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惡에 맞선 ‘근육질 분노’
  • 이세용(영화평론가) ()
  • 승인 1989.1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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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옥> 감옥: 존 플린 주연: 실베스터 스탤론, 도널드 서더랜드

 
이탈리아산 鍾馬처럼 강인한 실베스터 스탤론. 그가 주연한 영화들은 육체의 힘으로 미국식 꿈을 이루는 70년대의 <록키>에서 시작하여 기관총이 등장하는 80년대의 <람보>까지 찬사와 비난을 받으면서 달려왔다. 사나이다운 인내와 용기, 여자와 우정을 위한 인간적인 분노와 액션은 비록 오락적인 소모품에 그칠망정 그 나름의 역할을 수행한 점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람보>시리즈 이후 관객들은 만화적인 상상력으로 구성된 영화에 그만 식상해버렸다. 그래서 할 수 있다면, 스탤론은 <록키>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총소리와 폭탄의 굉음 대신 인간의 근육에서 우러나오는 힘의 액션이야말로 스탤론의 본려잉기 때문이다. <탈옥>은 스탤론식 인간주의로의 복귀를 보여주는 필름이다.

 출감을 눈앞에 두고 제3의 교도소로 전출된 프랭크 레오네(실베스터 스탤론)는 드럼굴 소장(도널드 서더랜드)의 개인적인 원한에 의해 시달림을 받는다. 이유없는 협박, 살충가스, 잠 안재우기, 살인위협 등 비인간적인 고문을 견디는 프랭크 레오네는 마침내 드럼굴 소장의 위계에 빠져 탈옥을 결행하지만 결론은 모든 것이 드럼굴의 음모로 밝혀지고, 프랭크는 만기 출소로 자유를 얻는다.

 감옥을 무대로 한 영화에서 죄수는 규칙을 준수하고 간수는 떡먹듯이 법을 어김으로써 관객을 분노케 하는 수법은 하나의 공식이 되어 있지만 <탈옥>도 이 점을 미묘하게 자극한다.

 우선, 이처럼 규칙을 준수하고 착하고 의리있는 사람이 왜 교도소장인 드럼굴과 앙숙 관계인가. 그것은 몇 년 전, 레오네의 의부가 위독했을 때, 드럼굴 소장이 모범수인 레오네의 임시 출소를 허용하지 않아 ‘탈옥’을 하게 만들고, 이 사실이 알려져서 드럼굴은 벽지의 교도소로 좌천당한 것으로 되어 있다.

 죄수인 주인공은 善이며 간수인 드럼굴은 惡의 대리인으로 나온다. 그래서 영화는 선과 악의 팽팽한 대결로 진행된다. 탈옥의 동기가 ‘의부’의 임종을 지키는 일, 즉 가족의 뿌리를 확인하는 대목과 연결됨으로써 주인공의 ‘탈옥’은 정당화된다. 뿐만 아니라 고문에 가까운 형벌을 견디면서도 출감을 기다리던 레오네가 제2의 ‘탈옥’을 결행하게 된 동기에 이르면 이 영화의 주제가 분명해진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인내할 것만 같던 레오네는 먼저 출소하는 자가 자신의 여인(다렌 프루겔)을 건드리겠다고 하자 분노하여 목숨을 걸고 ‘탈옥’을 실천에 옮긴다. 사랑하는 여자를 지키기 위한 탈옥이다. 두 번의 탈옥이 결국 가족과 연인을 지키기 위한 일종의 정당방위로 그려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정과 연인. 지난번 이 난에서 살펴본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도 가정과 연인의 문제였다. 다른 것이 있다면 <탈옥>은 스탤론식 영화라는 것이다.

 아마 실베스터 스탤론의 출연작 중 <탈옥>만큼 대사가 많은 영화도 드물지 않나 싶다. 분노의 표정과 근육 대신 인간적인 표정을 지으려고 무척이나 애쓰지만 이런 노력은 지나치게 시끄러운 음향효과의 사운드에 묻혀버린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철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 총을 장진하는 음향에 귀가 멍멍해져 스크린보다 라운드 스피커가 관객의 정신을 빼앗는다.

 교도소 내 진흙 마당에서 미식축구를 하는 장면과 탈옥 신의 박력으로 <탈옥>은 하나도 새롭지 않은 이야기의 되풀이에서 겨우 벗어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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