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 이 월드컵을 안 보는 특별한 이유
  • 신호철 기자 (eco@sisapress.com)
  • 승인 2006.06.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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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계·시민 단체 등에서 ‘과열’ 비판 목소리 솔솔…“자본·미디어가 띄우는 열풍은 싫다”

 
서울 남대문 태평로에서 광화문 세종로에 이르는 1.5Km 구간은 그야말로 ‘월드컵 존’이다. 서울시청 정면을 비롯해 동아일보·교보생명 등 주요 빌딩 벽면은 이영표·박지성 선수 등 월드컵 출전 선수 얼굴이 그려진 초대형 걸개그림으로 도배되어 있다. 얼마나 규모가 큰지 동아일보 걸개그림은 빌딩 3층에서 20층까지 가릴 정도다. 걸개그림 옆·아래에는 ‘우리는 대한민국입니다’ ‘한마음 한목소리 승리를 향하여’ 등의 문구가 적힌 대형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이천수·박주영 선수 등을 닮은 대표선수 인형이나 월드컵을 주제로 한 조형물도 거리 곳곳에 전시되어 있다. 월드컵 개최국 독일에서도 쉽게 찾을 수 없는 풍경이다.

이 월드컵 존에 지난 6월6일 새벽 작은 반란이 일었다. 일단의 시민운동가들이 반(反)월드컵 스티커를 광화문 일대에 붙인 것이다. 스티커에 담긴 문구는 ‘대한민국은 지금 월드컵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나요?’ ‘월드컵 보러 집 나간 정치적 이성을 찾습니다’ ‘나의 열정을 이용하려는 너의 월드컵에 반대한다’ 등이었다. 이날 0시부터 새벽 4시까지 활동가들은 월드컵 거리 전시물을 비롯해 버스 정류장과 지하철 담벼락 계단 등에 스티커를 붙였다. 경비업체 직원을 피해 슬쩍 스티커를 붙이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과 승강이를 벌이기도 했다.

“한국 사회, 월드컵에 끌려가고 있다”

이날 스티커 붙이기에 나선 사람들은 문화연대를 중심으로 한 시민활동가들이었다. 이들은 3개 조로 나뉘어 광화문뿐 아니라 종로· 대학로· 신촌 일대에도 스티커 7천 장을 뿌렸다.  ‘게릴라 문화활동’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날 작전은 시민들에게 월드컵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알리는 데 목적이 있다. 활동가 중의 한 명인 문화연대 김완씨는 6월2일 블로그(blog.jinbo.net/beyondtheworldcup)를 통해 “한국 사회는 지금 월드컵 이외의 것들에 관심을 보이지 않고, 축구 이외의 것들에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고 않고 있습니다. 자본의 적극적인 개입, 미디어의 광기, 월드컵을 활용하려는 정부의 의도 등 2006년 독일월드컵을 10여 일 앞둔 지금 월드컵은 한국 사회에 거대한 재앙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습니다”라고 썼다.

지난 10일 독일월드컵이 개막하면서 축구 응원 열기가 최고조에 달하고 있지만 한편에서는 과도한 월드컵 광풍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다. 비록 아직은 소수지만 학계·문화계·시민단체를 중심으로 퍼져가고 있다.

지난 5월15일 배대재 학술지원센터에서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정세와 월드컵의 문화정치’라는 제목의 정책 포럼이 열렸다. 이 포럼에서 정희준 동아대 교수는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 본 협상을 눈앞에 둔 한국 사회는 지금 월드컵에 끌려다니고 있다. 국민은 스포츠가 키워놓은 국가주의와 월드컵의 위력에 눌려 자유무역협정의 실상은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자유무역협정에 찬성하고 있는 안타까운 상황이다”라고 진단했다. 정교수는 현재의 월드컵 분위기를 “스포츠, 자본, 미디어가 형성한 삼자 동맹이 맹위를 떨치는 가운데 한국 사회는 ‘불 꺼진 사회(black-out society)가 될 위기에 처했다”라고 비판했다. 

극장 <나무와 물> 대표인 김성수씨도 월드컵 바람을 걱정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김씨는 2002년 한·일 월드컵 때는 여느 시민과 마찬가지로 한 명의 ‘붉은악마’였다. 당시 연극  공연 일정도 잡지 않았고 대학로에 나가 응원에 참가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2006년 계획은 다르다. 김씨는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연극 공연을 강행할 뿐 아니라 한국 경기 때 대학로나 시청 광장에 나가 응원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김씨는 2002년과 2006년이 다르다고 말한다. “적어도 2002년은 정부나 기업에서 바람을 넣은 것이 아니라 시민 스스로 공간을 만들고 나갔다. 누가 광화문이 응원 중심지가  될 줄 알았나. 자발적으로 광장에 걸어 나갔고 공동체 유대감을 느꼈다. 이후 촛불시위 문화로 발전했다.” 하지만 지금은 동질감도 없고 자발성도 없다는 것이 김씨의 생각이다. “최근 평가전 때 시청 앞에서 응원하던 사람들이 쓰레기를 치우지 않고 그냥 갔다. 왜냐하면 주최가 모 기업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주최 쪽에서 치워줄 것으로 기대한 것이다. 자발적인 행사가 아니기 때문에 책임감이 없다.”

요즘 연극계는 월드컵을 맞아 비상이 걸렸다. 2002년 월드컵 때 파리를 날렸던 악몽을 잊지 못한다. 올해는 축구가 한국 시각으로 밤에 열리지만 사정은 비슷하다. 4월19일부터 6월18일까지 <뮤지컬 우리동네>를 공연 중인 김성수씨는 “오후 10시에 열린 가나 평가전 때 평소 관객의 절반밖에 들지 않았다. 일찍 귀가하는 사람이 많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대학로 연극계는 ‘백만원연극공동체’처럼 꿋꿋하게 정면 승부하는 연극인이 많다고 한다. 일부 연출가 중에는 TV 시청을 안 한다는 사람도 있다.

“자발적인 열광까지 비난하는 것 아니다”

2002년 월드컵을 공동 개최했던 일본은 연극계가 불황을 전혀 겪지 않았다고 한다. 교도뉴스 서울 주재 사무소의 한 일본인 기자에게 양국의 월드컵 문화를 비교해달라고 묻자 그는  “일본에는 4년 전이나 지금이나 월드컵 열기가 한국처럼 광적이지 않다. 한국인들은 월드컵 그 자체를 즐기기보다는 승부에 집착하는 것 같다. 만약 일본과 영국이 월드컵 본선에서 만난다면, 프리미어리그 팬들 중에는 영국을 응원하는 일본인도 있을 것이다”라고 답했다.

전규찬 한국종합예술원 영상원 방송영상과 교수는 ‘한국 국민 사이에 월드컵 열풍이 불고 있다’는 전제 자체에 대해서도 생각을 달리한다. 그는 “이미 지금 한국에는 2002년과 같은 뜨거운 시민의 열정이 없다. 그럼에도 마치 외양상 월드컵 열풍이 뜨거운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방송과 기업의 부추김 때문이다”라고 진단한다. 전교수는 “2002년에는 안티 월드컵이라는 말만 꺼내도 집단 이지메를 당할 분위기였다. 하지만 지금은 문화연대의 게릴라 활동을 지지하는 사람이 꽤 많다. 차츰 생각이 바뀌고 있다. 그런데도 기업과 방송은 억지로 2002년으로 시계 초침을 돌리려고 한다. TV를 보면 방송 프로그램과 광고가 월드컵 일색이다. 이게 강요된 열풍이기 때문에 시민들은 억지스럽고 불편하게 느낀다”라고 말했다.

학계에서는 방송사와 기업들이 이번 월드컵을 신기술 실험장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의견도 있다. 디지털 멀티미디어 브로드캐스팅(DMB)이나 다채널방송(MMS) 등 기술적 진보를 시험하고 싶은 방송계와 ‘2002년 마케팅 학습 효과’에 빠진 통신업계의 합작품이라는 것이다.

월드컵을 반대하는 목소리는 아직 대중적 흐름을 타지 못하고 있다. 6월6일 뿌려진 반월드컵 스티커들은 구청과 인근 빌딩 직원들이 금세 거둬갔다. 다음카페 등에는 ‘안티 월드컵 모임’ ‘시청에서 응원 안하기 모임’ 등이 있지만 회원 수는 1백여 명에 불과하다. 동아일보는 6월8일자 기사에서 “대∼한민국 외치면 이성 없는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문화게릴라 활동을 비판하는 기사를 싣기도 했다. 광화문에 위치한 동아일보사는 스티커 부착 운동으로 피해를 많이 본 회사이기도 하다.
한편 문화게릴라 활동을 벌이는 시민단체 회원들은 “월드컵 그 자체를 반대하거나, 자발적인 열정까지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다. 월드첩 열광에 가려진 이면을 보려는 것뿐이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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