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배가 ‘대권 보약’ 될 것인가
  • 고제규 기자 (unjusa@sisapress.com)
  • 승인 2006.06.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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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우리당 비대위원장, 통합 ·성찰·소통의 리더십으로 ‘당심·민심’ 잡기 나서

 
또 선수 교체다. 2003년 창당 이래, 열린우리당은 대표 선수를 아홉 번째 교체했다. 이번 대표 선수는 ‘생각하는 축구’를 중요시하는 김근태 의원(GT)이다.

정동영 전 의장(DY)과 투톱을 형성했던 김의원이 원톱으로 나섰다. 아홉 번째 대표 선수지만, 이전의 의장이나 비상대책위원장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우상호 대변인은 ‘비상대권’이라고 표현했다.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에 당헌·당규 개정을 포함해 사실상 전권이 주어졌다. 그 위원장을 GT가 맡은 것이다.

차기 대권주자로서 비대위원장 수락은 그에게 기회이자 위기다.  “독배라도 마다하지 않겠다”라는 그의 말에도 이런 고뇌가 담겨 있다.

먼저 대표 선수로 나선 것 자체가 GT에게는 기회라는 데 이견이 없다. 1995년 정치권에 입문한 이후, 그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적이 별로 없었다. 민주당 부총재,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 등 그는 만년 2등이었다. 지난 2월16일 열린우리당 전당대회 때도 그는 ‘예상대로’ 정동영 전  의장에게 뒤졌다. 그런 그에게 이번에는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을 수 있는 역할이 주어진 것이다.

정치컨설팅 회사인 민기획 박성민 대표는 “1~2% 지지율을 얻는 대권후보는 잃을 것이 없다. 잃을 것이 없으니, 언제든지 승부수를 던져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국민에게 김근태의 진면목을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라고 말했다.

열린우리당이 처한 상황도 그에게는 기회일 수 있다. 바닥까지 떨어진 열린우리당의 지지율이 김근태 비대위원장에게는 오히려 득이 된다는 의미다. 한 여론조사 전문가는 “열린우리당은 무엇을 해도 지지율이 더 빠질 수 없다. 오를 일만 남았는데, 그 열매를 GT가 가져갈 수 있다”라고 말했다.

참모들은 과실을 따기 위한 복안을 마련했다. ‘GT의 세 가지 리더십’을 보여줄 작정이다. 참모진의 구상에 따르면, 김근태 비대위원장의 첫 행보는 낙선자를 만나 위로하는 것이다. 당내 의원들도 두루 만날 예정이다. 김근태 식 통합의 리더십을 본격화하겠다는 의미이다. GT의 한 측근은 “당이 깨지느냐 마느냐 하는 판이기 때문에 당을 통합하는 것이 급선무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노선, 계파, 지역에 따른 분열상을 하나로 묶어내지 못하면 공중분해될 수도 있다는 우려감이 당 안에 상당히 퍼져 있다. 

정동영계도 비슷한 걱정을 하고 있다. DY계로 통하는 정청래 의원이 “추락하는 비행기에서 우선 랜딩 기어를 잡아야 한다”라며 김근태 비대위원장에 힘을 실어줄 것도 이 때문이다.

비대위원장 인선 과정에서 드러난 ‘김근태 비토론’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GT는 우선  통합의 리더십을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좌파 이미지라서 안 된다’(장복심 의원), ‘특정 계파 주자는 곤란하다’(조경태 의원), ‘통합적인 인물이 위원장이 되어야 한다’(유재건 의원) 등 그를 향한 쓴소리가 쏟아진 마당이라, 김두관 전 최고위원이 바라듯 개혁의 리더십을 전면에 내세우기 어려운 상황이다.

통합의 리더십을 발휘하면서 동시에 김근태 식 성찰의 리더십도 보여주는 것이 두 번째 복안이다. 당내 인사뿐 아니라 시민사회 원로들을 만나면서 당 밖의 쓴소리를 들을 작정이다. ‘김진지’라는 애칭에 걸맞게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라 진정성 있는 성찰의 자세를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당심을 추스른 다음에 김의원측이 민심을 얻기 위해 내놓을 회심의 카드는 소통의 리더십이다. GT의 싱크탱크 역할을 하고 있는 한반도재단의 문용식 사무총장은 “열린우리당이 국민으로부터 외면받는 이유는 무능력한 데다, 말만 많고, 게다가 우리들끼리 싸움까지 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국민에게 김근태 진면목 알릴 절호의 기회”

이를 위해 GT측은 당을 팀 체제로 전환하는 것도 검토 중이다.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예컨대 일자리 창출팀, 양극화 해소팀, 부동산 대책팀 등을 만들어 피부에 와닿는 정책을 생산하겠다는 것이다. 문희상 비대위원장이나 정동영 의장의 ‘현장 속으로’나 ‘정책투어’처럼 알맹이 없는 이벤트 정치와 달리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겠다는 것이 측근들의 복안이다. ‘일하는 당’으로 체질을 개선하는 과정에서 강금실 또는 진대제 카드를 활용할 수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정치권의 지각변동이 점쳐지는 상황도 GT에게는 불리하지 않다. 장기적으로 지각변동의 중심축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2월 김근태 의원은 정동영 전 의장의 ‘자강론’에 맞서 ‘연합론’을 주장했다. 물론 “지금은 당을 살리는 것 외에 연합론이고 대권이고 뭐고 생각할 틈이 없다”라고 말하는 ‘리틀 김근태’ 이인영 의원의 말처럼, 당장 GT가 지각변동의 진원지가 될 가능성은 낮다.

하지만 그의 임기가 내년 2월까지라는 점을 감안하면, 상황에 따라서는 GT가 지각변동의 중심축이 될 수도 있다.
이렇게 GT측의 계획대로 통합적이고 성찰적이며 소통하는 리더십을 발휘해 GT가 당을 일으켜 세운다면, 아마도 그가 들이켜는 독배는 대권 보약이 될 것이다.  

하지만 기회 뒤에 가린 어두운 함정 또한 넓고 깊다는 것이 참모들의 생각이다. 실제로 참모들 상당수는 당초 GT가 백의종군하기를 바랐다. DY와 함께 동반 사퇴하고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낫다고 보았다. 한 측근은 “대권주자 김근태만 놓고 보면 의장 승계든 비대위원장이든 맡아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측근은 “권한이 막강하다고 하지만 비대위원장이나 의장이나 오십보 백보다”라고 말했다. 잃을 것이 없어서 기회로 볼 수 있지만, 반대로 얻을 것이 없기 때문에 위기로 본 것이다. 

GT가 비대위원장을 맡더라도 얻을 게 없다는 근거는 열린우리당의 다양한 스펙트럼 때문이다. 당의장을 맡은 DY를 향해 개혁파 그룹인 참정연이 각을 세웠듯, 이번에는 실용파들이 GT를 향해 각을 세울 것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나 부동산 등 산적한 현안도 개혁과 실용 논쟁의 뇌관이 될 가능성이 크다.

실용파·DY계와 치고받을 수도

비대위 인선 과정에서 양측의 신경전은 이미 시작되었다. 실용파 의원들은 비대위원장과 손발을 맞출 비대위원 선정 기준을 두고 ‘균형’과 ‘견제’를 강조하기도 했다. GT측에서는 당연히 일하는 비대위원장이 아니라, 손발을 묶는 바지 사장을 만들려고 한다며 반발했다. GT측 한 관계자는 “DY 쪽이 도와주는 척 하면서 견제하는 이중 플레이를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노무현 대통령과 관계 설정도 GT가 직면한 과제다. 당장 진행되고 있는 자유무역협정 협상을 놓고 보더라도 GT는 다른 목소리를 낼 가능성이 높다. 이미 그는 “국가의 백년대계를 준비 없이 밀어붙인다” “참여정부가 ‘제2의 외환위기의 대리인이 되었다는 비판은 받지 말아야 한다’라며 노대통령의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비판한 바 있다.

하지만 비대위원장 김근태로서 계급장을 떼고 노대통령과 각을 세울 수 없는 처지다. 현실적으로 그렇다. DY 쪽 관계자는 “노대통령과 각을 세우는 문제는 우리도 고민했다. 그러나 DY와 GT 지지율을 모두 합쳐도 대통령 지지율 절반도 안 되는 현실에서 쉽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언뜻 보면 할 일이 많아 보이지만, 이렇게 그를 둘러싼 당 안팎의 상황은 녹록지 않아 보인다. 한반도재단 문용식 사무처장은 “이런 난국을 푸는 게 바로 정치력이다. 위기의 순간에 김근태의 리더십이 빛을 발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7월26일 예정된 네 곳의 재·보선은 이런 GT 처지에서 보면 위기 축에도 들지 않는다. 어차피 승리한다는 기대치가 낮고, 성북을 제외한 부천·송파·마산 등은 원래 한나라당 몫이었기 때문이다.

1995년, ‘마지막 재야’에서 ‘제도 정치권’으로 그라운드를 옮긴 김근태. 그가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인 축구에 빗대면, 처음으로 그는 대표 공격수로 나선 셈이다. ‘한 박자 늦다’ ‘뒷북이다’라며 귀가 따갑게 들어온 김근태의 고질병인 문전 처리 미숙을 이번에도 반복한다면 그는  벤치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멋진 골을 넣는다면, 그는 확실한 대권 조커로 떠오를 수 있다. 정치 인생을 좌우할 김근태 선수의 도전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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