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 이성남 문화부차장대우 ()
  • 승인 1991.01.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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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트리오 교육수기 펴낸 어머니 李元淑씨

음악가족 명화 경화 명훈의 영광 뒤에는 어머니 李元淑 여사의 큰 가르침이 있었다. 최근 김영사에서 출간된 이여사의 교육수기 <너의 꿈을 펼쳐라>에는 정트리오를 위시한 일곱 자녀를 키워온 ‘육성’이 생생히 수록되어 있다.

 “생후 6개월된 아이를 물속에 집어넣고 수영을 가르치려든다 해도 나는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수영선수가 되리라는 보장은 없겠지만, 적어도 물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으로는 자랄 것이기 때문이다.” 조기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여사는 같은 이치로 “1백명의 아이에게 바이얼린을 가르쳐서 그중 단 1명의 연주자가 나온다고 해도 아이들의 정서 함양을 위해 음악교육은 필요하다”고 말한다. 단 “무엇이 아이의 재능인가를 찾아주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그 자신은 정트리오가 어릴 때 연습을 강요하지 않았으며 12살이 될 때까지 하루 평균 1시간 이상 연습시키지 않았다. 오늘날처럼 ‘입학’을 위한 수단으로 교육시키지 않은 것이다.

 그가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은 해방 직후, 온 나라가 헐벗고 굶주렸던 시절, 독립투사였던 부친 이기순의 가르침으로 ‘나라사람’에 대한 생각을 갖게 되면서부터였다. 1?4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을 가면서도 피아노를 싣고 갈 만큼 음악교육에 대한 열정은 유별났다. 일곱 아이가 한창 자라고 있는 가정살림은 풍족할 리가 없었다. 특히 세아이의 음악수업을 위해 도미한 뒤, 그곳에서 ‘코리아하우스’라는 음식점을 경영할 때의 일화는 눈물겹다. 음악을 전공하던 아이들도 방학 때면 팔 걷어붙이고 음식만들기 설거지 음식나르기 등 식당일을 도왔다. 그 시절, 명훈은 피아노를 경화는 바이얼린을, 명화는 첼로를 구입해야 했는데 그때마다 이여사는 악기상을 찾아가 월부로 악기를 구입하게 해달라고 사정했다. 73년에 빚을 안고 25만달러짜리 바이얼린을 산 25세의 경화는 그 돈을 스스로 벌어 갚았다. “한푼이라도 아끼려고, 연주여행을 다닐 때도 매니저들이 잡아놓은 일류호텔을 마다하고 싸구려 삼류호텔을 전전했다”고 이여사는 회상한다.

 일곱 자식을 잘 키워놓은 비결을 물으면 그는 “말 잘 듣고 형제간의 우애가 돈독한 자식”들에게 그 공을 돌린다. 그러나 “음악을 아무리 잘하면 무엇하겠는가. 교만한 마음은 교만한 음악을 낳고, 교만한 음악은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는 한계에 다다른다”는 이여사의 지침이 없었다면 오늘의 정트리오도 없었을는지 모른다.

 일곱 자녀가 장성하여 출가한 뒤 그는 조국의 젊은 연주가를 도울 수 있는 길을 찾아 지난해 ‘세화 음악재단’을 건립하였다. 남은 여생을 음악재단 일을 보면서 한국에서 3분의 1을 지내고, 나머지 3분의 1씩은 일곱 자녀가 살고 있는 미국과 유럽에서 각각 살게 될 것이라고 한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이여사는 당당하다. 자신의 세계를 가진 이만이 보여주는 태도이다. “인간의 욕망에 한계가 없을진대 어찌 인간의 의지에 한계가 있을 것인가. 어려운 일은 다만 어려운 일일 뿐,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믿음과 신념을 가지고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만이 사람의 할 일이다. 이루고, 이루지 않고는 하늘이 결정한다.” 그의 수기 중 한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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