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을 이끌고 욕먹인 사람들
  • 신호철 기자 (eco@sisapress.com)
  • 승인 2006.09.18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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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총리 57명, 대부분 재임중 ‘화제’ 남겨…요시다 시게루, 최고 평가받아

 
아베가 일본 총리 자리에 오르면 역대 57번째(사람 수 기준) 총리가 된다. 일본이 근대적 내각 제도를 만든 것은 1885년인데 초대 총리는 우리 모두가 잘 아는 이토 히로부미였다. 1945년 종전 이후부터 일본을 이끈 총리는 전체의 절반에 해당하는 28명이었다. 이들 총리의 행보는 일본 사회뿐만이 아니라 한국 등 국제 사회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946년 총리에 취임한 요시다 시게루(吉田茂)는 일본 국민들이 역대 최고 총리로 꼽는 인물이다. 9월3일자 <요미우리신문>에 따르면 전후 총리 중 누구를 가장 높이 평가하느냐는 질문에 요시다 시게루가 1위로 지목되었다. 요시다 총리가 인기를 얻은 것은 전후 폐허가 된 일본을 경제 강국으로 만드는 데 공이 컸기 때문이다.
요시다 총리는 1947년 잠시 총리 직을 내주었다가 1948년 다시 재집권해 이후 1954년까지 일본을 이끌었다. 그가 일본 경제를 부활시킬 수 있었던 데는 그의 집권 기간에 발발한 한국전쟁의 영향도 컸다.

요시다 시게루는 일본 자민당의 본류인 온건 보수 파벌의 출발점이 되는 인물이다. 반면 요시다 시게루의 라이벌이었던 하토야마 이치로는 강경 보수를 상징한다. 두 파벌의 대립은 5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요시다의 온건 보수 노선은 경군비(최소한의 군대만 유지)· 경제 중시 노선으로 대표된다. 하토야마 이치로 노선은 군비 확충과 자주헌법을 강조하는 쪽으로 국수주의에 가까웠다. 결과론적으로 요시다의 온건 보수 노선이 옳았던 것으로 증명되었다.

요시다, 전후 일본 재건 초석 다져

요시다 시게루는 현재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아베 신조와 경쟁 후보로 나선 아소 타로 외상의 외할아버지이기도 하다. 아소 타로 후보는 온건 우파였던 요시다의 손자라는 점 때문에 강경 우파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강경 우파는 하토야마 노선을 지지하며, 아베 신조는 하토야마 파벌에 속한다.

하토아먀 이치로(鳩山一郞)는 요시다의 뒤를 이어 1954년부터 1956년까지 일본 총리를 맡았다. 반공주의자로 명성이 높았던 하토야마는 그러나 정작 자신이 총리가 된 뒤에는 소련과의 국교 회복에 앞장섰다.
1957년부터 1960년까지 일본 총리를 맡은 사람은 아베 신조의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다. 전범 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분류되었지만 1948년 12월24일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석방되었다. 1952년 4월 일본이 미군정에서 해방되자마자 기시는 정계에 복귀해 ‘반(反)요시다’ 운동을 벌였다. 당시 하토야마 총재가 이끌던 일본 민주당의 간사장을 맡은 뒤 그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되었다.

1948년 한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국교가 없었던 한·일 양국은 1960년 총리로 취임한 이케다 하야토 때부터 수교 협상을 시작했다. 이케다 총리는 1961년 한국 군부가 5·16 쿠데타를 일으키자마자 외교 채널을 가동했다. 1961년 11월 아직 대통령으로 취임하지 않았던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을 초청해 국교 정상화에 사실상 합의했다.

1964년부터 1972년까지 총리를 역임한 사토 에이사쿠는 일본 자민당의 전성기를 이끈 인물이다. 요시다 시게루에 이어 두 번째로 총리 재임 기간이 길다. 아베 신조의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의 동생이었다. 성이 다른 이유는 양자로 입양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케다 전임 총리의 한·일 수교 협상을 이어받아 1965년 6월 한국과 수교했다.
사토 에이사쿠가 자기 집안을 임진왜란 이후 조선에서 넘어온 한국계라고 소개했다는 증언이 있다. 최근 발간된 김충식씨의 저서 <슬픈 열도-영원한 이방인 사백년의 기록>(효형출판)에 나오는 내용인데, 정확한 사실 확인은 쉽지 않다.
사토 총리는 1974년 비핵 원칙을 천명하고 핵확산금지조약(NPT) 체결 등에 공헌했다는 이유로 숀 맥브라이드와 함께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한국 평화운동가들은 야스쿠니 신사를 열한 번이나 참배했던 그가 노벨평화상을 받을 자격이 있었는지 의아해한다.

 
1973년 8월 김대중 납치 사건이 일어났던 때 일본 총리는 다나카 가쿠에이였다. 한·일 관계가 최고로 악화한 시기였다. 다나카 총리의 측근이었던 기무라 히로야스는 일본 시사 월간지 <문예춘추> 2001년 2월호에 쓴 회고 글에서 당시 박정희의 밀사였던 이병희씨가 1973년 10월 다나카 총리에게 4억엔이 든 종이 가방을 선물로 주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폭로했다. 선물이 효과가 있었을까. 그해 11월2일 일본을 방문한 김종필을 맞아 다나카는 김대중 납치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는 쪽보다 사건을 무마하는 방향으로 합의해주었다.

1978년 총리가 된 오히라 마사요시는 총리 시절 한 일보다는 장관 때 한 일로 우리에게 더 유명하다. 그는 1960년대 이케다 내각과 1970년대 다나카 내각에서 외무대신(외무장관)을 맡았는데 공교롭게도 그때가 한·일 관계의 분수령이었다.
1962년 11월21일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오히라 일본 외상을 만나 한·일 수교 협상 조건을 확정지었다. 두 사람의 합의 사항은 ‘김종필-오히라 메모’라는 고유명사로 한국 외교사에 남아 있다. 오히라는 한국에 무상 공여 3억 달러·유상 공여 2억 달러·민간 차관 1억 달러 이상을 주기로 합의하면서 과거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배상이 아니라 독립 축하금이라는 명목을 달았다. 오히라는 1973년 김대중 납치 사건 당시에도 외무장관을 역임해 박정희 정부와 인연이 깊었다.

1982년 총리가 된 나카소네 야쓰히로는 광복절 야스쿠니 신사 참배의 원조로 불린다. 1985년 8월15일 현직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카소네는 중국 등으로부터 격렬한 항의를 받자 그 다음해부터는 참배하지 않았다. 1987년 퇴임한 나카소네는 고이즈미에게 주변국의 뜻을 무시하고 광복절 참배를 강행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나카소네 시절까지만 해도 일본 총리는 한국 군부 정권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고, 한국 시민들이 일본 총리에게 비판적인 의사를 표현할 여지가 없었다. 1990년대 들어 한국에 민주화가 이루어지면서 한국민이 일본 총리를 보는 시각도 달라졌다.

1992년 1월8일 미야자와 기이치 일본 총리의 방한을 앞두고 정신대 피해 할머니들이 일본 대사관 앞에서 ‘정신대 공식 인정과 배상’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1992년 1월16일 한국을 방문한 미야자와 기이치 총리는 1월17일 한국 국회에서 가진 연설에서 과거사에 대해 사과하면서 “최근 종군위안부(정신대) 문제가 거론되고 있는 바 본인은 이를 매우 마음 아픈 일로서 참으로 죄송스럽게 생각하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모호한 표현이었다. 종군위안부 할머니들은 일본 총리가 떠난 뒤에도 집회를 계속했고 그때 시작한 수요 집회가 지금까지 이어져 7백 회를 넘었다.

1955년 이래 일본 총리는 단 세 명만 빼면 모두 자유민주당 출신이었다. 1993년부터 1996년까지 소수당이 총리를 맡았는데, 이는 자민당이 재정비되던 과도기의 일이다.

2001년 총리에 취임한 고이즈미는 요미우리 신문 여론 조사에서 역대 최고 총리 2위에 올랐다. 현직 총리라는 프리미엄 덕으로 보인다. 그 뒤를 다나카 가쿠에이·나카소네 야쓰히로·사토 에이사쿠가 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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