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이는 헤깝아서 어데 대통령 되겠나?"
  • 고재열 기자 (scoop@sisapress.com)
  • 승인 2006.07.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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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경북지역, 정권 탈환 기대 '활활'...박근혜 대세론이 주류

경북대학교 응용화학과 3학년인 박인호군은 지난 5·31 지방선거 전날 아버지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아부지 밥줄 끊지 마래이”라는 내용이었다. 대구에서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아버지는 지역 경제 발전을 위해 한나라당에 투표할 것을 종용했다. 박씨는 “친구들 중에도 ‘주는 만큼 받는 것이 정치다. 우리 지역 사람을 뽑아줘야 돌려받을 수 있다’라며 TK 정서를 드러내는 경우가 있다”라고 말했다.

경북대 학생들의 이런 성향은 지난 지방선거 전 <경북대 신문>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경북대생 4백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한나라당 지지율이 21.8%로 민주노동당(11.3%)이나 열린우리당(8.8%)보다 두 배 이상 높았다. ‘지지 정당이 없다’는 비율이 56.5%로 가장 높았지만 실제 면접 조사를 해보면 “지지하는 정당은 없지만 투표를 하게 되면 한나라당을 택할 것이다”라는 답이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진보적이라고 생각했던 대학생들마저 한나라당 지지 일색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자 학보사 기자들은 충격을 받았다.  

이 지역 출신인 강재섭 의원이 한나라당 대표로 당선되면서 대구·경북(TK) 지역 사람들은 다시금 정치 바람에 들떠 있다. ‘대권 주자도, 대표도 모두 TK 출신이니 TK가 앞장서서 정권을 되찾아오자’는 ‘TK 대망론’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다. ‘보수 병참기지’를 벗어나 정권 탈환을 위한 전략사령부로 거듭나자는 것이다.

이 때문에 5-31 지방선거 이후 열린우리당 대구시당은 비상이 걸렸다. 총선과 재·보선을 거치면서 어느 정도 입지를 확보했다고 자신했는데, 다시 뒷걸음치고 있기 때문이다. 현 정부 실세로 통하는 이강철 대통령 정무특보가 ‘지역개발론’을 내세워 선전할 때만 하더라도 조금이나마 여지가 보였지만 ‘TK 대망론’이라는 블랙홀에 모든 이슈가 빨려들고 있다는 것이 여권의 하소연이다. 당의 한 관계자는 “이제 지역개발론을 얘기해도 ‘치아 뿌라’라며 말을 잘라버린다. 이번에는 아예 대통령을 만들겠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반면 한나라당 대구시당은 한껏 고무되어 있다. 대구시당 사무실에서 만난 한 당직자는 “이번에는 짜낼 때까지 다 짜내야 한다”라고 말했다. 1997년과 2002년 대선에서 진 이유가 표를 확실히 몰아주지 못해서라며 내년 대선에서는 80% 지지율을 넘겨야 한다는 것이다. 이 당직자는 “30만~40만표 차이 정도는 TK 몰표로도 극복할 수 있다. TK만 뭉치면 정권 되찾아올 수 있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대선에 대한 TK 지역의 정서는 독특하다. TK에서 정권은 단순히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되찾아오는 것’이다. 정권은 원래 TK 것이었다는 것이다. 또 한나라당은 ‘잃어버린 10년’이지만 TK는 ‘잃어버린 15년’이다. TK의 잃어버린 시간은 김영삼 정부까지 소급된다. ‘우리가 남이가’라며 지지를 호소했지만 YS가 권력 핵심에서 민정계를 소외시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선이 아직 1년6개월이나 남았지만 TK 지역의 시계는 1년을 앞서가는 분위기다. 경북일보 박무환 대구본부장은 “박근혜·이명박, 두 대권 주자가 요즘 술자리 안주거리가 되고 있다. 요즘 TK 지역에서는 술자리에서 박근혜 전 대표와 이명박 전 서울시장을 놓고 화력 비교를 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정치의 계절이 시작되었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TK 지역민들은 두 대권 주자 중에서 누구의 화력이 더 낫다고 보는 것일까? 이번 <시사저널> 여론조사에서는 박근혜 전 대표가 49.6%로 37.2%인 이명박 전 서울시장을 앞섰다. 당선 가능성은 51.3% 대 31.9%로 더욱 벌어졌다. 이 수치는 지역 정가의 분석과도 비슷하다. 지역 정가에서는 대체로 박 전 대표가 이 전 시장을 대구에서는 6 대 4 정도, 경북에서는 5.5 대 4.5 정도로 앞서고 있다고 본다.

주목할만한 것은 양적인 측면보다 질적인 측면이다. 한 지역 언론인은 “정치 무관심층보다 정치관심층에서, 일반 주민보다 한나라당 당원 사이에서, 즉 정치 피라미드의 상층부로 올라갈수록 박 전 대표 지지세가 강한 경향이 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매일신문이 TK 지역 지방자치 단체장과 지방의회 의원 등 지난 5·31 지방선거 당선자 4백51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 결과, 전체의 57.9%가 박 전 대표를 지지했고 29.9%가 이 전 시장을 지지했다.

농촌보다는 도시가, 정치 무관심층보다는 정치 관심층이, 비당원보다는 당원이 여론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볼 때, 현재의 판세는 이 전 시장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열린우리당 대구시당 이상호 사무처장은 “열린우리당에서 보기에는 이명박이 위력적이지 박근혜는 그다지 위력적이지 않다. 박 전 대표가 한나라당 후보가 되면 오히려 반 한나라당 연대 구도를 만들기에 좋다. 그런데 이런 부분은 감안하지 않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TK 대망론이 박근혜 대세론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는 것은 이 지역의 독특한 본선 경쟁력 분석법에서도 엿볼 수 있다. 셈법은 이렇다. 한나라당이 국민들의 압도적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에 내년 대선에서는 한나라당 후보가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문제는 후보에게 어떤 흠집이 있느냐는 것인데, 이 점에서 박 전 대표를 내세우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결혼을 안 해서 자식 문제도 없고 재산 문제도 상대적으로 적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매일신문 정치부의 김병구 기자는 “‘이회창 학습 효과’ 때문에 이 전 시장보다 돌발 변수의 소지가 적은 박 전 대표가 낫다고 보는 여론이 있다”라고 말했다. 

지충호 피습 사건과 지방 선거 압승 이후 박 전 대표 지지도가 오른 반면, 서울시 봉헌 발언과 황제 테니스 파문으로 이 전 시장 지지도가 낮아지면서 두 사람에 대한 여론도 급속도로 바뀌었다. 박 전 대표는 이전에는 ‘쓸 수도 있고 버릴 수도 있는 카드’에서 이제 가장 강력한 카드로 부상했다. ‘박근혜로 되겠나’라는 회의론이 지방선거 압승을 거치면서 ‘박근혜면 된다’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박 전 대표를 괴롭히던 리더십 논란도 피습 사건에 의연하게 대처하면서 훌훌 털 게 된 것으로 보인다. 대구에서 만난 한 택시 운전사는 “2년 대표 잘했다 아입니꺼. 그만하면 댕기제. 박정희 딸인데, 마 잘하지 않겠십니꺼”라며 기대감을 표현했다.

이처럼 박 전 대표의 능력과 리더십은 평가절상되고 있는 반면, 이 전 시장은 평가절하되고 있다. 평가절하되는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는 청계천 복원 사업이 문희갑 전 대구시장이 했던 신천 복원 사업을 따라 한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TK 지역에서 ‘반 박근혜’기류는 서서히 옅어지는 양상인 데 반해 ‘반 이명박’은 점점 더 실체를 드러내고 있는 것 역시 이 전 시장으로서 위험 신호다. ‘반 이명박’을 집약하는 말로 지역 주민이 자주 하는 말은 ‘이명박이는 헤깝아서(행실이 가벼워서) 어디 대통령 되겠나?’이다. 이는 황제 테니스 파문이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상대적으로 불교 정서가 강한 TK 지역에서 ‘서울시 봉헌’ 발언 역시 감점 요인이 되었다는 평이다. 

또 한 가지 주목해볼 것은 바로 박 전 대표가 ‘강재섭 효과’를 보고 있다는 것이다. 전당대회가 대리전 구도로 치러지면서 강재섭 대표가 박 대표 쪽이라는 점이 선명해졌다. 경북고와 서울법대를 나온 강대표는 TK 주류를 상징하는 아이콘이다(대구 지역 국회의원 열두명 중에서 여덟명이 경북고 출신이다). TK 지역에서는 이제 강재섭 대표를 ‘TK 꿈나무’에서 고 김윤환 의원과 마찬가지로 ‘킹 메이커’로 인식하고 있다. 대구시의회 정해용 의원은 “박 전 대표를 정계에 입문시킨 것도, 당대표로 만들어준 것도 사실 강대표였다. 두 사람은 이와 잇몸의 관계다”라고 표현했다. 강대표와 박 전 대표의 밀월 관계는 TK 주류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박근혜 승리〓 TK의 승리’가 되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이번에는 박근혜, 다음에는 강재섭’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박 전 대표 세력과 강재섭 대표 세력을 동일시하는 현상이 나타나면서 이 전 시장 쪽은 비주류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사실 포항 동지상고를 졸업한 이 전 시장은 TK 주류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서울시장을 거친 이 전 시장 진영은 서울시 인맥과 고려대 인맥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지역 정치인은 “박 전 대표는 2% 부족하지만 진골은 된다. 왕(박정희)의 딸이니까. 그러나 이 전 시장은 6두품이다. 진골은 왕이 될 수 있지만 6두품은 불가능하다. 그것이 둘의 차이다”라고 말했다.

TK 지역에서 이 전 시장의 세력이 박 전 대표에 아직 미치지 못함을 확인시켜준 결정적 사건이 있었다. 경북도지사 경선에서 포항시장 출신으로 이 전 시장과 가까운 사이로 알려진 정장식 후보가 나섰다가 박 전 대표 측근인 김관용 후보에게 진 것이다. 그런 마당에 대리전 구도로 치러진 당권 경쟁에서 이재오 후보가 패하며 이 전 시장이 한나라당 안에서는 마이너리티라는 인식이 더욱 확산되었다.

주류 TK 세력이 박 전 대표를 밀고 있고, 이 전 시장이 비주류로 전락해 있는 이런 구도는 2002년 새천년민주당의 상황과 비슷하다. 당시 동교동계가 이인제 후보를 지지하고 있었고 노무현 후보는 비주류로 분류되어 있었다. 그러나 노 후보는 동교동계의 아성인 광주에서 이후보를 역전시킴으로써 대 역전극의 서막을 열었다. 과연 이런 역전극이 대구에서도 일어날 수 있을까?

이에 열린우리당 이상호 사무처장은 “거의 가능성이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일단 박사모의 주축이 TK 지역 사람들이다. 결정적으로 TK 지역은 주류 정서가 강하다. ‘이기는 편이 우리 편’인 것이다. 다만 전국적으로 이명박 증후군이 일면 그에 따라 반응할 가능성은 있다”라고 분석했다. 결국 ‘한나라당의 심장’이라 불리는 TK 지역에서 이 전 시장이 적어도 당분간 고전할 전망이다.

그러나 박 전 대표측도 아직 안심하기에는 이르다. 지역 정서가 ‘박근혜를 반드시 대통령으로 만들어야겠다’는 것이라기보다는 ‘이왕 될 한나라당 대통령이면 박근혜가 낫다’는 정도이기 때문이다. 한 지역 언론인은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드는 것보다 정권을 되찾아오는 일이 급선무다. 박근혜 카드로 불안하다는 생각이 들면 미련없이 버릴 것이다”라고 예측했다.

박 전 대표에 대한 지지가 아직 감성적인 차원에 머무르는 것도 한계다. 한 지역 정치인은 “이 전 시장을 싫어하는 이유도 분명하지만 좋아하는 이유도 분명하다. 반면 박 전 대표에 대해서는 싫은 이유도 없지만 좋아하는 이유도 분명치 않다. 박근혜 지지는 감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강금실에 대한 감성적인 지지가 한 순간에 허물어져버렸던 것처럼 거품이 순식간에 꺼질 수 있다”라고 말했다.

최근까지 이 전 시장 진영에서는 TK 지역보다는 호남권과 충청권에 집중했다. 호남이 승부처가 될 것으로 보아 여러 번 찾았고 충청은 행정수도 이전 문제 때문에 잃었던 점수를 만회하기 위해서 심혈을 기울였다. TK 지역은 본격적으로 공략하지 않았다. 그러나 상황이 다급해지자 TK 지역에도 본격적으로 공을 들이고 있다. 박영준 전 서울시 정무국장과 박창달 전 의원이 TK 지역 여론 주도층을 중심으로 조직을 결성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나라당 대구시당 이상학 사무처장은 “아직 본격적인 게임은 시작되지 않았다. 좀더 두고 봐야 판세를 알 수 있다”라고 말했다. 7월21일 이 전 시장은 어머니회 대구시연합 초청으로 ‘환경, 우리의 미래’라는 주제로 강연을 가졌다. TK 민심을 잡기 위한 장도에 나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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