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건, 가상 대결에서 고전
  • 고제규 기자 (unjusa@sisapress.com)
  • 승인 2006.10.20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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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여권 후보 돼도 손학규에게만 승리” 조사 결과 나와…여권 고민 깊어져

 
북핵 불똥이 여권에 튀었다. 북핵 사태 이후 여권이 맥을 못 추고 있다. 당 지지율뿐 아니라 범여권의 대권 주자 지지도 역시 동반 하락세다. 낮은 지지율이 더 낮아지자 갈피를 못 잡고 있다. 게다가 북핵 대책을 두고 당 내에 다양한 이념적 스펙트럼이 드러나면서 더욱 갈팡질팡이다. 지난 10월20일 김근태 의장의 개성공단 방문을 두고 지도부 간에도 의견이 갈렸다. 한마디로 앞이 안 보인다.

당초 여권은 국정감사가 끝나는 11월부터 지각변동의 군불을 지피려 했다. 연말이나 내년 초에 정치권 전체를 흔드는 정계 개편을 본격화할 계획이었다. 일찌감치 오픈 프라이머리 도입을 확정한 것도 이 때문이다. 외부 선장에게 문호를 개방해, 고건·강금실·김근태·정동영·천정배·유시민 등 범여권 후보를 전부 출전시켜 흥행을 노리겠다는 복안이다.

이같은 복안이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빅3 주자 가운데 한 명인 고건 전 총리와 연대하는 것이 필요 충분 조건이다. 열린우리당의 한 의원은 “고 전 총리는 정당을 만들어본 적이 없다. 그 세력도 마찬가지다. 그가 참여하게끔 구도를 만들어갈 것이다. 경선을 통해 제3 후보가 그를 꺾으면 바람이 불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북핵 변수와 최근의 여론조사 결과는 이런 전제 자체를 흔들고 있다. 고건 전 총리의 지지율 하락세가 뚜렷해지면서 빅3 구도가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이명박 전 시장의 지지율이 상대적으로 올라가면서 3강 구도가 1강2중 구도로 변하고 있다. 고 전 총리 처지에서 지지율 하락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본선 경쟁력이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17대 대선은 2007년 12월19일 치러진다. 1년 정도가 남았지만 보통 이맘때부터 여론조사 기관은 가상 대결 조사 결과를 내놓기 시작한다. 단순 지지도를 묻는 조사에 비해 가상대결 조사는 위력적이다. 예선보다 본선에 강한 후보가 가려지기 때문이다.

 
지난 2002년 3월16일 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광주에서 이인제 대세론을 꺾었다. 노풍(盧風)의 시작이었다. 이면에는 가상 대결 여론조사가 있었다. 광주 경선 이틀 전 3월14일 문화일보가 실시한 가상 대결에서 노후보는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에게 41.7% 대 40.6% 1.1%포인트 차이로 승리했다. 비록 오차 범위 내의 근소한 차이였지만, 민주당 후보 가운데 유일하게 이회창 후보와 겨루어 승리한 주자는 노무현 후보였다. ‘될까’라는 의문이 ‘된다’는 확신으로 바뀌면서 노풍은 거세게 불었다.

이렇게 대선 가도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가상 대결 여론조사가 최근 진행되었다. 지난 10월11일 한국사회여론연구소는 19세 이상 전국 성인 남녀 1천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벌였다(오차 범위 ±3.1%). 조사 항목 가운데 가상 대결을 포함시켰다. 고건·이명박·박근혜·손학규 후보를 번갈아 맞붙였다. 조사를 진행한 한귀영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연구실장은 “김근태·정동영 후보는 지지도가 낮아 가상 대결을 붙여도 결과가 뻔하다. 고 전 총리를 범여권 후보로 가정한 뒤 가상 대결을 물었다”라고 말했다.

북핵 발언 등 엇박자 행보, 감점 요인 된 듯

 
실제로 오픈 프라이머리를 통해 범여권 후보를 선정할 경우 고 전 총리가 압도적으로 뽑혔다(48.7%). 강금실(8.9%) 정동영 (5.6%) 한명숙 (4.7%) 김근태(3.5%) 후보가 뒤를 이었다. 오픈 프라이머리는 당원은 아니더라도, 그 정당 지지자들이 참여하기에 열린우리당 지지자들만 따로 분석해보았더니, 고건 전 총리의 지지율은 과반을 넘어섰다. 고 전 총리가 54.8%를 얻었고, 강금실·정동영 전 장관이 나란히 11.1%를 차지했다. 김근태 의장(4%)은 한명숙 총리(4.6%)보다 지지율이 낮게 나왔다.

고건 전 총리는 범여권 후보 경선에서는 대세론을 형성한 셈이다. 그렇다면 본선 경쟁력은 어떨까? 먼저 고건-박근혜 맞대결의 경우, 고 전 총리는 박 전 대표에게 11.3% 포인트나 뒤졌다. 박 전 대표가 50.8%의 지지를 받았고, 고 전 총리는 39.5% 득표하는 데 그쳤다. 고 전 총리는 호남에서 84.2%를 얻어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박 전 대표는 같은 지역에서 12%를 얻었다. 서울에서 고 전 총리는 49.8%를 얻어, 39.9%의 지지를 받은 박근혜 전 대표를 앞섰다. 그러나 그는 나머지 지역에서 박 전 대표에게 모두 뒤졌다.

 
고건-이명박 맞대결의 경우에도 고 전 총리는 고전을 면치 못할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 전 시장이 55%를 기록했고, 범여권 후보인 고건 전 총리의 지지율은 33.3%에 그쳤다. 특히 서울에서 이 전 시장은 60.8%, 고 전 총리는 31.2%, 경기·인천에서 이 전 시장은 62.4%, 고 전 총리는 29.5%로 수도권에서 격차가 더 크게 벌어졌다. 두 사람의 가상 대결에서 호남을 뺀 모든 지역에서 이명박 전 시장이 앞섰다.

고 전 총리의 본선 경쟁력은 손학규 전 지사가 한나라당 후보로 선정될 경우에만 높게 나타났다. 고 전 총리는 53.1%의 지지를 받았고, 손학규 전 지사는 28%를 얻었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 한귀영 연구실장은 “대선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 있어, 몇 차례 엎치락뒤치락할 것이다. 그럼에도 가상 대결에서 고 전 총리가 크게 뒤진 점은 눈여겨보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한실장은 2004년 가을부터 불기 시작한 고건 신드롬의 배경을 정치권과 거리두기로 풀이했다. 장외 주자로 머무르며 정치적인 언급을 자제한 것이 신선해 보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언론에 대선 주자로 오르내리고, 유권자가 그를 대권 주자로 인식한 뒤에도 현안마다 침묵한 것을 그의 실책으로 보았다. 신선함은 짧았고, 오히려 오랜 침묵이 소신이 없거나 비전이 약한 주자로 비쳤다는 것이다.

고 전 총리측도 이를 잘 알고 있는 듯 최근 들어 부쩍 목소리를 높였다. 북핵과 관련해 분명한 소신을 밝혔다. 그러나 엇박자였다. 고건 전 총리의 소신은 그의 지지 기반과 엇갈린 것이다. 고 전 총리의 지지 기반은 상대적으로 대항마를 찾지 못하는 열린우리당과 민주당 지지자, 지역적으로는 호남이다. 이 유권자는 정치적으로 개혁적이고, 대북 정책과 관련해서도 DJ의 햇볕정책에 우호적이다. 하지만 고 전 총리는 햇볕정책에 대한 재검토를 주장하면서 오히려 한나라당의 봉쇄 정책에 가까운 견해를 밝혔다. 한귀영 실장은 “고 전 총리가 현안마다 자신은 중도라고 포장하지만 내용은 보수에 가까운 의견을 제시할 경우 지지층 이탈이 가속화할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지지층 충성도는 박근혜 전 대표가 가장 높아

이런 딜레마는 그의 지지층 충성도가 취약하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빅3를 형성하고 있는 주자들 가운데 가장 지지 충성도가 높은 후보는 박근혜 전 대표였다. ‘현재 지지하는 후보를 내년 대선까지 계속 지지하겠는가’라고 물었더니, 박 전 대표가 62.8%라는 높은 지지 충성도를 보였고, 이명박 전 시장도 57.9%의 지지 충성도를 보였다. 반면 고 전 총리는 46.3%에 그쳤다. 그에 대한 지지도는 유동적이라는 의미다.

지지 충성도가 높지 않은 상태에서 이번 조사뿐 아니라 앞으로 본격화할 가상 대결에서 고 전 총리가 연패한다면, 그는 2002년 이인제 후보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 범여권 대세론마저 흔들리고 제3 후보가 나타나는 순간 허망하게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이다. 열린우리당의 한 당직자는 “콘텐츠가 뚜렷한 후보가 등장할 경우 고 건 전 총리와 붙기만 해도 지지율이 뜰 것이다”라고 말했다.

당내 경선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본선 경쟁력이다. 정권 재창출을 바라는 지지자들은 본선 경쟁력이 낮은 후보 대신 새로운 대항마를 찾기 마련이다. 외부 선장론이나 제3 후보론이 열린우리당에서 제기되는 것도 이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북핵 변수가 상당 기간 지속되면 제3 후보가 돌풍을 일으킬 가능성 자체가 낮아진다는 데 범여권의 고민이 있다. 여권이 바라는 차기 대선은 ‘Again 2002’이다. 노무현 후보처럼 지금은 지지율이 5% 미만인 후보라도 깜짝 돌풍을 일으켜 꿈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북핵 변수가 내년까지 지속된다면 차기 대선은 ‘Again 1997’이 될 가능성이 높다. 1997년 김대중 후보가 당선한 것은 DJP연합 덕도 있지만 IMF 외환위기를 타개할 ‘준비된 후보’라는 점이 표심을 흔든 측면도 있다. 그때처럼 북핵 위기 국면이 지속되면 유권자는 검증된 리더십을 갈구한다. 여기에 노무현 학습 효과까지 더해진다면, 검증되지 않는 제3 후보가 출현해도 폭발력이 낮을 수 있다는 의미다.

그래도 여권에 희망은 남아 있다. 아직도 4백여 일이나 남은 시간이다. 15대, 16대 대선을 1년 앞둔 이맘때 가상 대결 여론조사에서 1위는 이회창 후보였다. 정치가 말 그대로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이기를 여권은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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