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가 만든 변신인가 출세주의 변절인가
  • 서명숙 기자 ()
  • 승인 2006.05.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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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학규 교수 정계 입문에 다양한 반응…판단은 유권자가



 ‘공직자 재산공개 파문??으로 전국이 들끓는 동안 金永三 대통령은 또 다른 ??정치 도박??을 감행했다. 보궐선거 세곳(부산 사하, 부산 동래갑, 경기 광명시)의 공천자를 발표하면서, 정치권에서는 무명 인사나 다름없는 孫鶴圭 교수(서강대?정치학)를 광명시 공천자로 낙점한 것이다.

 ‘파격 공천??소식에 접한 정치인들의 반응은 여러 갈래로 나타났다. 우선 민자당 내에서도 ??지나치게 모험적인 공천이다?? ??대체 손교수가 누구길래??라는 반응이 나왔다. 반면 민주당에서는 ??시대의 변화를 절감한다????YS가 또 한번 의표를 찔렀다????세곳 다 못 건지는 게 아니냐??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조심스레 흘러나왔다. 재야단체 인사들 역시 놀라움을 드러냈지만, 거기에는 착잡함이 더 많이 묻어 있었다.

 그가 가르치던 대학의 학생들은 착잡함을 공개적으로 표현했다. “범민주 단일 후보를 대통령으로 내세웠다면 사랑하고 존경하는 스승에게 민자당원이 되는 수모를 안겨드리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저희들의 솔직한 심정은 교수님께서 민자당에 갈 것이 아니라 재야 양심 세력 재건과 야당 강화에 힘써 주셨으면 하는 것입니다??(서강대 대자보) ??…우리는 역사에서 지배집단의 보수와 반개혁의 본질을 뛰어넘기에, 몇몇 개혁적 인사와 정책이 얼마나 무력했는지를 4?19세대와 6?3세대의 개량화 과정에서 충분히 보아왔기에 선생님의 선택에 많은 사람들이 회의를 품고 있는 것입니다.??(서강대 학보)

 한 대학 교수의 정치 입문을 놓고 왜 이렇듯 ‘시대적 변화의 한 단서??라는 견해에서부터 ??진보적 지식인의 변절??이라는 매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반응이 나타나는가.

 손교수는 서울 문리대 65학번이다. 그 자신의 표현에 따르자면 “64년 한 해 동안 캠퍼스를 휩쓸었던 한일회담 체결 반대 데모에 이어 비준 반대 데모가 시작되던?? 65년에 대학에 입학했다. 6?3세대의 막내인 셈이다. 소박한 애국심 차원에 머물렀던 그의 의식은 한일관계?국제질서?미국의 제국주의 전략등을 종횡무진 토론하는 선배들을 지켜보면서 ??의식화??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꽤 오랜 시간이 흐르도록 열성 데모꾼에 머물렀을 뿐, 학내의 주동그룹에 끼여들지는 못했다. 영남권 출신들이 학생운동 그룹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상황에서 ‘튀는 경기 출신??인 데다 유별한 행동거지 때문에 오히려 ??경계 인물??로 찍히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그와 절친한 한 재야인사는 ??그는 단식농성 때는 사나흘씩 내처 굶는가 하면 과총회 때는 손을 들고 선배들에게 엉뚱하고 기초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런 열성이 오히려 그를 의심하게 만들었다??라고 술회한다.

 

조영래?김근태씨와 함께 ‘경기 삼총사??

 그는 대학 3학년에 접어들면서 완전히 학생운동권의 중심부로 편입됐고, 故 趙英來변호사(법대)?재야 인사 金槿泰씨와 함께 ‘65학번 삼총사??로 불렸다. ??쌍권총 총장??으로 유명한 尹天柱 총장 시절 그는 무기정학 기간에 무기정학을 당하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는데, 당시 윤총장은 징계 해제 과정에서 손학규만은 절대 안된다며 무기정학 하나를 끝내 남겨두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현재의 부인을 만난 것도 학생운동의 격량 한가운데서였다. 68년 불온 서적을 소지했다고 반공법으로 구속된 그는 검찰청 대기실에서 통혁당 사건으로 구속된 현재의 부인(당시 이화여대 약대 재학)과 처음 만났다.

 어쨌든 이들 세대는 다소 낭만적 성향의 6?3세대와는 달리 ‘좌파 학생운동??의 색채를 띠기 시작한 운동권 세대로 훗날 ??재야 조직운동의 제1세대??로 발전해 나갔다. 그러나 손씨는 학생운동권을 떠난 후 두 번 ??변절??했다. 그 첫 번째가 기독교 사회운동에 뛰어든 것이고, 두 번째가 뒤늦게 유학길에 오른 것이다.

 72년 朴炯圭 목사가 이끄는 수도권 지역 특수지역선교위원회 간사로 기독교 운동에 뛰어든 그는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반동이다. 반동의 힘을 키워주는 건 잘못된 선택이다??라는 학교 선후배들의 맹렬한 비난에 직면했다. 손씨는 비판하는 그들에게 ??한계는 분명하지만 교회는 지금 같은 억압체제 아래서 상당한 자유를 확보할 수 있는 공간이다. 그런 공간에서 기반과 바탕을 마련해 놓으면 다른 사람들이 좀더 본질적인 변화를 꾀할 수 있지 않은가??라는 논리를 폈다. 손씨는 ??폭합적인 유신정권 아래서 교회의 역할이 커지자 나의 변절을 수긍하고 그 역할을 인정해 주는 친구들이 늘어났다??고 말한다.

 기독교 사회운동이 정치적 억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웠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2년에 걸친 ‘도피 생활??을 치러내며 암으로 투명하다 세상을 떠난 홀어머니의 임종조차 못지키는 개인적 고통을 겪었다. 유신정권이 박목사의 예봉을 꺾기 위해 조작한 이른바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 공금 횡령 사건??때문이었다. 그는 도피 기간에 강원도 과수원의 막노동꾼으로, 서울 합정동의 한 철공소에서 위장 취업자로 일하기도 했다. ??학생 때 꿈꾸었던 노동운동이 아니라 불가피한 상황에서 밑바닥 생활을 경험??한 것이다.

 그러나 유신이 막바지 기승을 부릴 무렵인 70년대 후반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에서 맹활약하던 그는 유신정권의 종말과 함께 또 한번 변신했다. 느닷없이 영국 유학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서울의 봄??이 한창이던 80년 4월이었다. 그는 ??민주화 건설은 이제부터 시작인데 일손 하나가 아쉬운 판에 혼자만 떠난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손씨는 이들의 지적에 일면 공감하면서도 완강히 유학을 고집했다. “사회적 긴장과 갈등 양태는 나날이 달라지는데 내 자신은 충전이 안되는 배터리처럼 자꾸만 낡아가고 있었다. 지식과 정신을 충전할 기회가 절실히 필요했다.??손씨는 실제로 영국 유학이 한국 경제의 성취에 대한 무조건적인 폄하와 북한에 대한 일말의 환상을 깨부수는 사고 전환의 계기로 작용했다고 말한다.

 “워낙 늦깎이로 공부를 시작한 터라 그 흔한 아일랜드 관광 한번 못하고??공부에 매달렸던 그는 유학생활 8년을 마치고 귀국해 서강대 교수가 되었다. 긴 공백으로 운동권 인사로서의 지명도가 사라진 지는 이미 오래였다. 대신 그는 시국사건 성명서마다 이름을 내고, ??한반도통일론??이라는 과목 강의에 金大中 전 민주당 총재와 재야인사 김근태씨를 초빙하는 파격성을 보여 ??진보 정치학자????학생들이 가장 따르는 교수??로 자리매김되기 시작했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집권당 보궐선거 후보로 ??세번째 변신??을 감행함으로써 다시 한번 주변을 놀라게 만든 것이다.

 

“이씨 송환 지켜보며 생각 달리했다??

 그의 집권당 편입은, 최근 김대통령의 ‘재야 인사 대거 영입??방침과 재야 운동권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레 읽혀질 수도 있다. 문민정부 출현을 맞아 초점을 잃은 일부 재야?진보적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두 갈래의 상반된 주장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비판세력을 강화해 김영삼 정권에 대한 창조적 견제와 지원을 해야 한다는 주장과, 집권세력을 강화해 수구세력으로부터 김대통령을 보호하고 지원해야 한다는 ??민자당 강화론??이 그것이다.

 후자의 흐름은 김대통령의 ‘정부내 기풍진작을 위한 재야 인사 영입 방침??과 맞물려 재야 인사의 정부 참여라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金正男 청와대 사회문화 수석에 이어 金永晙씨(전 민중당 사무총장)가 사회문화담당 1급 비서관으로 임명됐고, 李在五(전 민주당 사무총장) 李信範 崔惠晟 씨 등도 ??현재 접촉중??인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지역구 출마는 임명직과는 전혀 사정이 다르다. 대통령의 낙점은 어디까지나 공천에만 그칠 뿐, 지역 주민들의 지지를 얻어내야 하는 치열한 전쟁이다. 더욱이 광명시 선거는 민자당 내에서도 ‘가장 어려운 한판??으로 꼽혀 왔다. 민자당이 부산의 두 지역에서 수월하게 의석을 따낼 가능성이 높은 만큼, 야당이 이곳에서 총력적을 벌일 게 명약관화한 데다 수도권 지역이라서 유권자들의 야당 지지도도 높다. 민주?민정?공화계의 뿌리 깊은 분열이 전혀 해소되지 않은 것도 민자당의 부담거리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 신인??의 출마는 더욱 부담스럽다. 손씨의 공천이 확정되자마자 광명시에 ??낙하산 공천이 웬 말이냐??는 유인물이 대량으로 배포된 것도 조직내 반발이 심상치 않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더구나 손씨는 대통령선거가 끝난 뒤에도 공경연히 ??YS정권은 그 한계 때문에 절대로 개혁을 못한다??고 말해온 학자다. 이른바 ??친 YS 교수 그룹??도 아니다. 김대통령이 손씨를 공천한 것을 ??정치 도박??으로, 그의 출마 결심을 ??출세주의자의 변절??로 보는 시각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민자당 후보로 나선 배경에 대해 “90년대에 들어와 엄청난 세계사적 변화 과정을 지켜보면서 많은 생각의 변화를 겪었다. 과거의 생각을 그대로 고집하기보다는 변화하는 사회에서의 새로운 역할을 찾는 것이 더 솔직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김대통령의 취임 이후 이인모씨 송환 등 몇 가지 조처들을 지켜보면서 ??YS정권은 절대 개혁 못한다??고 했던 판단을 수정했다??고 설명한다. 또 ??여야의 대립구도가 한 축이라면, 또 다른 축에서는 여야를 떠난 개혁과 수구의 축이 형성돼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과연 그는 김대통령의 개혁 가능성을 재빨리 읽고 동참한 진보적 지식인으로 기록될 것인가, 아니면 약삭빠른 출세주의자에 지나지 않는가. 1차적인 판단은 광명시 유권자들이 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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