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업’으로 꾸며내는 100% ‘국산’뮤지컬
  • 성우제 기자 ()
  • 승인 2006.05.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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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콘브리오’ 첫 창작 추리극 <피아노 살인>

 지난해 여름 창단해 첫 작품으로 4월 1~18일 창작 뮤지컬 <피아노 살인>을 무대에 올리는 극단 콘브리오의 연습실은 무용실 모습을 하고 있다. 두벽은 전면이 유리로 덮여 있고, 다른 곳은 방음을 위해 스펀지로 싸놓았다. 거울 옆에은 무용수가 쓰는 ‘바’가 세개 놓여 있다.“손발로만 맞춰 무용복 차림의 배우들은 춤을 추었다. 연습이 끝나자 한 여배우는 바 밑에서 무용복을 무릎까지 걷어올리고 시퍼렇게 멍이든 두 무릎에 약을 발랐다.


전문인 3명이 ‘동등하게’ 참여

 연극무대에 서너 차례 서 본 적이 있다는 한 남자 배우는 “다리를 찢었다”는 표현으로 무용의 어려움을 설명했다. 그가 겪고 있는 어려움은 바로 한국 뮤지컬이 겪는 어려움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들어 뮤지컬 무대가 많아지고 <코러스라인>, <레미제라블> 같은 미국과 영국의 대작이 잇따라 국내 무대에 오르고 있지만 한국 뮤지컬은 여전히 ‘초창기’ 혹은 ‘과도기’라 불린다. 뮤지컬 전문을 표방한 극단 콘브리오는 창작극 <피아노 살인>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한국 뮤지컬의 척박한 풍토를 고스란히 감내해야 했다.

 극단 콘브리오는 ‘뮤지컬 전문’이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작품을 선정하기 앞서 연출가.작곡가.안무가가 모여 토론을 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빈 국립음대에서 공부한 작곡가 朴恩珠씨(29)와 <당신 멋대로 생각하세요>등 20여편의 연극을 연출한 柳根惠씨(38),캐나다 토론토무용학교를 졸업한 안무가 朴種浩씨(27) 등 젊은 전문인 3명이 ‘동등한 입장’에서 의견을 주고받은 것이다. 뮤지컬의 3대 요소인 연기.노래.춤의 전문가들이 같은 위치에서 토론을 하며 작품을 제작했다는 점은 한국의 현실에서는 의미가 크다.

 콘브리오의 대표 박은주씨는 “뮤지컬 음악을 맡으면서 음악을 모르는 연출가를 만나 고생한 경험이 여러번 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세 사람이 함께 시작했다”라고 말했다.작곡을 의뢰받아 곡을 쓰다 보니 연출가와 부딪치게 되는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뮤지컬 음악을 일반 연극, 곧 정극의 배경음악쯤으로 여기는 일마저 있었다고 박씨는 말했다.

 한국에서 뮤지컬을 기획할 때는 대개 연출가를 먼저 선정한 뒤, 그를 통해 작곡가.안무가를 섭외한다. 따라서 춤과 노래 분야도 연기를 지도하는 연출가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다. 이런‘불합리’를 제거하기 위해 전문가 세사람이 힘을 모았지만 창작 뮤지컬에 따르는 어려움은 수없이 많았다. 우선 뮤지컬계에 전문가가 없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로 떠올랐다.연출가나 안무가도 뮤지컬에 처음 참여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보다는 전문 극작가와 배우가 없었다. 대본을 소설에서 구하기로 하고 작가 金聖鍾씨의 추리소설 <피아노 살인>을 원작으로 삼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추리극은 기존 뮤지컬이 통념을 깨뜨리는 것이다. 화려한 의상과 춤,그리고 노래가 어우러져 관객에게 즐거움을 선사한다는 뮤지컬이 실타래처럼 꼬인 살인사건을 풀어나가는 추리물을 소화하기에는 무리라는 지적이 오간 것도 이 때문이다. 안무가는 “추리물이 갖는 복잡한 성격을 정리하고 통일성을 갖게 하는 데 중점을 뒀다”면서도,이 춤을 무대에서 제대로 소화해낼 전문 배우가 부족한 점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국내의 뮤지컬 전문 배우는 2백명 정도이다. 관립 단체인 서울시립가무단(이하 가무단)과 서울예술단, 그리고 롯데월드 예술극장 소속 단원들이 뮤지컬 배우의 전부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피아노 살인>에서도 뮤지컬 경험을 지닌 배우는 주역 3명뿐이다. 86년부터 뮤지컬 무대에서 서온 가무단의 郭泰씨와 13년 경력의 康孝聖씨, 그리고 전 서울예술단 단원 李沅熙씨 말고는 지난해 12월 오디션을 통해 뽑은 신참 단원이 전부이다. “연기는 어느 정도 되지만 노래와 무용이 힘들다”“노래는 자신있는데 춤이 너무 어렵다”는 신인 배우들의 말은 뮤지컬 배우의 ‘전문성’이 어떤 것인지를 짐작케 해 준다.

 30여년이라는 연륜을 쌓은 가무단 단원은 그간 1년에 두번 열리는 가무단 무대에만 올랐을 뿐 민간 극단 무대는 밟아보지 못했다. 지난해 8월 단장으로 취임한 李義一씨가 가무단 배우들의 욕구와 민간 극단의 배우 기근을 해결하기 위해 단원들을 ‘풀어준’ 덕분에 <피안노 살인>은 처음으로 가무단 배우 2명을 확보할 수 있었다.

기업들, 창작 뮤지컬에 ‘협찬’ 외면

 박은주씨는 “텔레비전 탤런트를 쓰라는 충고를 여러번 들었지만 전문인이 아닌 연기자를 쓸 수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기량은 떨어져도 ‘얼굴값’을 하는 탤런트를 쓰면 관객을 확보하기도 쉽고 기업의 협찬을 받는 데도 유리하다. 극단 콘브리오는 협찬을 하나도 받지 못했다.기업이 도움을 꺼린 또 다른 이유는 창단 극단의 창작극이라는 ‘위험’ 때문이다. 외국의 유명 뮤지컬 번역 무대에는 협찬이 줄줄이 따라 붙는다. 그러나 대본 안무 음악 세트 등을 우리 손으로만 만드는 작품에는 기업들이 등을 돌리는 게 현실이다.

 지난해 12월부터 연습에 들어간 신찬 배우들은 오전엔 무용, 오후엔 노래와 연기, 그리고 밤에는 총연습으로 땀을 흘린다. 3월 하순부터 매일 새벽4시까지 이어진 이들의 강행군은 장르가 다른 세 전문 분야을 조화시켜야 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따로 하면 잘 하다가도 합치면 헝클어지고 만다”는 한 스태프의 말은, 뮤지컬이라는 종합 장르가 얼마 만큼의 땀을 요구하는가를 보여준다.

 작곡가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우리말 발성법에 맞는 음악이다. 번역극에서는 우리말 가사를 원음에 맞춰 부르기 때문에 의미 전달이 제대로 안되는 경우가 많다. 연주에 컴퓨터와신시사이저를 동원한 것은 무엇보다도 제작비 때문이다. 오케스트라를 쓸 경우 그 과정이 복잡할 뿐더러 입맛에 맞는 음악이 나오리라는 보장이 없다. 열여덟 곡을 작곡하는 데 2개월밖에 투자하지 못했는데 그 이유가 기획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보도자료면 포스터 인쇄, 심지어는 연습실 난로 기름까지 혼자서 챙겨야 했기 때문이다.

 민간 극단으로는 거의 처음으로 뮤지컬 ‘창작’에 나선 극단 콘브리오의 <피아노 살인>은 이런 어려움을 거쳐 관객 앞에 선다.비록 소극장용이지만 창작 뮤지컬이 그 싹조차 희미한 국내 연극계의 현실에서 20~30대 전문인들이 꾸미는 ‘젊은 무대’는 성공하든 실패하든 창작 뮤지컬 제작의 좋은 선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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