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적인 업무량에 ‘허덕’
  • 소종섭 기자 (kumkang@sisapress.com)
  • 승인 2006.05.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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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관, 월 평균 1백20건 처리…중요 사건만 다루는 ‘정책 법원화’ 추진
 
“연구관들의 보고서를 읽기에도 벅차다.”
최근 한 대법관은 지인에게 이렇게 토로했다. 지금 같은 법원 구조 속에서는 ‘재야’ 출신이 아니라 ‘재야 할아버지’가 대법관이 되어도 자신의 ‘색깔’을 드러내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핵심적인 이유는 대법관 한 사람이 처리해야 할 사건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사법개혁추진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대법관들의 경우 재판을 거쳐 판결로 선고하는 정식 사건에 대한 부담이 지방법원 판사보다는 1.3배, 고등법원 판사보다는 10배나 많다. 대법관 한 명이 처리해야 하는 사건이 연평균 1천4백 건에 달하니 한 달에 1백20건 정도를 처리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처럼 대법원이 처리해야 할 사건이 많아진 원인은 1990년 상고허가제도가 폐지되어 상고할 수 있는 사건의 범위가 지나치게 넓어졌기 때문이다. 사건은 많지만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 같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전환을 불러올 수 있는 전원합의 판결이 1%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것을 입증이다. 99%는 사실상 대법원에 올 필요가 없는 사건인 셈이다. 미국 같은 경우 대법관들은 한 해 80건 정도의 사건을 처리한다. 그만큼 집중적인 연구를 통해 자신의 ‘색깔’을 판결로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한 부장판사는 “업무도 많고 청문회도 거쳐야 하기 때문에 대법관 자리를 거절하는 사람도 있다”라고 말했다. 대법관을 다양화하는 취지가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법원 구조부터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법원에서도 그동안 이런 문제점을 인식하고 개선책을 마련해왔다. 2003년 전국 법관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응답자의 81%가 “대법원이 소수 사건에 대한 법률 판단 및 정책 판단 기능을 확대해야 한다”라고 답했다.

이 결과 현재 국회 법사위에는 대법원을 정책 법원으로 바꾸는 것을 골자로 하는 법안이 상정되어 있다. 고등법원에 상고부를 두어 일상적인 사건에 대해서는 여기서 처리하고 대법원은 ‘예외적인 재상고 사건’이나 ‘중요한 상고 사건’만 처리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예를 들면 3년 이상 징역형이 선고된 사건, 민사·가사 사건의 경우 소송가액이 5억원이 넘는 사건 등만 대법원에서 처리한다는 식이다.

이 법안은 지난 4월 국회에서 통과될 예정이었으나 사학법 재개정 문제와 관련해 여야가 실랑이를 벌이면서 처리가 연기된 상태다. 이 법안이 처리되면 법원의 구조가 획기적으로 바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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