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쾌한 승부사의 명쾌하지 않은 승부
  • 김봉석 (영화평론가) ()
  • 승인 2006.06.30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강우석 감독 <한반도>, 스케일 크나 논리적 완성도 떨어져
 
몇 년 전 한 영화 잡지에서는 강우석 감독에게 ‘과욕의 승부사’라는 별명을 달아주었다. <투캅스>와 <마누라 죽이기> 등의 흥행 영화 감독으로 이름을 날리던 강우석은 어느 순간 시네마서비스라는 회사를 설립하여 제작과 배급, 심지어 극장 사업에까지 뛰어들었다. 모두 ‘과욕’이라고 생각했지만, 강우석은 대기업과 직배사간의 싸움에서 당당하게 승리했다. 그리고 다시 감독으로서 장르 영화의 걸작 <공공의 적>과 천만 관객이 본 <실미도>를 만들었다.

제대로 하나만 하기도 힘든 한국 영화계에서, 강우석은 첩첩산중의 요새에 돈키호테처럼 돌진하여 결국 함락에 성공한 맹장이었다. 물론 그에게는 커다란 실패도 있었다. <생과부 위자료 청구 소송> 등의 실패작이 있고, 한국 영화계의 메이저가 될 것 같았던 시네마서비스는 여러 번 휘청거리다가 결국 CJ엔터테인먼트의 지원을 받고 기사회생했다. 최근 강우석은 KnJ 엔터테인먼트에서 연출에만 전념하겠다고 선언했다.

강우석의 승부사 기질은 연출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는 자신을 흥행 감독으로 부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항상 관객을 염두에 두고 작업을 한다. 지금 관객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그 다음에 관객을 어떻게 웃기고 울릴 것인지를 고민한다. 그건 이른바 ‘작가’로 불리는 박찬욱, 김지운, 봉준호감독의 영화들과는 상당히 다르다. 그들은 지금 관객이 무엇을 좋아하고 즐길 것인가 생각하기 전에, 그들의 머리와 마음속에 있는 것을 끄집어낸다. 그리고 관객이 호응할 수 있도록 다듬고 또 다듬는다. 하지만 강우석은 관객이 우선이다. 그것이 선을 긋듯 분명하게 갈리지는 않지만, 강우석의 영화는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지는 오락 영화의 연장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능숙한 숙련도로 잘 만들어진 대중 영화. 강우석은 관객과의 승부를 즐기고, 최우선으로 삼는 감독이다.

관객 우선주의 제작으로 흥행작 연발

그렇다고 강우석을 ‘대중 추수’적인 감독이라고 할 수만은 없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미스터 맘마> <투캅스> 같은 강우석의 흥행작을 대부분 보았다 해도, <나는 날마다 일어선다>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를 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강우석의 데뷔작 <달콤한 신부들>은 농촌에서 올라온 총각들이 신부감을 구하는 내용의, 80년대판 <나의 결혼원정기> 같은 작품이다. 실업자 문제를 코믹하게 그린 <나는 날마다 일어선다>, 본격적인 정치 영화라 할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 등은 모두 사회 이슈를 정면에서 다루었다. 흥행작인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에서도 교육 문제를 <투캅스>에서도 말단 권력의 부패 등을 다루면서 언제나 강우석은 사회적 발언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다면 강우석이 하고 싶은 말은 도대체 무엇일까?

 
<생과부 위자료 청구 소송> 이후 3년 만에 감독으로 돌아온 강우석은, 그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공공의 적>을 만든다. 강철중이라는 매력적인 캐릭터를 창조한 <공공의 적>은 강우석의 한국 사회 비판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강철중은 마약범에게 마약을 빼앗아 팔고, 노점상에게 용돈을 받아 쓰는 악덕 경찰이다. 그런데 부모를 죽인 펀드 매니저 조규환을 만나면서 생각이 바뀐다. 강철중은 세상이 악의 구렁텅이이고, 자기도 어우렁더우렁 함께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진짜 악, 한국 사회의 상층에서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면서 부도덕하기까지 한 인간들을 도저히 그냥 볼 수가 없다. 그래서 치받아버린다. 권력과 시스템을 조롱하며 단순한 폭력으로 박살내버린다. 그런 카타르시스는 <주유소 습격사건>에서 무정부주의적인 폭력의 축제와는 조금 다르다. 강철중은 이 사회의 엘리트들을 직접 공격한다. 주먹으로 얼굴을 박살내버린다. 그것이 바로 ‘먹물’들을 지독히 싫어하는 강우석의 방식이다.

그런데 강우석의 권력, 엘리트 비판은 <실미도>에서 묘하게 비틀린다. 71년 북파 특수부대의 탈영과 자폭 사건을 기초로 만들어진 <실미도>는 국가에 의한 범죄를 강력히 규탄한다. 권력과 군 상층부의 이른바 ‘정치적’ 판단이나 자리 다툼 등으로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람들을 추모한다. 실미도 사건의 비극은, 독재 정권에서 저지른 비인간적인 인권 침해에 본질이 있다.

그런데 묘하게도 <실미도>를 보고 난 많은 사람은, 그들이 북으로 갔어야 한다, 고 말한다. 그들이 북으로 공작을 하러 갔다면 별다른 문제없이 원만히 해결되었으리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다른 북파 공작원들의 현재에서 알 수 있다. 하지만 강우석은 실미도 사건을, 단지 희생자라는 처지에서만 바라본다. 정치 놀음에 희생된 못 배운 백성들이라는 시각이다.
 

곳곳에서 허점 드러낸 ‘정면 승부’

전형적인 인물도 만든다. 교관 중 하나는 대학을 나오고 언제나 친절하며 공작원들의 고통을 감싸주려는 인물이다. 다른 교관은 잔인할 정도로 원칙을 준수하며 훈련에 따라오지 못하면 폭력을 휘두른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 즉 공작원들을 죽이라는 명령이 내려지자 교관들의 태도는 정반대가 된다. 다정하던 교관은 명령을 따라야 한다며 총을 들고, 폭력적인 교관은 어떻게 저들을 죽일 수 있냐고 대든다. 먹물인 교관은, 단지 자신을 잘 보이기 위해,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동정을 베풀었을 뿐이다. 진정으로 그들을, 그들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겨야 할 때 그는 배신한다. 그것이 강우석이 바라보는 먹물의 본질이다. 그런 먹물들 때문에 한국 사회의 모순이 극심해졌다고 생각한다.

너무 단순하다. 강우석의 현실 인식은, 인민주의적 세계관에 기초한다고 할 수 있다. 현실의 논리를 정확히 파악하기보다는, 민중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세계와 모순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공격하는 정도다. <실미도>는 무척 사실적이고 희생자들의 슬픔에 공감할 수 있음에도, 어딘가 초점이 빗나가 있다.

<공공의 적>이 정말 재미있으면서도 공감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강철중이라는 인물이 사회질서 수호 같은 데 별 관심이 없지만, 어쨌거나 동물적인 감각으로 ‘인간이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한 자들을 골라내 반쯤 죽여버리기 때문이다. 강철중이 갑자기 사회의 정의가 어쩌고, 시스템이 어쩌고 떠들어대면, 순식간에 분위기가 썰렁해질 것이다. <실미도>는 개인적이고 즉물적으로 부딪치는 <공공의 적>과는 다르다. <실미도>는 개인의 감정에서는 충분히 동조할 수 있지만, 정치적으로는 무척 곤란한 자중지란에 빠져 있는 영화다.

어쩌면 문제는 <실미도>인지도 모른다. <실미도>가 1천만 관객을 돌파했기 때문에, 강우석 감독은 자신 있게 <한반도>에 도전했을 것이다. <한반도>는 <실미도>보다 더욱 복잡한 정치적 상황에 놓인 사람들의 운명을 그리고 있다. 전세계와 동북아 정세, 한·미·일의 역사적 관계 등 고려해야 할 점이 많기도 하거니와 정확한 시각을 잡는 것부터가 쉽지 않다. 하지만 강우석은 자신의 스타일대로, 정면으로 거칠게 밀어붙인다.

일단 영화의 기본 설정인, 일본이 경의선의 권리를 주장한다는 것부터가 애매하다. 패전국 일본이, 과거 대한제국과 맺은 모든 조약은 이미 파기된 것이 정설이다. 모호한 설정을 그냥 넘어간다 해도, 정부 내의 분열은 어설프다. 대통령은 일본의 거짓 주장을 세계 법정에 세우겠다는 생각이고, 국무총리는 현실 여건상 받아들이자고 주장한다.

그런데 어느 것도 명확한 논리가 없다. 대통령이 가지고 있는 계획은 민족주의이므로 정서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반면 국무총리의 생각은 이른바 현실론이니 더욱 논리적인 근거가 있어야 한다. 일본에 여러 모로 종속되어 있으니 그들의 요구를 따라야 한다는 주장은, 아무도 설득할 수 없을 만큼 너무나 허약하다. 그리고 국무총리 등 현실파를 영화적으로 을사오적과 동일시하면서, 논리가 아니라 감정적인 적대감으로 몰아간다. 영화에서 그들은 단지 매국노일 뿐이다.

그러나 현실은 복잡하다. 역사적으로만 봐도, 일본을 증오하던 이승만은 친일파 청산을 거부했고, 민족과 국가를 절대 명제로 내세운 박정희는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통해 일본의 망언과 뻔뻔함이 지속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한반도>는 단순하게 친일은 악, 민족주의는 선이라는 이분법을 내세우면서 관객을 가르치려 든다. 민족주의가 극우파의 애용품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한다. <한반도>의 문제 제기는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이 영화적 실패를 가릴 수는 없다. 강우석은 다시 <공공의 적>의 단순하고 우직하면서도 명쾌한, 달변이 아니라 주먹으로 승부를 보는 장르 영화로 돌아가야 한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