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脈줄 타고 단숨에 정상까지
  • 한종호 기자 ()
  • 승인 2006.05.10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중국 국가주석 된 강택민, 기술관료 출신 팔방미인 ‘신세대 지도자’


 

 "제가 당총서기를 맡기에는 국민학생 수준, 군사위 주석직을 맡기에는 아직 유아원 수준밖에 안됩니다. 저는 등소평 동지에게 몇 년만 늦춰달라고 건의했지만 등소평 동지의 간곡한 부탁으로 하는 수 없이 증책을 떠맡게 됐습니다. “ 지난 80년 11월 중국 공산당 13기 중앙위원회 제5차 전원회의에서 江澤民(67)은 등소평으로부터 당군사위 주석직을 승계받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5개월 전 상해시장에서 신임 당총서기로 혜성처럼 나타나 전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던 그가 軍權까지 장악함으로써 다시 한번 세상을 놀라게 했던 것이다.

 지난 3월15일 중국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전국인민대표(전인대)에서는 ‘등소평 이후’를 대비해 최고지도부를 개편했다. 퇴임하는 양상곤에 이어 국가주석 자리는 강택민 당총서기가 겸임하게 됐다. 이로써 강택민은 모택동에 이어 두 번째로 黨·軍·政 3권을 장악한 최고 지도자가 됐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듣고 놀라는 사람은 없었다. 이제 강택민의 지도력을 의심하는 사람은 89년 11월에 강택민의 장래를 확신했던 사람 만큼이나 드물었다.

 

중앙위원 7년만에 당총서기로

 강택민은 26년 7월 중국 강소성의 호반도시 양주 근교의 한 조그만 마을에서 덕망있는 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6촌 숙부인 江上淸(상자 기사 참조)의 양자로 들어가 공자와 맹자를 읽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49년 상해 제1식품공장 엔지니어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그는 54년에는 국무원으로 자리를 옮겨 관료로 변신했다. 문화혁명의 와중에 그가 走資派로 몰려 제1기계공업부 산하의 한 사업장으로 下放된 67~70년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게 없다.

 79년 12월 강택민은 개혁·개방 바람이 거세게 부는 가운데 북경으로 진출하여 일개 기술관료에서 국가 행정가로 또 한번 변신했다. 82년 9월에는 중앙위원에 당선됨으로써 중앙당으로까지 활동 영역을 넓혔다.


 85년 중국 최대의 공업도시 상해의 시장으로 발탁되면서 강택민은 북경의 최고 지도자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특히 그가 89년 4월 북경에서 벌어진 학생 시위를 지지하는 기사를 실었다는 이유로 상해의 유력지 <세계경제도보> 주필을 전격 해임한 조처는, 사태 수습에 골몰하고 있던 최고 지도층의 신임을 얻은 결정적 계기였다. 그 해 6월 ‘무명’의 강택민은 당총서기 및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전격 선출됐다.

 강택민의 경력을 살펴보면 무엇보다 초고속 승진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가 82년 중앙위원에 선출된 뒤 당총서기가 되기까지는 6년9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같은 초고속 승진의 이면에는 그의 독특한 인맥이 있다.

 강택민의 인맥은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자신의 양부 강상청을 통한 인연이다. ‘혁명열사 유자녀’로서 강택민은 원로들의 눈에 根正苗紅(뿌리가 바르니 잎도 제 색이다)으로 비쳤던 것이다. 다른 하나는 대학 시절 가입한 공산주의 청년단(共靑團) 인맥이다. 공청단은 중국에 개혁·개방 바람이 불면서 권력층 내에 막강한 인맥을 형성했다. 국무원 부총리 오학겸, 정치국 상무위원 교석 등이 당시 지하당 간부직을 맡았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의 성장 과정에서 제일 중요하게 작용한 것은 두말할 것 없이 등소푱의 각별한 신임이다. 등소평은 87년 5월31일과 6월16일 두차례에 걸쳐 이붕 요의림 등을 초청한 자리에서 “이제 3세대 지도층에도 핵심이 있어야 합니다. 모두가 하나의 핵심을 받들어야 합니다. 그가 바로 강택민입니다”라고 말해 강택민으로 세대교체를 할 의사를 분명히 했다. 그는 지금도 막후에서 강택민을 보호하는 바람막이 역할을 하고 있다. 혹자는 강택민이 큰 파란 없이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기술관료로서 무색무취한 태도를 보여왔기 때문이라고 평가한다. 그는 특별한 자기 주장 없이 파벌을 만들지도 않고 묵묵히 원로들의 뜻에만 따라왔기 때문에 적도 없었다.

 

唐詩나 민간속담도 술술 암송

 劉亞洲 중국작가협회 이사는 ‘강택민-중국의 현명한 선택’이라는 글에서 “강택민이 전기동력학의 전문가이며 영어 일어 러시아어 프랑스어 루마니아어 5개국어에 능통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가 문학 예술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악기를 잘 다루고 경극에 관심이 있을 뿐 아니라 독특한 테너 목청을 지니고 있고, 唐詩 宋詞 및 민간속담을 술술 암송하며, 탁구 배드민턴 농구에도 능한 팔방미인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잘 모른다”고 소개했다.

 강택민은 경제 문제에는 대외개방적이지만 정치에는 원칙적 사회주의를 고수한다. 그래서 그를 좌편향의 보수강경파로 분류하는 사람도 있다. 기술관료 출신이어서인지 대단히 활동적이고 현장지향적이다.

 등소평이 자신의 후계자감으로 호요방 조자양에 이어 세 번째로 선택한 강택민은 이제 모택동 등소평 다음으로 중국을 이끌어 갈 제3세대 지도자로서 확고한 입지를 굳혀가고 있다. 그의 경력이 말해주듯 강택민은 이붕 총리와 마찬가지로 기술과료를 거쳐 정치인으로 성장한 인물이다. ‘江-李체제‘가 등장한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중국의 지도자가 ’경험형‘에서 ’지식형‘으로, 혁명가에서 관리자로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강택민은 새로운 시대를 향해 달려가는 중국을 이끌어 갈 새로운 유형의 지도자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