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민주계 정권’ 기반 다졌다
  • 이흥환 기자 ()
  • 승인 2006.05.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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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경험’의 충격은 좀체 가시지 않는다.현직 대통령과 장.차관,정치인의 재산 공개는 한국 정치사상 최초의 일이다.우리에겐 전혀 그런 경험이 없다.그에 따른 충격도 물론 처음이다.여권 권력구조 재편을 거론할 만하다.

 전직 국회의장은 정계를 은퇴했고 현직 국회의장은 의장 자리를 내 놓은 데 이어 의원직 사퇴 압력을 받고 민자당을 탈당했다.‘별’대신 ‘금배지’를ㄹ 달았던 국회 국방위원장과 또 한 명의 의원은 금배지를 떼내었다.행정부에서는 성역시되어온 검찰을 포함해 차관급 공직자 7-8명의 사퇴가 예상된다.입법부 수장이었던 전.현직 두 국회의장은 민자당을 떠나면서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두 원로 정치인의 정치적 선택은 김영삼 대통령에 대한 ‘반발’로 비쳐지지만 현재로선 역부족이다.

 민자당 의원들이 재산을 공개한 지난 3월22일 저녁 민자당의 한 당무위원은 “결국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라고 말했다.그날 밤부터 상자 안에 들어 있던 ‘재앙’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언론은 뚜껑 열린 상자 안의 오물을 하나둘씩 끄집어내면서 전국 곳곳에 퍼져 있는 선량들의 재산을 들추어냈다.김영삼 대통령이 임명한 일부 새 각료의 ‘과거사’를 집중 보도해 새 정부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던 한 언론사는 재산 공개 직후에 ‘문제시 될 만한’ 특정 국회의원의 명단과 재산 내역을 별도로 확보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정가에 나둘기도 했다.

‘박준규 의장 등 반발’ 탈당... 사법처리 관심

 김영삼 정부의 무혈 혁명이라고 일컬어지는 ‘3월의 변란’은 입법부의 한 nr을 형성한 민자당 민정계 진영을 쑥밭으로 만들었고,행정부 차관급 인사 1백25명의 재산도 공개함으로써 새 정부의 정권 기반을 확고히하는데 한몫을 톡톡히 해냈다. 입법.행정부뿐만 아니라 사법부 고위급 인사에게까지 재산 공개의 불뚱이 튀는가 싶더니 급기야는 전직 대통령의 재산도 공개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으나, 일단 주춤해진 상태다. 이 모두가 겨우 열흘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이번에 재산을 공개한 차관급 이상 고위직 신임 행정 관료들은 김대통령이 임명했다. 이미 새 정부에서 한차례 통과의례를 거친 사람들이고 김영삼 정부의 개혁 조처를 추진할 실무진이다. 도덕적으로 문제될 만한 인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개혁 주체인 청와대로서는 이들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는 것을 원치 않은다. 정치군에 비한다면 행정 관료들은 태풍의 눈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있는 셈이다.

 야당인 민주당도 태풍권 진입했다. 민주당은 이기택 대표 체제가 들어서긴 했으나 아직은 약체다. 자칫 재산 공개 여파가 당 내분으로 비화할 가능성이 있다.

 정치권의 재산 공개는 예견되었던 일이다. 김대통령과 민주계가 사전에 작성한 시나리오에 의해 이번 일이 이루어졌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정치권 정화, 더 정확히 표현한다면 ‘민정계 숨총 죄기’라는 의도로 사전 계획이 서 있긴 했지만, 막상 재산 공개 이후 걷잡을 수 없이 격화된 여론에 떠밀려 사태 추이에 대응해 나간 우발적인 면도 없지 않다. 여론의 질타가 거세지자 문제가 된 의원에 대해 사퇴를 종용하고 징계 대상 의원의 수와 윤곽을 흘리며 여론을 주시하는 등 서둘러 사태를 마무리하려는 흔적이 역력했다. 자칫 통제하기 힘든 상태로 사태가 발전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내친 김에 ‘물갈이’까지 하기에는 워낙 미묘하고 민감한 사안이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재산 공개라는 김대통령의 정치적 결단은 출발점에서부터 이미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던 셈이여, 김대통령 자신이 누구보다도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정치판 자체를 송두리째 뒤엎으로 했던 것은 아니다. 한때 재산 공개 파문이 끝간데 없이 확산될 기미를 보이면서 관심을 집중시켰던 것은 금진호.이원조 두 의원에게까지 불똥이 튈 것이냐 하는 점이었다. 금융계의 황제, 5.6공 정치자금의 최대 파이프라인 등으로 불렸고, 지난 대선에서도 김대통령 당선에 ‘공헌’한 것으로 알려진 두 의원이 과연 무풍지대에 그대로 남아 있을지가 최대 관심사였던 것이다.

 국회의원 및 고위 공직자의 재산을 공개하기로 한 것은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정치적인 결정이다. 현행 공직자윤리법은 모든 공직자의 재산을 등록하도록 명시해 놓았고, 등록한 재산은 일반에게 공개할 수 없도록 해놓았다. 재산 공개의 총지휘부인 청와대가 ‘자진 공개’라는 형식을 휘한 것도 이 때문이다. 정치적 판단과 결정에는 뚜렷한 목적과 의도가 있다. 김영삼 대통령은 구린내가 나리라고 예상했으면서도 건국 이래 정치권 최대의 치부인 ‘돈’ 문제를 들추어냈다.

 ‘판도라의 상장’라는 표현을 쓴 당무위원은 김대통령의 측근 인다삳. 뚜껑을 열면 그 결과를 누구도 예측하기 힘들다는 뜻이 이 당무위원의 말 속에 들어 있엇다. 아니나 다를까,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간 국회의원 재산 공개 파문을 마무리짓는 과정에서 청와대는 조급함을 내비쳤다. 재산 공개 나흘째이던 25일부터는 당에서 의원직 사퇴 의원의 수가 거론되기 시작함으로써 희생양 선택과 조기 진화라는 ‘정치적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민자당 국회의원과 당무위원 전원의 재산을 언론에 공개하기 하루 전인 21일(일요일) 밤 10시30분 민자당은 서둘러 기자들에게 재산 목록을 배포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민자당은 ‘과거를 들추자는 게 아니다.앞으로 잘 하자는 뜻이다’라는 입장이었다. 이튿날 여론 재판이 시작되었다. 도덕성 파문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입법부 수장인 박준규 국회의장이 첫 도마에 올랐다. 공화당 정권인 3공화국 이래 5.6공화국을 거치면서 광화당 당의장.민정당 대표.국회의장 등을 지낸 30년 간의 화려한 정치생활에 금이 가는 순간이었다. 박의장은 김영삼 대통령, 김대중 전 민주당 대표와 더불어 의회 정치의 쓴맛 단맛을 다 본 상징적인 정칭인이다.양김씨와 다른 점이 있다면 집권여당 출신이라는 것이다. 그린벨트를 훼손하면서 별장을 지은 짐재순 전 국회의장도 원로 정치인의 한 사람으로서 언론의 집중 포화를 맞았다.

‘트로이 목마론’과 ‘온고지신론’

 유학성 국회 국방위원장은 80년 새로운 권력층으로 급부상한 신군부 세력의 상징적인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도 도마에 올랐고 결국 의원직을 사퇴했다. 두 사람의 재산 총액은 상위급이 아니다. 박의장이 41억8천4백만원(18위)이고 유씨는 58억4백64만1천7백70원(14위)이다. 그런데도 유독 두 사람이 초반부터 언론의 집중 포화를 받은 것에 대해 해석이 분분하다. 그 가운데 한가지 시각은 옛 정치인의 대표적 인물인 민정계의 박의장과 역시 민정계이면서 신군부의 상징적 인물인 유씨가 정치적 도태의 과녁이었다는 것이다.

 이번 재산 공개 파문은 물론 새 정부가 추진하는 사회 개혁 작업의 일환이다. 누구도 그 점에 이의를 달지 않는다. 또 하나의 측면은 김영삼 새 정부가 정권 장악 제 2단계 전략으로 개혁 조처의 걸림돌이 되는 민정당 출신 옛 정치세력에 타격을 주었다는 시각이다.최  --   사무총장을 비롯한 민주계는 물론 이점을 부인하지만 민정계는 ‘어차피 올 것이 왔다’라는 반응이다.

 민자당 의원들의 출신 배경은 크게 셋으로 나뉜다. 80년 5공 출범과 더불어 태동한 신군부 출신 인사가 한 그룹을 이루고 있고,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5.6공 때 청와대.안기부 등 권력 핵심에서 활약하다가 정치권에 진입한 인사들이 또 한 그룹을 이룬다. 여기에 과거 김영삼 총재를 따르던 통일 민주당 출신 인사들이 새 정부 출범과 더불어 신흥 세력으로 등장했다. 강력한 통치기반이 필요한 김대통령으로서의 무엇보다 먼저 이질적인 구성 요소를 ‘통폐합’하거나 최소한 개혁 이미지에 걸맞지 않는 요소를 솎아낼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민자당에는 현재 상반된 두가지 논리가 공존한다. 하나는 ‘트로이 목마론’이라고 부르는 이른바 ‘통일민주당 정권론’이고, 다른 하나는 ‘온고지신론’이다. 당 사무처 요원의 대량 감축 등 개혁 칼날을 휘두르는 민주계는 이 두가지 논리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할 입장이다.우선 김대통령의 개혁 조처가 의도했던 대로 성공을 거두려면 민자당 정권으 구태의연한 이미지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야만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 김영삼의 야당 이미지를 재건해야 한다는 논리이다. ‘3당 합당의 과정을 말소시킨다, 민자당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탈색시킨다, 민자당은 수권의 수단이었을 뿐 지금은 타파 대상이다’라는 것이 민주계 강경론자들의 주장이다. 한마디로 새 정부는 민자당 정권이 아니라 옛 야당인 통일민주당 정권이라는 것이다.

 민정계가 신경을 곤두세우고 경계하는 것이 바로 이 점이다. 민정계 당무위원 ㅇ씨는 이에 대해 “민주계 내에 강경하가 있다. 여러 경로로 그 흔적을 탐지할 수 있다. 재산 공개도 같은 맥락이다. 민주계가 계속 독주할 경우 어느 정파도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수 있다”라고 말한다. 이 당무위원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정계 개편 가능성이다. 민정.공화계가 별도로 연합해 민자당 울타리를 벗어나는 것이다. ㅇ씨는 “당 안에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는 없지 않는가, 우리의 정치 현실에서 의회의 힘을 무시할 수는 없다”라고 말한다. 재산 공개 파문 여파가 가라앉은 후 사태가 어떻게 진전되느냐에 따라 민정.공화계 연합에 의한 산당 창당도 가능하다는 대응 논리다. 하지만 재산 공개에 따라 도덕적 .정치적으로 일대 타격을 받았고, 그 여파가 3년 후 15대 총선에까지 미칠 영향력을 감안한다면, 민정.공화계 연합에 따른 신당 가능성은 현재로선 희박하다. 오히려 김영삼 대통령을 비롯한 민주계와 ‘합의점’을 찾으리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민주계 시퍼런 칼날,최소한 1년 갈 것”

 재산 공개 파문이 가라앉더라도 민자당은 여전히 민정-민주계 간의 갈등을 불씨로 안고 있을 수 밖에 없다. 민주계가 서슬 시퍼런 칼날응ㄹ 단기간에 거두어들일 것 같지는 않다.민정계 인사들은 “최소한 1년은 갈 것”이라고 내다본다. 당 개혁을 위해서는 누군가가 악역을 맡아야 하고, 그 악역은 ‘친위대’가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민주계의 태도다.

 강경론의 맞은편에 있는 또 하나의 노리는 다분히 현실적이다. 계파가 서로 어우러져 상호 이해를 관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리라는,김종필 대표가 과거 자주 활용했던 이른바 ‘온고지신론’이다. 김대표의 현 정치 행보가 이를 대변한다. 그는 재산 공개로 의원들의 도덕성이 책잡히기 시작했을 때 “혁명을 하자는 것이냐”라고 언짢은 기색을 내비치기도 했다. 민자당 내에서 가장 곤혹스러운 입장이 바로 김대표이다. 그러나 김대표는 깍듯이 김대통령을 ‘모시고’ 있다. 김대통령도 “당은 김대표 중심으로”라고 말했다.

 개혁을 주창하는 김대통령에게 5.16과 과거 군사정권으 대명사로 인식된 김대표의 존재는 필요악이다. 김태표에게 당장 등을 돌릴 형편이 아니다. 김대표가 아닌 제3의 인물에게 당을 맡길 경우 그 인물은 차기 후계 구도와 관련해 급속하게 실세로 부상할 가능성이 높다. 제2인자를 원하지 않으며,일사불란한 추진력을 필요로 하는 김대통령으로서는 그런 사태를 원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김대통령과 김대표의 관계는 시한부라는 것이 당 안팎의 공통된 시각이다. 두사람의 공존은 당내 각 계파의 공존과 같은 성격을 지닌다. 현재는 서로의 이해 때문에 ‘공존’의 길을 가지만 15대 총선을 전후해 정치시절이 도래하면 계파간 이해관계 탓에 어떤 형식으로든 민자당은 잠재적인 갈등을 다시 표출할 수 밖에 없다. 민정계의 와신상담과 민주계가 손을 쥔 ‘채찍과 당근’이 당 내분을 한시적으로 잠재우고 있는 것이다.

 민자당은 이번 재산 공개 파동에서 들러리 노릇만 했다. 당 출입기자들 사이에서 “당에서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소리가 나돌 정도였다. 권해옥 의 원을 위원장으로 한 이른바 ‘재산공개진상파악특별위원회’는 단순히 서류정리 작업만 했을 뿐이다. 의원직 사퇴 의원의 범위.징계 예정자 등 모든 정보는 당이 아닌 청와대에서 흘러나왔다. 26일 당무회의에서 김종필 대표는 의원들에게 “심려를 끼쳐드려 송구스럽다”는 표현을 썼다. “국민의 의혹을 사지 않도록 철저히 대처하라”는 김대통령의 뜻과는 거리가 멀었다. 민정계의 한 당직자는 “김대표도 같이 당하는 입장”이라는 표현을 썼다.

 파격적인 군 인사에 이어 김대통령은 재산 공개라는 또 하나의 작품을 내놓았다. 재산 공개 파문이 이는 와중에도 김대통령은 정부 투자기관장 인사를 진행하고 청와대 안에 있는 골프장을 철거하라고 지시하는 등 의욕을 과시했다. 재산이 공개되고 여론이 들끓기 시작하던 23일에는 예정대로 청주공단에 내려가 청주직업훈련원을 방문하기도 했다. 연이어 터져나오는 김대통령의 윗물 정화작업이 어떤 결말을 가져올지는 아직 모른다.다분히 정치적인 결단에서 시작한 재산 공개가 역시 정치적인 마무리 수준을 밟고 있다. 국민은 옥석을 구분하기에 앞서 권력층 전체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을 재확인했다.

 재산 공개 파문은 일단 고개를 숙였다. 신흥 세력인 민자당 민주계는 정치 기반을 확고하게 다졌지만, 정치권의 세대교체와 여권 구조 재편의 불씨는 그대로 남아 있다.단기적으로 볼 때 정파의 이해득실은 명백해졌다.

 개혁 조처의 한가닥으로 추진한 재산 공개 파문은 자칫 통제 수위를 벗어날 뻔했다.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판도라 상자의 뚜껑을 연 것은 일종의 모험이었다. 그리고 그 정치적 모험은 국민 대다수의 환영을 받고 있다.문제는 개혁 프로그램이 특정 인물이 아니라 법과 제도에 의해 지속적으로 추진돼야 한다는 점이다. 지배계층의 재산 공개가 우선은 국민의 환영을 받지만 위화감과 불신감을 더욱 부채질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면 득보다는 실이 더 많은 정치 계산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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