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주 ‘시비’ 세우자는데 웬 시비?
  • 나권일 기자 ()
  • 승인 1999.12.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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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 “중외공원 안에 세우기 곤란하다” … 작가회의, 획일적 행정·문화 정책 질타

 광주 중외공원은 70만평 넒은 면적에 비엔날레 전시관과 미술관·민속박물관을 갖추고 있어, 국내에서 보기 드문 문화 벨트 지역으로 꼽힌다. 특히 중외공원 내 비엔날레 지구 10만여 평은 운정동 5·18 민중항쟁 묘지와 함께 광주를 방문하는 이들이 자주 찾는 명소이다.

 ‘광주·전남 민족문학 작가회의’(작가회의·회장 김준태)는 올해 고 김남주 시인을 기념하기 위해 중외공원 안에 시비(詩碑)를 건립할 계획을 세웠다. 시인 김남주는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조국은 하나다> 같은 작품을 남긴 저항 시인으로,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른 뒤 94년 2월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난 시인이다.

 시비 건립 기본 계획은 비엔날레 전시관 입구 언덕에 30평규모 동산을 조성해, 중앙에 시인을 상징하는 ‘청송녹죽’ 글씨를 새긴 2m 짜리 자연석을 세우고, 그 옆에 1.5m 규모 석재 조형물 5개를 배치한다는 것이었다. 또 시비 곁에는 김남주 시인의 흉상을 세우고, 주변에 야생화와 소나무를 심어 문화공간으로 손색없는 소공원을 조성키로 했다.

“5·18 상징 중외공원에 세우는 것 당연”
 작가회의는 이에 따라 지난 1월 ‘민족시인 고 김남주 시비건립위원회’를 결성했다. 그 뒤 작품 제작을 맡은 화가 홍성담씨가 대표로 건립 계획을 발표하고, 3월부터 전국 문학인을 대상으로 모금 운동을 벌여 기금을 확보했다.

 그런데 시비 건립문제가 광주시의 늑장 행정으로 차질을 빚기 시작했다. 지난 4월 중외공원으로 장소를 선정해 시비 건립 공문을 광주시에 접수시켰지만, 정작 건립 여부를 결정할 ‘광주 도시공원 심의위원회’(위원장 송광운 광주시 환경녹지국장)는 7개원이 지난 11월8일에야 열였다. 게다가 심의위원회는 “원칙적으로는 찬성하나 다른 시비가 공원 내에 난립할 우려가 있으니 광주시가 별도로 시비 동산을 조성하는 방안을 수립한 뒤에 재심의하겠다”며 허가 유보 결정을 내렸다. 광주시는 또 시비 건립 문제를 결정하면서도 조경·건축·디자인·환경 관련 교수와 전문가로 구성된 도시공원 심의위원회의 의견만을 들었다.

 시비 건립 유보 결정을 접한 작가회의는 광주시의 획일적인 행정 처리와 문화 의식 부재를 질타하며 즉각 반박에 나섰다. 작가회의는 “매년 3만명에 이르는 5·18 묘지 참배객이 꼭 찾는 김남주 시인 묘지를 중외공원의 시비와 연계하면 문화와 관광 두가지를 만족시키는 답사 코스가 될 수 있는데도, 광주시가 문화 자원을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라고 비판했다.

 시비건립위원회 실행위원장인 김준태 시인은 “중외공원은 정부가 국민 성금으로 마련한 5·18 기금으로 조성되었다. 5·18 항쟁 정신을 가장 잘 형상화한 김남주 시인의 시비 건립을 행정 편의주의 잣대로 가로막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라며 광주시의 각성을 촉구했다.

광주시, 여론에 밀려 ‘유보 결정’ 재검토
 현재 광주시 공원 지역에 건립되어 있는 시비는 모두 15기. 광주시의 사고 방식에 따른다면 하나같이 도시공원 심의위원회를 거치지 않고 세운 불법 건축물이다. 더구나 광주시 문화예술과는 ‘시화비 5개년 10기 설치 계획’에 따라 97년부터 올해까지 중외공원을 포함한 근린 공원에 시화비 4기를 설치하면서 도시공원심의위원회 심의라는 행정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 광주시 스스로 법을 어겨놓고 유독 작가회의가 주도한 김남주 시인의 시비 건립에는 행정의 잣대를 들이댄 것이다.

 이에 대해 광주시 관계자는 “다른 문인의 시비는 1~2평 규모 자투리 공간으로도 충분하지만, 김남주 시인의 시비는 30여평이 넘는 공간을 차지할 정도로 규모가 커 심의가 필요했다”라고 해명했다.

 결국 광주시 행정을 규탄하는 기자회견과 김남주 시비 제막 촉구 문학인대회 개최까지 검토되던 이번 사태는 광주시가 여론을 받아들여 시비 건립 유보 결정을 재검토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소강 상태로 접어들었다.

 전국의 문학인과 민주화운동 인사의 성금으로 연내에 세우려던 김남주 시인의 시비가 시인의 6주기 추모제가 열릴 내년 2월까지 건립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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