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꺼운 책’보다 ‘짧은 글’ 읽혀라
  • 방민호(서울대 교수·국문학) ()
  • 승인 2006.11.10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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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요즘 학생들은 1980년대 초반에 고등학교를 다닌 필자 세대보다 공부에 훨씬 더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 같다. 주관적인 판단인지 모르겠지만 요즘 고등학생들은 필자 세대보다 더 많고도 이상한 평가에 시달리고 있음에 틀림없다.

먼저 수능시험이라는 기괴한 시험 제도가 그렇다. 이 고난도 퀴즈 놀이 같은 시험은 학생들이 고등학교 과정에서 무엇을 얼마나 배웠고 이해했고 암기했는가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대학에서 수학할 능력이 있는가를 평가하겠다는 취지로 공교육의 위상을 떨어뜨리는 일에 앞장선다. 이것은 아마도 교육부에서 실시한 제도일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변별력이 없다고 해서 각 대학에서는 학생들을 잘 선발하기 위한 차선의 방책들을 고안해왔다. 심층 면접을 시행한다고 했던가 하면, 논술 시험을 통해서 정말 우수한 학생을 가려내겠다고 한다. 그런데 사실은 이 모든 것이 일종의 시험 폭탄인 셈이다. 그때마다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다시 한번 학교 교육 바깥에서 살길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시험은 단순하고 투명해야 한다. 이런 생각에 반대하는 분들이 많을 줄 안다. 심층적이고 다면적인 평가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전제 자체를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나아가 요즘 학생들을 보면 실로 딱하다. 학교에서 중간시험과 기말시험을 치는 외에 각종 수행 평가를 받아야 한다. 학교 선생님들도 이 제도 때문에 무척이나 격무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학생들은 이런 각종 교과 수행 평가 외에도 생활 태도 등에 걸쳐 또 다른 평가를 받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평가에 기가 질린 학생들이 또다시 수능시험이라는 기괴한 제도의 평가를 받고 논술 평가를 받고 면접 평가를 받아야 한다. 심하게 말하면 교육부나 각 대학이나 학생들을 괴롭히기는 마찬가지인 셈이다.
필자는 지금 공교육만으로 모든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또 평가 자체를 불편하고 부당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며, 교육부나 대학 담당자들의 노고에 비난만 가하고 싶지도 않다. 다만 엄연히 존재하는 공교육의 형식과 내용에 비추어 학생들이 감당할 수 있는 시험 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필자의 개인적 소견이지만 어디서 시행하든 논술 시험 같은 것도 실상은 한국 학생들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공평하게 평가하는 데는 역부족일 것 같다. 평가 대상이 되는 학생들의 논리적 사유 능력과 표현 능력 자체가 현 사회 구조 아래서는 차별적으로 양성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 학생들이 논리적 사유라는 한정된 말로 결코 충당할 수 없는 폭넓은 사유 능력을 함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은 한국 교육의 커다란 과제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것은 평가 이전에 가르치는 단계에서 확보되어야 한다.

지금의 논술 시험, 요약본에 익숙한 학생들만 양산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필자는 현재 우리 공교육 상황에서는 칼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이 어떻다더라 하는 식의 방법으로는 학생들에게 절대로 폭넓은 사유를 심어줄 수 없다고 본다. 이렇게 두껍고 심오한 책은 사실상 고등학생들이 접근할 수 없으며 그 내용과 수준 역시 고등학교 선생님들이 감당해야 할 몫은 아니다. 이런 책에 대한 이해를 묻는 방식의 논술 시험은 결국 학원식 요약본과 다이제스트에 익숙한 머리 좋은 학생들만을 양산할 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필자가 생각하는 교육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할 만한 여유는 없다. 다만 애써 찾아보면 교과서 분량 열 장 내지 스무 장 정도로 이루어진 훌륭한 글이 많다는 사실을 상기시켜보고자 한다.
예컨대 그리스 비극을 번역한 천병희 교수의 <오이디푸스> 해설 같은 글은 문장이나 내용 면에서 손색이 없다고 단언하고 싶다. 한국의 지성들 가운데 완전하고도 미려한 문장으로 인간의 삶에 대해서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해주고 그것에 관한 풍부한 사유를 가능하게 해주는 글이 많다. 그리고 이런 글은 어느 지역의 어느 고등학교 선생님이든 즐겨 읽고 분석하고 스스로 깨쳐 학생들에게 가르쳐 줄 만한 것이다.

학생들이 한국의 지성들이 창출해놓은 지적 세계를 직접 접하고 생각할 수 있는 교육을 먼저 시행하자고, 그런 학교 교육 방법을 고안해보자고 주장하고 싶다. 그런 연후에 논술 시험이든 사유 능력 평가든 시행해보았으면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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