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교사’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다
  • 이문재 (시인) ()
  • 승인 2006.08.04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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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일의 책] <마키아벨리>/<군주론>과 <로마사 논고> 꼼꼼히 비교 분석

 
문제적 텍스트에 대한 문제적 접근. 최근 한국어로 번역 출간된 레오 스트라우스의 <마키아벨리>(함규진 옮김, 구운몽)는 마키아벨리에 대한 오해를 정교한 원전 독해를 통해 하나하나 바로잡는다. 마키아벨리는 극단적 평가를 받아왔다. 한쪽에서는 ‘근대 공화주의자의 선구자’라고 칭송하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서 ‘악의 교사’라고 비난한다. 스트라우스는 찬사와 험담 모두 부정확하다고 지적하면서도, 그 찬사와 비난을 끌어안는다.

예컨대 마키아벨리는 ‘악의 교사’라고 손가락질을 받는데, 바로 그것이 마키아벨리 사상의 진면목을 이해하는 가장 유효한 관점이라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다음과 같이 권유했다. “군주는 빼앗을 땅을 안전하게 지키고 싶다면 이전 지배자의 친족을 남김없이 학살해야 한다.” “벌을 내릴 때는 가차없이 단번에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효과가 없다. 반면 은혜를 베풀 때는 조금씩 조금씩 내줘야만 상대를 감화시킬 수 있다.” 마키아벨리는 분명 목표를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악인이었다.

마키아벨리라는 문제적 텍스트를 새롭게 해석한 레오 스트라우스 역시 문제적이다. 독일 출신 유태인인 스트라우스는 제2차 세계대전 와중에 나치즘의 야만성을 목격한 이후 미국식 민주주의를 옹호하기 시작했다. 1938년 프랑스를 거쳐 미국으로 이주한 그는 시카고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근대와 전근대, 과학과 철학, 정치학과 정치철학의 문제들을 화두로 삼았다. 그는 주류 학자는 아니었지만, 정치철학 영역에서 독보적 성과를 남겼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근대성을 비판하면서 근대 이전의 고대, 정확하게 말하면 ‘고대적 인간(태도)’--세상을 단순하게 살지 않는 사람, 최신 유행 지식의 소비자가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행동방침을 정하는 사람--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 스트라우스의 정치철학이 새삼 주목받는 까닭은 미국의 신보수주의, 즉 네오콘 때문이다. 네오콘의 사상적 대부라고 알려진 어빙 크리스톨, 국방부 차관을 지낸 폴 울포위츠, 국방부 고문을 역임한 리처드 펄 등이 레오 스트라우스의 제자였다. 그래서 네오콘을 ‘레오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군주론>의 모델은 ‘무장한 예언자’ 모세

 
<마키아벨리>는 마키아벨리의 대표적 저작 <군주론>과 <로마사 논고>를 꼼꼼하게 비교 분석한 책이다. 스트라우스는 근대 이전의 관점에서 마키아벨리 사상의 정수로 진입한다. 그리하여 <군주론>은 실제 군주가 아니라, 기독교 세례를 받아 나약해진 당대의 젊은이들을 위해 쓰여진 정치학 개론이며, <로마사 논고>는 기독교와 달리 ‘세상의 영예’를 추구하며 자유를 사랑한 고대, 즉 로마와 같은 호전적 공화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역설한 논문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마키아벨리는 근대가 고대를 전승하지 못한 결정적 걸림돌이 기독교, 즉 ‘무기를 들지 않은 예언자’ 예수라고 지목한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에게 기독교는 반면교사였다. 기독교가 무력을 쓰지 않고 로마제국을 정복했듯이, 마키아벨리도 자신의 사상과 방법론을 통해(전도하듯이) 기독교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군주론>이 모세, 즉 무장한 예언자를 모델로 했다면, <로마사 논고>는 비무장 예언자인 예수를 본보기로 삼았다고 스트라우스는 해석한다.

마키아벨리는 스트라우스의 거울이었다. 제자들은 힘의 논리에 바탕한 미국의 새로운 국제 정책인 네오콘의 핵심 멤버로 자리잡았지만, 스트라우스 자신은 1973년 눈을 감을 때까지 비타협적인 학자의 길을 걸었다. 스트라우스에게는 적들이 더 많았다. 그의 열성적 제자들도 학계에서는 비주류였다.

마키아벨리처럼 스트라우스에 대한 평가도 극단적이다. 스트라우스는 또다른 마키아벨리라는 것이다. 부시의 강력한 외교 정책에 찬성한다면 스트라우스는 ‘평화의 교사’일 것이고 네오콘을 ‘악의 축’으로 본다면, 스트라우스 역시 ‘악의 교사’일 것이다. 그러나 스트라우스를 선과 악의 천칭에 올려놓았다고 해서 “한 번 더 생각해보라” “한 번만 더 읽어보라”고 거듭 충고하는 그의 치밀하고 엄정한 한 텍스트 읽기의 미덕이 훼손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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