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열린우리당 ‘스토커’ 되는가
  • 이숙이 기자 (sookyiya@sisapress.com)
  • 승인 2006.08.11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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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이별’ 원하는 당의 뜻 외면하고 탈당 불가 선언…민주당과 합당 막으려고 백의종군 강조

 
‘김병준’에서 촉발되어 ‘문재인’으로 최고조에 달했던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 사이의 ‘인사 갈등’이 한 고비를 넘겼다. 언론을 사이에 두고 서로 고공전을 펼치며 얼굴을 붉히던 양측이 8월6일 청와대에서 만나 담판을 지은 것이 사태 진정의 계기가 되었다.

7·3 개각부터 한 달 가까이 진행된 당·청 간 인사 갈등을 지켜본 정치권 안팎에서는 결과적으로 노무현 대통령은 명분을, 당은 실리를 챙긴 윈윈 게임이었다고 평가한다. 노대통령은 비록 김병준-문재인 카드를 쓰지는 못했지만 인사권이 대통령에게 있다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받았고, 열린우리당은 비록 노대통령에게 이런저런 소리를 다 들어가며 수모를 겪었지만 김병준-문재인 카드를 막는 성과를 거두었다는 것이다.

당이나 청와대나 국정감사와 각종 법안을 다룰 9월 정기국회를 앞두고 당·정·청 3자간 갈등설이 계속해서 불거져나오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측면도 작용했다.

봉합된 당·청 갈등, 머지않아 또 터질 듯

하지만 이런 봉합 상태가 그리 오래가지는 못하리라는 것이 여권 내부의 중론이다. 이번 인사 파동을 거치면서 노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이 바라보는 지점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절감한 탓이다. 노대통령이 8월6일 여당 지도부를 만난 자리에서 두 차례나 ‘협상합시다’라는 표현을 쓴 것 자체가 그만큼 양측의 시각차가 크다는 것을 증명한다.

앞으로 발생할 수 있는 제2, 제3의 당청 갈등과 관련해 여당 인사들이 가장 걱정하는 대목이 바로 노대통령의 거취 문제다. 열린우리당의 한 초선 의원은 “언론에서는 노대통령이 쏟아낸 말들 가운데 ‘외부 선장론’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했지만, 당 안에서는 오히려 ‘백의종군하겠다’는 표현에 더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라고 털어놓았다.

 ‘외부 선장론’이야 당의 외연을 넓히고 누구든지 경쟁력 있는 인물을 내세워야 한다는 차원에서 원칙론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백의종군론’은 노대통령의 거취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데다 그 말에 담긴 뜻도 의미심장하다는 것이다.

‘탈당하지 않겠다’에서 시작해 ‘나가려면 당신들이 나가라’ ‘나는 당에 남아 백의종군하겠다’로 발전한 노대통령의 탈당 거부 발언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여권에서는 두 가지 뜻으로 해석한다.

하나는 레임덕(임기 말 권력 누수 현상)을 결코 허용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다. 노태우 후보의 6·29 선언을 용인한 전두환 전 대통령을 필두로 역대 대통령은 대부분 레임덕에 시달렸다. 임기 막바지에는 정권 재창출에 걸림돌이 되지 않기 위해 자의 반 타의으로 반 탈당 절차를 밟았다. 그 과정에서 ‘필요하다면’ 차기 주자가 현직 대통령을 ‘사뿐히 즈려밟는’ 것도 감수하곤 했다.

 
하지만 노대통령은 그럴 의향이 전혀 없다는 것이 주변 인사들의 분석이다. 한 ‘친노’ 의원은 노대통령의 생각을 이렇게 설명했다.

“역대 대통령은 대부분 측근이나 자식들이 연루된 대형 게이트가 터지면서 급격하게 힘을 잃었다. 여당 내부에서부터 대통령을 공격하고 나선 것도 그럴 만한 명분이 있어서이고, 해당 대통령도 정권 재창출이 되어야만 차기 대통령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절박감에서 자신에 대한 공격에 눈감은 측면이 있다. 하지만 노대통령은 이른바 게이트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급격하게 힘이 빠질 이유도, 차기 주자에게 후일을 의탁할 이유도 없다는 자신감에 차 있다.”

이 대목에서 다시 한 번 되짚어야 할 노대통령의 발언이 있다. “내가 지지도 낮은 대통령이라고들 하는데, 열심히 하면 나도 언젠가 뜰 날이 있지 않겠느냐”라는 말이다. 참석자들은 농담조로 들었다지만, 친노 인사들은 여기에 대통령의 진심이 담겨 있다고 본다. 현재 대통령의 지지도가 낮은 것은 참여정부 정책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거나 아직 제 궤도에 오르지 않아서이지, 시간이 지나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으리라는 확신이 있다는 것이다.

외부 선장론’은 호남 민심도 염두에 둔 발언

따라서 정치적으로 구린 데가 없고, 정책적으로도 밀릴 바 없다고 믿는 노대통령이 왜 탈당이라는 ‘피신처’를 찾고, 차기 주자들의 공격을 허용하겠느냐는 얘기다. 노대통령이 “대통령 한번 해보겠다고 (현직) 대통령을 때려서 잘된 사람 하나도 못 봤다”라고 한 데는 이런 판단이 깔려 있다.

‘레임덕 불허’와 함께, 노대통령이 백의종군을 선언한 또 다른 이유는 ‘민주당과의 합당을 끝까지 저지하기 위해서’라는 것이 친노 진영의 시각이다.

 
5·31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위세를 떨치고, 7·26 재·보선으로 수도권 상륙에 성공하면서 반(反)한나라당의 중심축이 열린우리당에서 급속도로 민주당 쪽으로 옮아가는 양상이 벌어졌다. 2008년 총선에 대비해야 하는 열린우리당 호남 의원들은 물론 수도권 의원들 사이에서도 동요가 감지되었고, 밖에는 ‘고건’이라는 대안이 버티고 서 있었다. 이대로 두면 열린우리당 자체의 원심력 때문에라도 민주당과의 합당이 가시화할 판이었다.

 열린우리당의 한 의원은 “지역주의 극복을 트레이드 마크로 삼고 있는 노대통령이 ‘도로 민주당’이 되는 꼴을 그대로 두고 볼 수만은 없었을 것 아니냐”라고 반문했다. 반한나라 세력이 뭉치더라도 그것은 열린우리당이 중심이 되어야 하고, 모양새도 전국 정당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노대통령이 호남을 버리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청와대 오찬에 참석했던 한 인사는 “노대통령이 김대중 전 대통령을 여러 번 극찬했는가 하면, 지방선거 직전 ‘정동영 의장은 당을 떠나라’고 했던 김두관 전 장관을 따로 불러 질책했다는 얘기를 했다. 아무래도 호남 민심을 염두에 둔 것 같았다”라고 해석했다. 노대통령이 ‘외부 선장론’을 거론한 것이나, ‘나가려면 너희들이 나가라’며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가 바로 ‘도로 민주당’은 막으면서, 기존 지지층은 하나로 묶어내는 방식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친노 직계 의원들이 중심이 되어 최근 분위기 띄우기에 들어간 ‘오픈 프라이머리’ 제도는 이런 노대통령의 의중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관련 인터뷰 기사 참조). 반한나라 진영의 대표 주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누가 되었든 열린우리당이 만들어놓은 광장에 들어와 경쟁을 하라는 의미다.

아니나 다를까. 외부 선장론과 오픈 프라이머리가 주목을 끌면서 민주당은 화제의 중심에서 한발 비켜난 양상이다. 노대통령은 8월12일 열린우리당 친노 의원들을 청와대로 초청했다. 내친김에 이들에게 힘을 확 실어주겠다는 의도로 읽힌다.

적당한 시점에 ‘아름다운 이별’을 선언해주기를 바랐던 노대통령이 오히려 탈당 불가를 못 박은 데 이어 정치 현안에 적극 개입할 의지까지 피력하고 나서자 열린우리당 내부는 술렁이는 기색이 역력하다. 경선 승리-탄핵 돌파 등의 신화를 써온 노대통령이 또 한 번 승부사의 기질을 발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감이 있는가 하면, 지나친 자기 확신에 사로잡힌 노대통령이 과도하게 칼자루를 쥐고 흔듦에 따라 여당이 더 깊은 수렁에 빠지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도 만만치 않다.

9월 정기국회가 끝나고 본격적인 헤쳐 모여의 국면이 시작되면, 노대통령 거취는 여권의 가장 뜨거운 감자로 떠오를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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