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경화 뒤에 감추어진 ‘인기주의’
  • 부에노스 아이에스 · 손정수 통신원 ()
  • 승인 2006.05.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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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 지도자들, 대중 호감 얻으려 경제 질서 외면…경제 정책은 ‘우익’

남미의 좌경화가 연일 국제 언론의 도마에 오르고 있다. 2004년부터 일기 시작한 좌경화 현상이 2005년 말 남미 각국에서 치러진 선거 결과로 절정에 올랐기 때문이다.

‘좌경화’를 ‘적화’ 또는 ‘공산화’로 동일시했던 1970년대 통념에 비하면, 최근 남미의 새로운 좌경화 바람은 현지에서도 큰 관심거리가 되고 있다. 그러나 ‘좌경화’는 남미 내에서보다 국제 사회에서 더 눈길을 끌었다. 이른바 세계화 추세에 따라, 남미가 떠오르는 시장으로 주목되면서 경제 대국들의 관심 또한 뜨겁게 달아올랐기 때문이다. 

볼리비아의 인디언 출신 에보 모랄레스에서부터 칠레의 최초 여성 대통령 바체레티, 우루과이의 타바레스, 아르헨티나의 키르츠네르, 브라질의 룰라 다 실바가 모두 좌익 정당 출신들이다. 국제 언론은 남미의 좌경화를 부추기는 세력으로 남미 ‘좌경 세력의 보루’ 피델 카스트로 및 그와 친하게 지내는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을 지목하고 있다.
 
남미 국민들, 누구라도 배부르게 해주면 OK

미국에서부터 남단 아르헨티나에 이르기까지 전체 판도를 살펴보면, 아직도 중앙 아메리카는 카리브해의 카스트로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친미 색깔이 짙다. 그러나 남미는 파라과이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국가가 모두 좌경으로 돌아섰다.

좌경화 뒤에는 오랜 반미 정서가 자리잡고 있다. 인접한 중미 국가들이 지리적으로 미국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아 친미적 경향을 보이지만, 미국과 좀더 떨어져 있는 남미 국가들의 반미적 정서가 짙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경제적·문화적 교류가 빈번한 중미는 자체의 필요성으로 말미암아 친미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남미 국가들의 깊은 반미 정서는  꼭 반미적이라기보다 강자에 대한 약자의 자존심이나 반발 같은 심리가 국가주의적 흐름으로 작용하고 있다.

2006년에도 역시 중남미 여러 국가가 선거를 치르게 된다. 멕시코는 오는 7월 대통령 선거를 치른다. 니카라과는 오는 11월 대선과 국회의원 선거를 동시에 치른다. 이런 식으로 베네수엘라는 12월(대통령 선거), 콜롬비아는 5월(대통령 선거), 에콰도르는 10월(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 등 줄줄이 선거 일정이 잡혀 있다. 페루에서도 5월 중, 장성 출신 우말라와 전 대통령 가르시아가 2차 선거를 치르며, 남미의 대국 브라질은 10월에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가 있다.
 

 
각국의 선거 전망에 대해서는 확실한 것이 없다. ‘투표함을 열어 봐야 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것은 각국의 여론이 그만큼 불투명하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뚜렷한 결과를 점칠 수 없는 데에는, 군정과 민정을 번갈아 겪어본 남미 국민들의 아픈 경험이 작용하고 있기도 하다.

남미 국민들은 이념이나 정통 정당을 신뢰하지 않는다. 자신을 배부르게 하는 지도자라면 누구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실리 추구 경향이 강하다.  정치 분석가들은 그 사이에 생성된 각국 집권자들의 포퓰리즘(인기에 영합하는 대중주의)을, 좌경화 추세 이후 새롭게 나타나는 남미 정치의 특징적인 흐름으로 지적한다. 2004년 말 유엔(국제연합)이 라틴 국가들에 대해 설문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배만 부르면 독재도 상관없다’는 반응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1990년대 내내 ‘민주화’가 남미 나라들의 우선 과제로 인식되던 일반적 추세와는 동떨어진 이같은 결과는 국제 사회에서 남미의 민주 체제가 존속할 것인가 여부를 우려하게 했다. 반면 계속된 정치·경제 불안과 부정부패, 심각한 빈부 격차와 같은 사회적 불균형에  시달렸던 남미 국민들의 현실적인 표현이기도 했다. 2005년의 선거 결과는 그때 이미  예고되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2000년대 초부터 아르헨티나 서민들은 냄비 시위와 소등 시위를 벌이면서 ‘구 정치인과 관리들은 물러가라’고 외쳤고, 이같은 불만은 돌림병처럼 남미 전체에 퍼졌다.  정통 정당이나 구정치인들에 대한 신뢰는 바닥에 떨어졌다. 그럼에도 정작 선거에서 공산당이나 극좌 계열의 지지가 미미했던 것은 특이한 결과였다. 극우도 원하지 않고 극좌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결과로 중도 좌익이 득세하고 남미의 좌경화가 가시화되었다.

강고한 ‘좌익 국가’ 연합 어려울 듯

전문가들은 남미의 좌익 정부가 우익 경제 정책으로 성과를 올렸다는 데 일치된 견해를 보이고 있다, 칠레의 라고스 전 대통령이나 브라질의 다 실바 대통령, 그리고 아르헨티나의 키르츠네르 대통령이 모두 좌익계 출신이라는 사실과, 글로벌화 추세에 맞춘 자유주의 경제정책으로 안정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대중주의적 경향을 지적하며 이것이 남미 나라들이 처한 위험스럽고도 공통적인 사실로 경고하기까지 한다. 
 
특히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의 경우는 20세기 초 페론의 대중주의적 사회주의와 비견되는 실례로 꼽힌다. 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의 행보도 주목되고 있다. 차베스가 석유를 무기로 돈키호테처럼 세계 열강에 도전하듯이, 남미 최대 천연가스 매장량을 자랑하는 볼리비아의 모랄레스도 차베스의 지지를 받으며, 최근 가스회사를 국유화했다. 볼리비아는 자국산 가스의 주요 공급국인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에 가격을 일방적으로 책정하겠다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약 60% 인상 요구).

이로써 볼리비아 가스 자원에 투자한 브라질과 스페인 등 여타 국제 기업들은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었고, 이것은 국제적인 분쟁거리가 되고 있다. 언론들은 국익을 앞세워, 경제의 자연 질서를 외면하는 대중적 인기 정책이라고 에보 모랄레스를 비난했다.  멕시코의 한 사회학자는 “남미의 대중주의는 선거를 앞두고 점점 개인적인 인기주의를 띠어가고 있다”라고 진단하며, 위정자들을 인기를 좇는 배우 같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남미의 좌경화 추세는 메르코수르(MERCOSUR·남미공동시장)와 어울려 남미의 막강한 반미 정치 블럭이 형성되는 것처럼 비치기도 했다. 그러나 이같은 남미의 블록화 우려에 대해 ‘아직은 거리가 멀다’는 것이 현지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블록화에 대한 속사정은 복잡해 보인다. 남미 각국 정상들은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무역협정(TLC)과 남미 4개국(브라질·아르헨티나·우루과이·파라과이)으로 형성된 메르코수르를 통해 공동 이익을 모색하고 있으나, 자국의 실리를 앞세워 동상이몽을 꾸고 있기 때문이다. 브라질,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의  기술진이 세 나라 연결 가스관 설치 계획(우고 차베스가 제안)을 점검하고 있을 당시, 우고 차베스의 동지처럼 보였던 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는 떫은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는 유가 상승으로 힘을 받아 남미 단합을 외치며 열강과 대치하고 있다. ‘가만히 있어도 대국은 대국’이라 외친다. 브라질의 룰라 다 실바는 다른 남미 나라를 항상 한 수 아래로 본다. 아르헨티나의 형제국이라면서도 우루과이의 타바레스는 환경 오염 문제로 맞붙고 있다. 한술 더 떠 칠레는 또 어떤가. 라틴 색을 잃지 않으면서도 미국과 우호적으로 지내며 실리는 좇고 있다.
 
이렇게 각국은 모두 안으로 많은 문제를 안고 좌충우돌하고 있으며, 아직은 경제 현실에 얽매어 다른 나라 사정을 돌볼 여유가 없다. 따라서 남미가 좌경 일색이 된다고 해서 ‘강고한 좌익 전선’이 형성되리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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