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 게바라, 어떻게 왜곡됐나
  • 이문재 (시인) ()
  • 승인 2006.05.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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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일의 책] <내가 춤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다>/대기업 등에 의해 변형된 실체 복원

 
영화 <동갑내기 과외하기>에 체 게바라가 나온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문제 학생, 조폭 아버지의 아들인 남자 주인공의 방에 등장한다. 침대 위 벽에 아주 작은 액자가 걸려 있는데, 거기 체 게바라 사진이 들어 있다. 이 로맨스 코미디와 체 게바라는 과연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라는 질문은 부질없어 보인다. 체 게바라는 실존했던 혁명가가 아니라 낭만적 남성성을 발산하는 이미지로 둔갑해 있기 때문이다. 기의를 삼켜버린, 기의와 무관한 기표들이 둥둥 떠다닌다. 아니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소비된다.

최근에 발간된 최세진씨의 <내가 춤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다!>(메이데이)는 한국 사회 곳곳에 걸려 있는 체 게바라 사진들을 하나하나 관찰하며, 체 게바라의 실체를 복원하는 문화 비평이다. ‘감춰진 것들과 좌파의 상상력’이란 부제가 말해주듯, ‘자유롭고 불순한’ 좌파적 문제 의식으로 대기업과 미디어에 의해 왜곡된 사실들을 밝혀낸다. ‘~습니다’ 체와 관련한 사진을 곁들이며, 알기 쉽고 친절하고 즐겁게 사이버 공간과 대중문화의 속내를 들추어낸다.

저자 최세진씨에 대한 소개는 간략하다. ‘1996년부터 2005년까지 민주노총 정보통신부장으로 일했다. 남미의 혁명을 보기 위해 베네수엘라의 빈민가에 머무른 뒤 현재 민주노총을 그만두고 (캐나다)토론토에서 다시 남미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가 전부다. 책을 따라가다 보면, 최씨는 1980년대 중·후반 불교 재단에서 운영하는 대학을 다녔고, 1990년대 초반 군복무를 마쳤다.

책 제목은 20세기 초, 미국에서 활동한 유명한 혁명가이자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이며, 작가이자 편집자였던 에마 골드먼(1869~1940)의 발언에서 따온 것이다. “만일 내가 춤출 수 없다면, 그건 내 혁명이 아니다.” 혁명과 함께 춤을! 자발적으로 자기화(내면화)할 수 없는 혁명은 진정한 혁명이 아니라는 메시지는 한 세기가 지난 지금 들어도 새삼스럽다. 아니 지금 울림이 더 크다.

<내가 춤출 수 없다면…>은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자본주의의 ‘던적스러운 욕망’의 손을 잡고 춤을 춘다. 셸 위 댄스? 하지만 한 손으로는 대중 소비 사회의 엉덩이를 들추고, 한쪽 다리로는 정보화 사회의 하체를 호미걸이로 넘어뜨린다. 위 셸 댄스! 책은 모두 4부로 나누었는데, 1부에서 게임과 SF·해킹 등에 잠복해 있는 이데올로기의 작동 기제를 해부하고, 2부에서는 한국 사회에 잘못 알려진 사회주의권 예술가들의 진면목을 복원한다. 3부에서 체 게바라 사진에 얽힌 비화와 남미 민중 가요에 담겨 있는 좌절과 희망을 소개한 다음, 4부에서는 오프라인과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는, 평등하지 않고 민주적이지도 않은 인터넷 공간을 탐사한다.

체 게바라 사진 유포 과정, 어처구니없어

이 책에서 내 눈길을 오래 붙잡은 지면은 2부와 3부였다. 바그너, 마야코프스키, 조지 오웰, 피카소, 미야자키 하야오, 첨바왐바 등 우리에게 낯익은 예술가들의 ‘맨얼굴’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1969년 크레파스 ‘피카소 파스’를 만든 학용품 회사 대표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사건은, 한국의 군사 정권이 피카소를 비롯한 예술가들을 얼마나 왜곡했는지를 환기시키는 블랙 코미디다.

 
슬프기까지 한 희극은 국내에서만 벌어진 것은 아니다. 체 게바라의 사진이 전세계로 유통된 경위도 어처구니가 없다. 체 게바라의 사진은, 쿠바 신문 <혁명>의 사진기자 알베르토 코르다가 찍은 것인데, 7년 동안 그의 방에 묵혀 있었다. 1967년, 이 사진을 이탈리아 저널리스트가 발견하고 코르다의 허락을 받고 가져갔는데, 그로부터 몇 달 후 체 게바라가 체포되어 총살당하자, 이 사진이 포스터로 만들어져 이탈리아 전역에 뿌려졌다.

그런데 2000년 영국의 한 보드카 회사에서 체 게바라 사진을 광고에 사용했다. 그동안 체 게바라의 사진이 전세계로 퍼지는 것을 보고, 체 게바라의 정신이 확산되는 것이라며 저작권을 요구하지 않았던 코르다가 이번에는 발끈했다. “체 게바라에 대한 불멸의 기억에 술을 연관시키지 말라”라며 소송을 걸었고, 결국 보드카 회사는 5만 달러를 내야 했다.

이같은 판례를 아는지 모르는지 한국의 한 맥주 회사가 지난해 2월 체 게바라를 광고 모델로 내세웠다. 그때 체 게바라 사진 바로 옆에 달아놓은 광고 카피가 “진한 남자가 세상을 지배한다”였다.

한국에서는 반공 소설 작가로 잘못 알려진 조지 오웰은 <동물농장>에서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 평등하다’라고 썼다. 우리는 어떤 동물인가? 이 책과 함께 춤을 추다 보면, 우리가 어떤 농장에서, 과연 어떤 동물로 살아가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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