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밀 북한 수출’ 사건 실거래자는 한국 재벌기업
  • 남유철 기자 ()
  • 승인 2006.05.10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닛코社는 브로커 노릇만… “머피 회장이 면허장으로 유인”



지난 92년 4월 주미 한국대사관은 미국이 91년 두차례에 걸쳐 북한에 밀을 15만t 수출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워싱턴에서 열린 한 학술 세미나에서 북한 관리가 우연히 발설한 내용을 미국 상무부에 문의해 직접 확인한 것이다. 미국과 북한 간의 ‘비밀교역??은 당시 한국 정부에는 ??충격??으로, 한국 언론에는 ??경악??으로 받아들여졌다. 당시 미 국무부는 인도적 차원에서 허용한 거래일 뿐 미국의 대북한 외교정책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고 강조했다. 한국 정부도 유감의 뜻을 전하는 차원에서 일을 매듭지었다.

그러나 당시 거래를 추진한 미국 수출업체의 정체와 거래 방식은 밝혀지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의문으로 남아 있었다. 미국 상무부는 북한에 밀을 수출한 회사를 ‘뉴저지에 있는 한 수출 업체??라고만 밝혔을 뿐이다.

거래규모에 미 국무부도 놀라

《시사저널》이 최근 국내외 소식통들을 통해 확인한 바에 따르면 이 ‘뉴저지 소재 수출 업체??는 미국의 대공산권 무역 전문 로비회사인 닛코사인 것으로 드러났다(올해 초 일본 <산케이신문>은 닛코의 대니얼 머피 회장이 남북 정상회담을 비밀리에 추진하고 있다고 보도한 바 있다).

이 문제에 정통한 한 미국 외교 소식통은 당시 “닛코는 중간거래상 노릇만 했다. 실질적으로 닛코에게 대금 지급을 약속하고, 북한과의 거래를 부탁했던 진짜 주문자는 한국의 한 재벌 그룹이었다??라고 《시사저널》과의 최근 인터뷰에서 밝혔다. 이름 밝히기를 거부한 이 소식통은 ??닛코는 브로커이다. 머피 회장은 당시 12억달러어치의 밀을 북한에 수출할 수 있는 자신의 면허장을 가지고 북한과의 거래선을 트려는 한국 재벌 기업을 유인했다??라고 말했다. 이 소식통은, 한국 기업과 닛코사와의 거래는 모두 뉴욕에서 진행됐으며, 한국 정부는 당시 이러한 진전 상황을 전혀 몰랐다고 전하면서 ??당시 미국무부도 뒤늦게 이 사실을 알았다. 거래 규모가 너무 크다는 사실에 국무부도 상무부에 항의했었다??라고 밝혔다.

북한을 적성국으로 분류하고 있는 미국은 북한과 어떠한 형태의 무역 거래도 금지하고 있다. 닛코사에게만 유일하게 2년시효 거래 면허장이 발부된 것은 해군 제독 출신인 머피 회장이 개인적인 ‘정치적 영항력??을 발휘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머피 회장은 제6함대 사령관을 거쳐 77~81년 국방부 요직을 맡았으며, 특히 지난 81년과 85년 당시 조지 부시 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냈다. 머피 회장은 은퇴후 뉴욕에 데머리 앤드 머피(Demory & Murphy)라는 로비(법률) 회사를 차렸고, 미 상무부의 북한 수출 면허장은 최초 이 회사에 발부되었다고 소식통은 밝혔다. 그러나 머피 회장은 이 면허를 다시 자신이 설립한 또 다른 이름의 회사인 머피 앤드 어소시에트(Murphy & Associates)로 이적시켜 사용했다.

머피 회장은 지난 86년 일본사업자들과 함께 닛코라는 일본식 이름의 회사를 차려 북한 쿠바 라오스 같은 공산권 국가들과의 무역을 중개·알선해 왔다. 미국 외교소식통은 “머피 회장에게 발부된 대북한 수출 면허장은 91년과 92년 두 해에만 국한된다. 따라서 그가 북한을 상대로 거래할 수 있는 면허는 이미 효력이 상실했다??고 밝혔다.

머피 회장은 지난해 말에 ‘자전거 10만대를 북한에 수출하고 싶다??는 명목으로 또다시 2년 시한의 면허장 발급을 요청했으나, 일단 거부되면서 검토시한이 연기됐었다고 소식통은 밝혔다. 그러나 지난 2월24일 머피 회장은 스스로 이 발급 신청을 철회했다고 한다. 이는 공화당의 인맥을 바탕으로 활동해온 그의 로비력이 클린턴 민주당 정부 아래에서는 통하지 않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된다.

국내 외교가의 한 소식통은 머피 회장이 부시 부통령의 비서실장이던 시절, 최근 이임한 도널드 그레그 주한 미국대사가 머피 회장 밑에서 일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그의 화려한 정치적 배경이 여러 인사들로 하여금 그가 미국 최고위층의 대북한 밀사가 아니겠느냐는 생각을 갖도록 한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국내 기업이 북한사업 관계자들에 따르면, 남북 경협이 본격화하기 이전에는 닛코사를 통해 거래를 한 국내 기업들이 몇개 있으나, 최근에 들어서 그 기업들은 모두 닛코사와 관계를 끊었다고 한다. 한 관계자는 “우리가 직접 거래를 할 수 있는데 굳이 닛코를 쓸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남북정상회담 주선??소문도

미국의 한 외교 소식통은 “개인적으로 머피 회장이 한국 기업과 정부 인사들에게 미국 최고위층의 밀사인 것 같은 인상을 준 것을 유감으로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최근 머피 회장이 남북회담을 추진하고 있다는 일본 신문의 보도에 대해 ??브로커로서 흘리고 다니는 말에 불과하다??고 일축했다. 그러나 작년 4월 북한을 방문했던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부시 대통령의 밀사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라고 밝혔다.

최근 도쿄에서 기자와 만난 한 일본 소식통에 따르면 머피 회장이 남북 정상회담을 주서하고 다닌다는 소문은 도쿄에서는 꽤 오래 나돌았다고 한다. 그러나 국내 외교가에서는 작년 머피 회장이 서울에 들렀을 때 ‘멋 모르고??국가안전기획부장이 그를 만나준 것이 그같은 소문을 신빙성 있게 만든 구실이 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