돈이 미국 뉴욕 은행에서 대대적으로 세탁된 사실이 드러나자 정부는 돈세탁에 관한 정의를 대폭 확대했다(62쪽 상자 기사 참조).  때문에 새 법안은 사기와 뇌물, 공적 자금 횡령, 무기 거래, 심지어 폭력 범죄와 관련한 외국계 자금까지 사법 당국이 단속할 대상으로 정했다.

은행들, 독재자 · 부정 부패 권력자 돈 관리
돈세탁 규제 법안이 탄생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최근 시티은행을 비롯한 6개 미국 은행이 아시아 · 아프리카 · 중남미 권력자들의 비밀 개인 계좌를 관리해 온 사실이 적발된 데 있다. 특히 이번에 문제가 된 시티 은행 사금융의 멕시코 지점은 라울 살리나스가 내놓은 수천만 달러를 아무런 의심 없이 예치했다가 큰 곤욕을 치르고 있다. 현재 멕시코 교도소에서 살인죄로 복역하고 있는 살리나스의 불법 자금을 예치해 돈세탁까지 해주었다가 들통이 났기 때문이다. 시티은행은 살리나스 사건이 터지자 내부 규칙을 강화해 공직에서 은퇴한 고객에 대해서는 은행 중역들이 면밀하게 심사하도록 했다.

시티은행이 부유층 고객의 자금을 주로 관리하는 사 금융업에 뛰어든 것은 70년대 들어서다. 사금융의 가장 큰 특징은 고객 거개가 부유층이어서 짭짤한 재미를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시티은행은 사 금융업을 개시하면서 스위스은행들이 확보한 거물 가운데 일부를 확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티은행 사 금융사가 라울 살리나스를 고객으로 확보한 시점은 92년. 시티은행 사 금융사는 살리나스가 이 은행 멕시코 지점에 예치한 수천만 달러를 해외로 빼돌리는 일을 도와주었다. 다른 은행은 살리나스와의 거래를 피했지만 당시 멕시코에 진출한 유일한 미국 은행인 시티는 군말 없이 그에게 비밀 계좌를 터주었다. 미국 연방 정부 회계감사국(GAO) 보고서에 따르면, 시티은행은 살리나스를 고객으로 받아들이기에 앞서 그에 대해 조사를 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시티은행 사 금융사의 돈세탁 사건이 여론으로부터 관심을 모으게 된 시점은 지난 7월 중순. 당시 <뉴욕 타임스>를 비롯한 주요 언론은, 공화당 댄 버튼 하원의원과 민주당 칼 레빈 상원의원이 각각 주도하는 의회 조사팀이 시티은행과 일부 다른 금융기관이 외국 관리들과 그 친척의 비밀계좌를 어떻게 관리하고 있는지 대대적으로 조사를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버튼 의원은 96년 미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중국계 미국인 조니 정이라는 사람이 민주당 선거본부에 기부한 30만 달러가 시티은행 홍콩지점에서 입금된 사실을 추적하며 ‘차이나 커넥션’ 캐내기에 열중했다.  또 레빈 의원ㅇㄴ 시티 은행을 포함해 6개 정도의 은행이 ‘매우 민감한’ 외국계 계좌를 관리한다는 혐의를 잡고 이를 조사할 작정이었다. 특히 그는 시티은행이 아시아 · 아프리카 · 중앙아메리카에 사는 권력자의 비밀계좌를 관리하고 있다는 혐의에 대해서도 조사하려 했다.

연방 의호가 꼼꼼히 조사하는 과정에서 처음 걸려든 것이 바로 라울 살리나스 계좌이다. 구린 돈을 맡긴 인물은 살리나스뿐이 아니다. 부정부패 혐의로 옥살이를 하는 베나지르 부토 전 파키스탄 총리의 남편인 아시프 알리 자다리 이르도 튀어 나왔다. 의회 조사 결과 시티은행 제네바 지점은 자다리르 위해 수천만 달러를 관리해 준 것으로 드러났다. 비리 명단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오마르 봉고 가봉 대통령은 물론 나이지리아의 전 군사 독재자 사니 아바차 장군, 베네수엘라의 전 대통령 자이메 루신치와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전 대통령의 두 딸도 이 은행에 비밀계좌를 갖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해마다 검은돈 5천억 달러 세탁
사태가 심각해지자 칼 레빈 의원은 마침내 지난 11월 9일 상원 청문회를 열고 이 문제를 따졌다. 증언자들은 미국 은행의 사 금융업이 중남미와 아프리카의 저개발국 출신 부유한 고객들 돈을 관리하다 보니 특히 문제가 많다고 지적했다. 돈세탁 혐의로 유죄가 확정된 안토니오 지랄디는 사 금융업자들이 케이먼 제도처럼 세금이 거의 없는 안전한 곳에 위장 회사를 차려놓고 고객들의 계좌를 관리하고 있다고 말해 충격을 주기도 했다.

청문회에는 존 리드 시티 그룹 공동회장도 불려나왔다. 그는 시티은행이 일부 부유층 고객의 계좌에 대한 감독을 소홀히 해 왔다고 솔직히 시인한 뒤, 97년 이래 내부 규정을 강화해 돈세탁이 더 이루어지지 않도록 만반의 조처를 취했다고 증언했다. 또 청문회에 나온 연방제도이사회 리처드 스몰 금융감독국장은 외국에 있는 미국 은행의 경우 부정한 고객의 계좌를 들여다볼 법적 장치가 미흡하다고 지적했다.

이번 사건과 관련해 상원 돈세탁조사위원회 수전 콜린스 위원장은 “시티은행의 조직적인 결함 때문에 돈세탁 위험에 크게 노출되어 있다”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상원 돈세탁조사소위원회에 따르면, 은행을 모 기업으로 한 사 금융 회사들이 굴리는 자산은 1조5천억 달러에 이른다고 한다. 특히 시티뱅크 사금융의 경우 알짜 고객을 4만 명이나 관리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 3백50명이 관리들과 그 가족이라는 것이다.

94년 시티은행의 한 간부는 이회의 한 청문회에 나와 사 금융이 혼란에 휩싸인 나라 출신이나, 돈을 숨길 곳을 찾고자 하는 부유한 고객을 위한 환경을 만들어주는 사업이라고 정의한 적이 있다. 말하자면 사 금융이 무엇보다 저개발국 권력자들의 ‘사금고’ 노릇을 해왔음을 넌지시 지적한 것이다. 심지어 일부 대형 은행은 예칙ㅁ이 백만 달러가 넘는 고객의 경우 비밀 보장을 위해 역외 계좌, 감여 계좌, 심지어 위장 회사 계좌 등을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세계적인 돈세탁 장소는 태평양의 나우르 · 바누아트 · 케이먼 군도 등이며, 이렇게 세탁되는 검은돈의 규모가 해마다 5천억 달러에 이른다고 한다.

그러나 미국 정부가 돈세탁 규제법안을 제출함으로써 미국 은행들을 단골 돈세탁 장소로 이용해 온 고객들에게 좋은 시절은 끝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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