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페 · 물타기로 일관한 13년'악몽'
  • 김 당 기자 ()
  • 승인 2006.05.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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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공은 강압 · 6공은 보상위주‥‥광주대표"문제 해결의 적임자인 김대통령에 기대“


  광주직할시 북구 운정동 산 46번지광주시립공원묘지 제3 묘역. 흔히 망월동이라고 부르는'5·18민중항쟁' 희생자들의 주점이 묻힌 곳이다. 5·18광주민주화운동 13주기를 앞둔 지금 이곳'5·18표역'의 맞은편 야산에서는 절토작업이 한창이다. 포화 상태에 이른 묘역을 확장하고새로 단장하기 위해서이다. 이처럼 13년만의 진정한 복권을 기다리는 비좁고 뒤얽힌 5·18묘역의 역사는 바로 광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역대 정권이 어떤 방식을 꾀했는지 알 수 있게해 준다. 그것은 또한 역대 정권이 희생자들과 가족들을 포함한 '광주'를 어떻게 '대접'했는지 분명하게 보여준다

  5·18묘역이 생긴 때는 80년 5월29일. 5월27일 새벽까지 계엄군에 의해 숨진 주검 중에서 신원이 확인된 1백26구가 이 날 광주 시청 청소차에 실려와 이곳에 집단으로 묻혔다. 그리고 5월31일 유족들은 삼우제를 치르고 난뒤에 '5·18광주의거 유족회'(현5·18 민중항쟁유족회, 이하 유족회)를 만들기로 하고, 당국에 대한 유가족의 건의 및 요구사항을 내는 창구를 단일화하기로 결의했다. 그 뒤로 유족회는 정부 당국의 집요한 탄압과 보상금을 이용한 분열공작으로 몇 차례 와해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추모제 거행, 5·18이후 줄을 이은 '민주 열사'들의 5·18묘역 안장 같은 일을 해오면서 5·18정신의 불씨를 지켰다.

 

 

국민성금에서 지급된 '위로금'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에 대한 첫 보상조처가 발표된 것은 80년 6월6일. 명목은 보상도 배상도 아닌 위로금이었다. 사망자 1명당4백만원과 장례비 20만원, 중상자는 3백만 원, 그리고 부상자는 치료비 국고 부담이 전부였다. 그나마 폭도·난동자로 규정된 '특정사망자 '36명의 유가족은 위로금 지급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위문금 명목인 이 최초의 보상금조차 국가예산에서 나온 게 아니라 재해의 연금과 광주사태 직후 모아진 국민성금 에서 지급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유족회에서는 "비극적 상처를 치유하기보다는 뒷날의 화근을 없애려는 강압책으로 일관한 5공화국 정권"의 대표적인 과오로 묘역의 분산 이장을 지적한다. 유족회에 따르면83년 3월4일 고 민병렬의 묘를 시작으로 하여 이듬해 9월까지 26구가 5·18묘역을 떠났다. 당시 전남지역개발협의회(직할시 승격 이후광주·전남지역개발협의회로 바뀜, 이하 지개협)를 대리인으로 내세워 묘역을 이장함으로써5·18묘역을 폐쇄하려는 공작은, 생계가 어려운 유족들을 분산시켜 궁극적으로 진상을 은폐하려는 정보기관의 작품이라고 알려져 있다.

  고광표(초대 회장·대창운수회장) 장종태(〈광주일보〉사장) 박정구(광주고속 사장)등 도내 유지 14인에 의해 발기된 지개협이 창립된 때는 82년 12월. 지개협은 83년부터 해마다 지역 상공인들과 재경 광주 전남지역 출신 기업인들로부터 지역 개발을 위한 기금을 조성해 그동안 장학금 지급 같은 '좋은일'을 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5월 관련 단체들은 지개협이 겉으로 내세운 설립 목적과 달리5공 정권으로부터 '궂은 일'을 떠맡은 사실상의 5·18 전담 기구였다고 지적한다. 지재협의 제1차 사업이 83년2월에 시작된 생활실태조사 명목의 '희생자 가정 방문'과 3월부터 시작된 '생활지원금 지급'이었음이 그 증거라는 것이다.

 

"보상 아닌 배상이라야 명예회복"

  지개협은 처음에는 묘를 이장하는 유족에게만 생활지원금 1천만원과 이장비 50만원을 지급했다. 그러자 전계량 회장(현 광주시의원)을 비롯한 유족들의 끈질긴 투쟁과 광주시민의 저항으로 이장 공작은 2년 만에 중단되고, 그때까지 묘지 이장을 전제로 한 지원금 수령을 거부해온 유족들에게도 일괄적으로 1천만원씩 지급되었다. 그러나 이 돈이 역시 피해자라 할 수 있는 이 지역 상공인들에 대해 반강제로 할당한 성금에서 나왔다는 점에서'도적의 의적놀음'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6공 정권은, 보상 문제는 '민주화합추진위원회'(이하 민화위)를 통해서, 진상규명 문제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특별위원회' 청문회를 통해서 일단 걸르는 세련된 방식을 구사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자신의 선거공약 사항이기도 한 민화위를 정권 인수기(88년 1월11일)에 발족시키고 취임한 뒤에 민화위의 건의를 토대로 한 정부측 치유대책을 발표했다. 5공 하에서의 두 차례 보상이 말 그대로 시혜적 차원의 위로금이었다면 6공 정권에서의 법적인 보상금은 피해자에 대한 보상성격을 띤 것이었다. 정부는 88년 추가신고기간(5월18일~6월30일)에 신고된 7백4명(사망 10, 부상 5백81, 행불 1백2, 기타 11)을 심사해 그 중 5백50명(사망 2, 부상 5백16, 행불 32)을 5·18관련 사상자로 추가했다.

  그러나 정식 보상금은 3당합당으로 인한 우여곡절 (평민당은 '3억원 배상' 민자당은 '1억원 보상'을 주장) 끝에 90년 7월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등에 관한 법률'을 민자당이 단독으로 통과시킨 이후 그 해 12월부터 지급되었다.  그러나 당시 2천여명에 달한 상무대 영창구속·연행자들과, 그 중 군사재판에서 '전과자'낙인이 찍힌 2백여명에 대한 보상은 여전히 미해결로 남아 있다. 이들을 포함한 5·18희생자들의 명예 회복(보상 아닌 배상)과 진상 규명이 5·18관련 단체들이 새 정부에 거는 기대이다.

  광주는 지금 윤공희 대주교 등 대표 17명을확정하고 김영삼 대통령과 나눌 대화 내용 조을에 들어갔다. 이제 자신의 말대로 '광주 사태의 피해자'이자 '광주 문제 해결의 적임자'인 김대통령의 결단만 남은 셈이다.  광주 문제 해법의 하나로 특별검사제를 골자로 한 특별법 초안을 작성한 유남영 변호사는 "가해자인 전 정권이 억압과 은폐로 일관했다면 노정권은 '물타기'로 일관했다. 공소시효가 2년밖에 남지 않은 지금 과거의'무자격자'와 달리 해결 능력과 권한을 가진 김영삼 정부가 이를 회피한다면 역사는 범죄를 방조한 책임을 묻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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