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완상 칼럼-힘의 과용과 확대재생산
  • (본지 칼럼니스트·서울대교수) ()
  • 승인 1989.1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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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신문 사회면을 보면 온통 범죄기사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한국사회가 온갖 흉악범들의 소굴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떼강도 여교사 납치·인질극’ ‘총포사, 총 탈취 은행습격’ ‘방위병 M16 난사·자폭’ ‘골프업체 사장 골프채로 맞아 피살’ ‘여고생, 후배 시샘 살해’ ‘회칼 6인조 17차례 범행’ ‘40대 가장 개끈 목매 자살’

 이같은 기사를 읽노라면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능력이 없는 정권은 마땅히 국민에게 사표를 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기껏 들려오는 소리는 이맘때면 흔히 되풀이되는 ‘방범총비상령’이라는 소음이며 “범죄가 누그러지지 않으면 나도 사퇴하겠다”는 포도대장의 흰소리뿐입니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이 위협받게 되는 것보다 더 심각한 위기가 있을 수 없음을 인정한다면, 범죄문제가 정치·경제·외교현안들보다 더 절박한 구조적 문제임을 깨닫고 근본대책을 강구해야 합니다. 도대체 어찌하여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까?

 

공권력 남용이 강력범죄 양산 부추겨

 첫째,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지난 반세기 동안 누적적으로 심화되어 왔습니다. 조국분단에 터한 냉전논리로 이 땅을 지배해온 반민주지배세력은 빈부간, 그리고 治者·被治者 간의 사회적 거리를 크게 벌려놓았습니다. 이같은 계급모순은 졸렬한 경제성장정책으로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그런데 정권들은 이것을 밑으로부터 정당하게 고쳐보려는 노력을 분단이데올로기로 단죄하고 통제해왔습니다. 그만큼 국민의 생존권적 기본권과 자유권적 기본권은 조직적으로 제약되어 왔습니다. 5공에 들어와서 지도층은 제도와 법의 보호아래 온갖 큰 부정과 비리를 저질러 왔습니다. 그리하여 일부 국민들 중, 그러한 큰 범죄에 견주어 조그마한 범죄 정도는 괜찮겠지 하는 탈법의식이 번지게 된 것입니다. ‘有錢無罪 無錢有罪’라는 인식이 국민들 속에 공감의 파장을 일으키게 되면 이것은 곧 법체계 전반에 대한 국민적 불신의 한 반영이라 하겠습니다. 법에 대한 불신과 범죄발생은 서로 연관되기 마련입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둘째, 특정 행위에 대한 국가통제의 남용이 범죄공간을 확대시켜 주었습니다. 당국이 정치적 이견자들에 대해 지나치게 통제한 결과 시국사범을 양산시켜놓았고 또한 민생치안의 공백상태를 야기시켜 그 결과 강력범들의 공간을 확대시켜 놓았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는 공권력의 과잉행사가 오히려 범죄를 생산하게 되기도 합니다. 확신범의 상당 부분은 과잉통제의 결과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이중의 비극이 생깁니다. 한편 확신범의 양산은 대외적으로 인권탄압의 인상을 심어주어 국위를 추락시키고 다른 한편 시국사범들을 더욱 단단한 확신범으로 훈련시켜주게 됩니다. 게다가 간접으로는 흉악범의 발호를 도와주어 이래저래 범죄의 확대재생산에 공헌하는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공권력의 과잉행사를 부추겨주는 온갖 5공 악법들은 해가 바뀌기 전에 과감히 청산돼야 합니다.

 셋째로, 국민을 불안케 하는 것은 대물범죄나 대인범죄의 개별적 증가가 아니라, 이 둘을 합친 강력범의 폭발적 증가입니다. 남의 재물을 탈취하면서 인명을 해치는 흉악범죄가 날로 늘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물질만능주의에 따른 인명경시 풍조가 널리 번지게 된 결과이며, 이를 부추기는 것이 바로 한탕주의라고 하는 편법주의 가치관입니다. 그래서 물욕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살상을 불사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하기야 이 땅의 지도층이 5·16, 12·12, 5·18등을 통해 이미 이같은 저질 가치관을 국민 앞에 모범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광주학살과 5공비리는 편법주의 극대화의 한 보기에 불과합니다. 그들이 집권한 뒤, 갖은 비리와 부정을 분별없이 저질렀음도 이미 드러났습니다. 알려진 것은 그나마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고 국민들은 믿고 있습니다.

 어느 나라든지 지배세력이 제도화된 폭력을 애용하게 되면, 그곳에서는 폭력을 애용하는 강력범들이 쉽게 날뛰게 됩니다. 큰 살인은 ‘혁명’이 되는데 작은 살인은 범죄가 되고, 큰 도적질은 법의 보호를 받는데 작은 절도범은 가혹하게 처벌받는다는 사실을 국민들이 냉소적으로 받아들인다면, 그 사회는 바로 범죄소굴로 변질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곳에 흉악범과 온갖 파렴치범들이 세상 만났다는 듯이 날뛰게 됩니다. 대도 조세형을 영웅시하는 풍조가 있다면 이미 이 사회의 중심부가 깊이 병든 범죄사회가 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은 정부가 ‘맑은 윗물’의 본을 보여줘야 할 때

 이제 세계는 바야흐로 냉전체제를 청산하고 평화와 민주화로 줄달음치고 있습니다. 낡은 냉전식 권위주위로 국민을 통제하던 시대는 동서독 장벽 무너지듯 무너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당국은 아직도 시국사범의 냉전적 통제에는 변함이 없군요. 이러면서 어찌 북한정권의 불변을 탓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는 확신범을 통제하기보다는 그들과 화해하면서 인명을 해치는 강력범 소탕에 공권력을 온전히 쏟아야 할 때입니다.

 치안 총책임자가 경찰에게 총기를 들라고 명령하거나 범죄가 수그러지지 않으면 옷 벗겠다고 공언할 것이 아니라, 이 땅의 범죄가 구조적 모순에서 비롯되며, 잘못된 국가통제로 심화되고 있음을 아프게 자성해야 합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아진다는 보통사람들의 지혜를 거울 삼아 지도층은 자기들의 추한 모습부터 똑똑히 봐야 합니다. 정말 자성한다면 먼저 5공범죄부터 철저하게 청산해야 합니다. 그리고 5공의 악법들을 신속히 개폐해야 합니다. 국민을 불안케 하고 분노케 하는 정부는 마침내 스스로가 불안정해지면서 국민의 분노로 무너질 수밖에 없음을 잠시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지 못하는 정부는 보호받을 가치가 없는 정부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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