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운 장군들
  • 정희상 기자 ()
  • 승인 2006.05.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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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직에서 '떵떵'



5 · 6공서 출세‥‥영관급은 대부분 별 달아


  80년 5월 특전사에 배속된 공수부대대대장(당시 중령)으로 광주민주화운동 유혈 진압을 현장 지휘했던 한 현역 장군은 요즘 심정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장군이 된 이후 군인으로서 명령·복종이 어느 선까지 정당화될 수 있는지 고민을 많이 했다. 그 당시 진압 공로로 받은 훈장이 두고두고 부끄러운 짐으로 느껴진다."

  이같은 표현은 광주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위상과 관련한 시대 변화를 실감케 한다. 그뿐만 아니라 80년 5월 광주는 피해자였던 광주 시민에게는 물론 가해자였던 군에게도 여전히 큰 상처로 남아 있음을 잘 보여준다.

  군 내에는 시민군과 치열한 대치 상태에서 일선 진압군 병사들이 취했던 행위에 대해'불가피했다'고 보는 분위기도 있다. 그러나 이들도 시민의 무장 항쟁을 불러일으킨 초기 (5월17~22일) 공수부대의 잔혹한 진압 방식과 당시 군 실력자들(신군부)의 정치적 의도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비판하는 입장이다.

  따라서 광주 문제의 바른 해결 방향은 광주 시민의 명예 회복과 함께 군의 명예 회복도 포함할 수밖에 없는 성격을 갖고 있다. 그것은 철저한 진상 규명과 맥을 같이한다.

  현재 광주 문제에 대한 군 관련 논쟁거리의 핵심은 진압 부대 지휘 이원화 실상과 살육 을 부른 집단 발포 책임 규명이다.

  잘 알려졌다시피 광주 유혈 사태는 80년 5 월17일 자정을 전후한 특전사(사령관 정호용 소장) 소속 7공수여단(여단장 신우식 준장·육사 15기, 하나회원)의 전남대·조선대 진주로부터 시작된다. 79년 12·12 쿠데타 당시 특전사 작전처장으로 있으면서 반란에 반대한 직속 상관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체포 한 신우식씨는 그 공로로 준장에 진급해 7공 수여단장이 된 뒤 광주에 진주했다. 5월17일 자정부터 이틀 동안 무자비한 시위 진압 작전에 나선 7공수 33·35대대는 시민들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곤봉과 대검으로 시민·학생들을 무차별 난타·난자함으로써 시민의 공분을 산 것이다.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5월19일 신군부는 11공수여단(여단장 최 웅 준장·육사12기, 하나회원) 3개 대대를 광주에 증파했다. 이어 다음날에는 공수부대 가운데서도 최정예인 3공수여단(여단장 최세창 준장 육사 13기, 하나회원)을 광주에 내려보냈다.

  당시 광주에 파견된 이들 특전사 예하 부대들의 공식보고계통은 7113공수 여단·전남 계엄분소(31사단 사단장 정 웅 소장)·전투교육사령부(사령관 윤흥정 중장)·2군사령부(사령관 진종채 중장)·육군본부·계엄사령부(계엄 사령관 이희성 대장)이었다. 그러나 광주에 파견된 공수부대의 잔혹한 시위 진압에 대해 5월20일까지는 보고 계통에서 의도적으로 배제된 전투교육사령부와 향토 사단(31사단)은 그 사실조차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막후 인물 진종채, 강경진압에 큰 책임"

  "광주 시내에 있는 친지들로부터 계엄군이 이렇게 심하게 시민을 난자해도 되느냐는 항의 전화를 받고서야 공수부대가 내게 모든 사실을 숨겼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그 뒤 절대 유혈 진압을 하지 말라고 공수부대 지휘관들에게 내린 나의 명령은 현지에 내려온 2군사령관 진종채 중장에 의해 묵살되고 말았다. "(윤흥정 중장)여기서 광주시위 과잉 진압과 관련한 진종채 중장의 역할에 새삼 관심이 모아진다. 진종채 중장은 육사 8기로 육사 11기가 주축이 돼 결성한 군부내 사조직 하나회의 강력한후원자였다는 게 군 내부의 평이다. 민주당 강창성 의원(전 보안사령관)은 "진장군은 하나회가 기피하는 인물을 제거한 막후 인물로5·17당시 광주 계엄군을 직접 지휘했을 뿐만 아니라 강경진압에도 상당한 책임이 있던 인물이다"라고 증언했다.

  5월21일 전남 도청 앞에서 시민을 상대로 일제히 불을 뽑은 계엄군의 집단 발포는 그 책임자가 누구냐를 따지게 하는 중요한 논쟁거리이다. 당시 육군본부 상황실에서 숨가쁘게 돌아가던 광주 상황을 점검했던 한 영관 장교는 이렇게 말했다.

  "12·12사태부터 5공화국 출범까지는 군의 지휘계통이 비정상적으로 운영된 시기였음을 알아야 한다. 발포 명령 같은 문제에서 정호용씨는 최고 결정권으로부터 한발 물러선 위치에 있었다. 현장 지휘관들의 요청에 따라 신군부의 핵심인 전두환 보안사령관으로부터 정호용 특전사령관·각여단장 순서로 명령이 내려갔다고 보면 정확할 것이다. "  물론 지난 89년 국회 광주청문회 당시 증인으로 나온 정호용 최 웅 씨는 신군부 핵심의 발포 명령 사실을 극구 부인했다. 그들은 더 나아가 광주 진압은 공식 지휘계통으로 일원화되어 있었으므로 발포 책임이 31사단장과 전투교육사령관측에 있다고 맞섰다. 그러나 이같은 주장은 80년 5월24일 일어난 사건으로 완전히 설득력이 없음이 증명되었다. 이 날 공수특전사 11여단은 송정리로 이동하면서 광주 부근 효천역을 통과하다 야산에 매복하고 있던 전투교육사령부보병학교 교도대 병력과 서로를 시민군으로 오인해 큰 전투를 치렀던 것이다. 지휘계통이 일원화되어 있었다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군부대끼리의 교전이었던 것이다. 광주항쟁 기간의 군 사망자 22명 가운데 55%인 12명이 이처럼 이원화된 지휘체계에서 군부대 사이의 교전으로 희생됐다.  신군부는 3개 공수여단 10개 대대 외에도 5월21일부터는 전방에 주둔하던 20사단(사단장 박준병 소장·육사12기, 하나회원) 병력 2만명을 광주 외곽에 추가 배치했다. 이 병력은 기존 공수여단들과 함께 5월27일 새벽 이른바 '상무충정작전'에 따라 광주 전역을 완전히 무력 진압했다.

  광주항쟁을 유혈 진압한 신군부는 그해 6월20일 작전에 참가했던 '유공자' 66명에게 각종 훈포장을 수여했다. 이 논공행상에서 발포금지 지시로 무혈 진압을 시도한 정 웅 31사단장과 윤흥정 전투교육사령관은 제외됐고, 초기부터 유혈 진압에 적극 나선 정호용 특전사령관·최세창 3공수여단장·박준병20사단장에게는 충무무공훈장이 수여됐다. 이들은 모두 전 해에 있었던 12·12 쿠데타의 주역이기도 했다. 아울러 특전사령부와 20사단은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이밖에도 초기에 유혈 진압을 지휘취했던 11공수여단 61대대장 권승만 중령(현재 준장)과 도청 앞 집단 발포를 현장 지취했던 안부웅 중령(현재 소장)에게는 각각 국무총리 표창이 수여됐다.

  한가지 놀라운 사실은 5월24일 효천역 부근에서 군부대끼리의 오인 전투로 사망한 11공수부대원 9명 전원에게 '폭도들의 흉탄에 의해 순직'이라고 공적조서를 날조한 뒤 훈장을 수여했다는 사실이다.

 

"진상 폭로 두려워 진압 부대장 보호"

  광주의 진압 부대장들은 대부분 5·6공 아래서 출세가도를 달린것으로 확인된다. 이와 관련해 80년 당시 육군본부 상황실에서 근무한 한 중령은 이렇게 말했다.  "당시 대대장들은 거의 장군으로 진급되었다. 하나회 측은 광주 진압 지휘관들이 정 웅장군처럼 반대편에 서서 진상을 폭로할까 두려워 이들을 특별히 보호했다."  그 결과 모두 하나회 핵심으로 구성된 광주 투입 장군들은 군에서 뿐 아니라 사회에나와서도 요직을 차지한다. 20사단장 박준병씨는 보안사령관을 거쳐 현재 국회의원으로 있고, 특전사령관 정호용씨 역시 육참총장 내무부장관을 거쳐 현재 국회의원이다. 3공수여단장 최세창씨는 6공 말기에 국방부장관에 올랐는가 하면, 중장으로 예편한 11공수여단장 최 웅씨는 폴란드 대사이다. 소장까지 오른 7공수여단장 신우식씨는 관광공사 감사를 맡았다. 그밖에 광주 진압군을 일선에서 지휘한 대대장(당시중령) 22명은 현재 대부분 준장 또는 소장을 달고 국방부·육본 및 일선 사단장으로 나가 있다.

  문민 정부가 해결해야 할 해묵은 숙제의 핵심은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 조처, 책임자처리 문제로 모아진다. 그 과정은 군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이 분명하다. 이미 국가의 잘못을 인정해 배상을 논하는 시점에서 최소한 가해자의 잘못에 대한 진상과 책임소재 규명은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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