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코끼리’에 밟힌 ‘검은 인간’의 분노
  • 최재훈(국제연대 시민단체 ‘경계를넘어’ 활동가) ()
  • 승인 2006.08.07 10:1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이지리아 석유 개발 이익 다국적 기업·관료가 ‘꿀꺽’ 배곯는 원주민들 ‘대우건설 노동자 납치’ 등으로 투쟁

 
오랫동안 한국인들의 관심 밖에 있었던 아프리카 관련 뉴스가 올해 자주 나온다. 지난 7월30일 아프리카 소말리아 해적들에게 납치된 동원호 선원들이 무사히 구출되었다. 동원호 사건을 계기로 아프리카 정치 상황이나 현지 무장 세력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돈을 노린 아프리카 해적들을 조심하라는 경고도 나온다.

그런데 4월 발생한 동원호 나포 사건과 6월 발생한 나이지리아 대우건설 노동자 납치 사건을 혼동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지난 6월7일 나이지리아 남부 유전 지대인 니제르 델타 지역의 포트 하커트 항 주변에서 한국의 대우건설 노동자 다섯명이 현지 무장 단체에 납치되었다. 이들은 이틀 만에 모두 풀려났다. 스피드 보트를 탄 무장 세력이 총을 쏘며 납치하는 과정은 동원호 경우와 비슷했다. 하지만 두 사건의 배경에는 큰 차이가 있다. 동원호 나포가 단순히 돈을 노린 일개 해적의 범죄 행위였다면 나이지리아 사건에는 에너지 확보 문제를 둘러싼 국제 정치학적 의미가 숨어 있다. 나이지리아 분쟁은 현재 진행형이다.

당시 납치를 주도한 이들은 니제르 델타 해방운동(Movement for the Emancipation of the Niger Delta, MEND)이라는 지역 무장 투쟁 조직이었다. 그들은 외국인 납치뿐만 아니라 송유관 파괴, 유전 시설과 선박 폭파 등도 빈번하게 일으켰다. 이들이 정유 시설을 파괴 하기 때문에 종종 국제 유가 시장이 요동치곤 한다.

무장 투쟁 조직 조직원들은 대부분 해당 지역(니제르 델타)에 살던 주민 출신이다. 십 수 년 전만 해도 농사를 짓고 고기를 잡으며 오순도순 살던 평범한 주민들이 왜 쟁기와 그물을 버리고 총을 쥐게 되었을까. 주민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석유 개발로 삶의 터전은 엉망이 됐지만, 흰 코끼리들은 날로 살찌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기서 ‘흰 코끼리’는 바로 다국적 석유 자본과 정부 관료들을 지칭한다.

지난해 말과 올해 초에 걸쳐 니제르 델타 지역을 현지 취재한 미국의 뉴욕 타임TM는 두 르포 기사를 통해 현지 주민들의 생활상을 잘 묘사했다. 일부만 인용해보자. ‘그곳에서는 전등을 켤 필요가 없다. 석유 공장에서 2백피트 높이의 천연가스 불기둥이 밤낮으로 타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길거리 카페에서 만난 러키 에크베리(24)는 “여기는 언제나 이렇다. 불길 때문에 눈이 자주 아프다. 작물도 제대로 자라지 않는다”라고 호소했다. 에크베리 씨는 자신을 ‘구직자’라고 소개했는데, 과거와 달리 석유 회사 외에는 일자리를 구할 수 없다. 다른 청년 아자리 우케나씨(26)는 멀리 불기둥을 가리키며 “우리는 이곳에 살지만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한다. 우리(원주민)들이 마치 이방인인 것처럼 느껴진다”라고 말했다.

<니제르델타 인권연구소>의 아냐크위 은시리모부 사무국장은 “니제르 델타 하면 곧 석유를 의미할 정도지만 또한 믿어지지 않을 만큼 가난한 지역이다. 전세계가 이곳의 석유에 의존하고 있지만 정작 우리에게 석유는 축복이 아닌 저주다”라고 말한다.

나이지리아는 원유 매장량 기준으로 세계 10위, 수출액으로 세계 8위의 산유국이다. 하루 생산량이 약 2백60만 배럴이니까 유가를 배럴당 60달러로만 잡아도 매일 약 1억6천만 달러를 석유로 벌어들이는 셈이다. 덕분에 나이지리아는 아프리카 최고의 석유 부국이 되었다. 최근에는 미국이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중동과 반미 성향의 베네수엘라를 대신해 아프리카를 새로운 ‘주유소’로 주목하면서 그 중요성이 더 커지고 있다. 미국 아메리카은행에 따르면, 이미 아프리카는 지난해부터 미국 원유 수입량의 18.7%를 차지해 17%인 중동을 앞지른 데다, 미국 정부는 향후 10년 내 그 비중을 25%까지 끌어올릴 계획이다.

니제르 델타 지역 주민, 하루 생계비 1달러 미만

그런데도 나이지리아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3백90달러 정도에 불과하다. 그 중에서도 나이지리아 석유의 대부분이 생산되는 남부 니제르 델타 지역 주민들의 70% 이상은 하루 1달러 미만의 생계비로 살아가고 있다. 정작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은 석유를 돈 주고 산다는 것은 꿈도 못 꿀뿐더러 전기· 전화·학교·병원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수돗물도 나오지 않아 주민들은 더러운 물을 그대로 마셔 만성적인 이질과 설사에 시달린다.
석유 개발로 주민들이 얻은 것은 단순 일자리 이외에는 거의 없다. 대신 잃은 것은 많다. 생태계가 완전 파괴돼 농사를 지을 수 없고, 강과 시냇물로 폐유가 흘러들어가 물고기도 사라졌다.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생업 터전이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린 것이다.

석유 개발로 인한 이익은 다국적 석유 메이저 회사의 금고로 고스란히 들어갔다. 나이지리아에서 가장 활발히 석유 개발을 하는 유럽계 다국적기업 로열더치셸이 저항 세력의 공격 대상이 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이번에 직원들이 납치됐다 풀려난 대우건설도 로열더치셸에서 플랜트 건설을 수주하고 공사를 벌이던 중이었다.

 
주민들이 처음부터 무장 투쟁이라는 극단의 방법을 택했던 것은 아니다. 10여 년 전인 1990년대 중반, 이 지역 출신의 시인 켄 사로 위와는 <‘오고니 민족의 생존을 위한 운동’>을 이끌며 로열더치셸을 비롯한 다국적 석유 기업들에 평화적인 방법으로 저항했다. 그러나 그와 동료 여덟명은 군사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것이 유명한 ‘오고니의 9인’ 사건이다. 

MEND 같은 무장 조직의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부족은 인구 약 1천2백만명의 이자우족이다. 이들은 최근 로열더치셸 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적이 있었다. 나이지리아 국회까지 나서서 회사가 환경 파괴한 것을 배상하라는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올 2월에는 연방고등법원이 15억 달러를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그러나 로열더치셸 사는 배상 책임을 부인하며 즉시 대법원에 상고한 상태이다.

물론 개발 이익을 수탈해가는 세력이 다국적기업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중앙·지방 정부의 부패도 심각하다. 1999년 오바산조 대통령이 민선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부패 문제 해결에 공을 들였으나 취임 초기의 개혁 조처들은 점차 추진력을 잃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갔다. 여전히 주민들은 전기도 안 들어오는 방에서 흙탕물로 지은 밥을 먹는 반면, 지역의 정부 관리들은 석유 개발에서 나오는 세금과 뇌물로 호화로운 생활을 누린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지난해부터 무장 투쟁 조직들이 ‘니제르 델타의 석유로 인한 부는 니제르 델타 주민에게로’를 외치면서 송유관과 유전, 선박을 공격하고, 외국인 기술자들을 납치하는 등의 ‘저항’ 운동을 본격화한 것이다. 한 캐나다 지역 신문에 실린 <정의를 위한 니제르 델타 여성들>의 사무국장 아니 브리시베의 말이 이를 잘 설명해준다. “사람들은 벽에 부닥친 느낌이에요. 이 모든 행동은 좌절, 분노, 극단적인 소외에서 비롯된 겁니다. 가난 때문에 예전 같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그런 행동을 하고 있어요.”

동원호 사건은 MBC가 방영한 현지 르포 덕분에 해적들의 납치 동기와 정황을 알 수 있었지만 나이지리아 납치 사건은 그것조차 없었다. 대우건설 사건은 잊혀졌거나 동원호 사건과 한 묶음으로 취급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나이지리아 사건에는 에너지 확보를 둘러싼 국제 정치적 항의가 내포돼 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자못 크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