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차차기야 멍청아!
  • 고재열 기자 (scoop@sisapress.com)
  • 승인 2006.11.14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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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노무현 세력의 '차차기 집권' 시나리오

“10월의 대한민국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었고, 11월의 열린우리당 당의장은 노무현 대통령이다.” 요즘 열린우리당에서 유행하고 있는 ‘뼈 있는 농담’이다. “정계 개편의 동력은 노무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서 나온다”라는 김혁규 의원의 말처럼 여권의 정계 개편과 관련해 두 전·현직 대통령의 역할이 커지고 있다.

발단이 된 것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10월9일자 경향신문 인터뷰였다. 김 전 대통령이 이날 제시한 ‘분당 비극론’은 여권의 정계 개편 신호탄이 되었다. 새천년민주당을 분당시킨 것이 원죄라는 김 전 대통령의 지적은 ‘통합신당론자’들에게 합당의 명분을 제시해주었다.

김 전 대통령은 노무현 정부의 대북 정책이 햇볕 정책을 제대로 계승하지 못한 것 또한 비난했다. 보도가 나간 날 곧바로 북한 핵실험이 터지고 이후 노대통령이 포용 정책에 대해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면서 통합신당론을 주장하는 쪽에서는 명분과 함께 구실도 갖게 되었다. 김성호 전 의원이 탈당하는 등 구체적인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대권 주자들이 발 빠르게 움직였다. 여권의 대선 승리 선결 조건은 노무현 대통령을 배제하는 것이고 당 간판을 내려 제3 지대에 통합 신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구상이었다. 김근태 의장을 비롯해 정동영 전 의장과 함께 상대적으로 노대통령과 가까웠던 천정배 의원까지 통합신당론에 가세했다. 대세는 노대통령을 ‘왕따’시키는 통합신당론으로 기우는 듯이 보였다.

노대통령은 초호화 정무특보단을 꾸리는 것으로 ‘노무현 배제론’에 대비했다. 새로 짜인 정무특보단의 특징은 지역 안배에 초점이 맞추어졌다는 것이었다. 기존 이강철 특보(TK)를 비롯해 이해찬 전 국무총리(서울), 오영교 전 행자부장관(충청), 조영택 전 국무조정실장(호남), 문재인 전 정무수석(PK) 등 각 지역을 대표할 수 있는 인물로 꾸려졌다.

'분당 비극론' 맞선 '지역주의 회귀 불가론'으로 '노무현 배제론' 극복

김 전 대통령의 ‘분당 비극론’에 맞선 노대통령의 카드는 ‘지역주의 회귀 불가론’이었다. 통합신당론은 ‘도로 민주당’일 뿐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노대통령의 정치 행보가 활발해지자 김근태 의장은 “노대통령은 벤치에 앉아서 응원만 해라. 내가 스타플레이어다”라고 말하며 이를 적극 견제했다.

그러나 11월4일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노무현 대통령의 김대중 전 대통령 사저 방문을 전후해서 극적 반전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신성 로마제국 황제가 교황에게 굴복한 ‘카노사의 굴욕’에 빗대어 ‘동교동의 굴욕’이라고도 표현되는 이 만남을 통해 노대통령은 자존심을 굽힌 대가로 많은 정치적 실리를 얻게 되었다.

노대통령과 김 전 대통령 간에 정치 논의는 일절 없었다는 것이 청와대의 설명이지만, 만남이 가지는 정치적 의미 때문에 큰 영향을 미쳤다. 천정배 의원은, 노대통령이 정계 개편의 주도권을 쥐는 것에는 반대하지만 고건 전 국무총리의 ‘노대통령 배제론’을 공격하며 자신은 노무현 정부의 실점도 안고 가겠다고 밝혔다.

이에 앞서 노대통령의 정치적 스승으로 꼽히는 김원기 전 국회의장은 의원 총회에서 통합신당파의 힘을 뺐다. 별도의 특별 기구를 설치해 정계 개편 논의를 진행하자는 김근태 의장의 결정에 반대 의견을 제시해 별도의 특위를 구성하는 대신 기존의 비대위에서 정계 개편을 논의하는 것으로 결론을 이끌었다. 김 전 의장 외에도 문희상·유인태 의원 등 당 중진이 노대통령을 보위하고 나서면서 전세는 다시 기울기 시작했다.

이후 열린우리당 ‘수석 당원’인 노대통령은 정계 개편의 전면에 등장했다. 친노 직계인 백원우 의원의 입을 빌려 ‘도로 민주당 반대, 탈당 불가, 전당대회 결과 승복’이라는 자신의 3대 원칙을 밝혔다. 전당대회에서 진검 승부를 벌여 당의 앞날을 결정하자는 것이 노대통령의 제안이었다.

이런 노대통령의 적극적인 정치 행보로 ‘노무현 배제론’은 이제 설 자리를 잃었다는 것이 당의 중론이다. 친노 직계 의원들로 구성된 의정연과 개혁당 출신 의원들로 구성된 참정연과 함께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 출신 중진들과 김혁규·김두관·유시민 등 ‘잠룡’ 그룹까지 아우르며 철옹성을 쌓은 당 사수파를 도저히 제압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금 인물 지역기반 문제로 '노무현 배제론' 어려워

산술적으로도 ‘노무현 배제론’은 불가능해진 것으로 보인다. 현재 노대통령 편에 선 의원들과 스물세 명의 비례대표 의원 숫자까지 합하면 50석에 육박한다. 이런 강력한 정치 세력을 배제하고 통합신당을 만든다는 것은 성공 가능성이 극히 낮은 정치적 모험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다.

한편에서는, 언론에 미리 알려져 무산되었지만 김근태계인 문학진 의원과 정동영계인 이강래 의원이 만나려고 하는 등 양 진영 간 연대 움직임이 일고 있다. 하지만 둘이 힘을 합쳐도 부족하다는 비관론이 우세하다. 통합신당론이 진정성을 얻고 힘을 받기 위해서는 대선 주자 사퇴 선언을 하는 정도의 기득권 포기가 선행되어야 하는데, 이 정도까지 배수진을 치는 것이 가능하겠느냐는 것이다.

통합 신당 창당의 필수 요소인 ‘자금·인물·지역 기반’ 문제에 대해서도 답이 뚜렷하지 않다. 일단 열린우리당 기본 자산을 포기하고 상당한 정도의 창당 비용을 들여야 하는데 이를 감당할 수 있을지가 불투명하다. 정동영 전 의장이나 김근태 의장이 지지율 3% 내외로 고전하고 있고 고건 전 총리의 지지율도 빠지는 상황이라 대선 승리도 자신할 수 없다. 지역 기반 확보도 껄끄러운 협상 대상인 민주당과 합당으로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쉽지 않아 보인다.

사정이 불리하게 진행되면서 김근태 의장 진영이 다급해졌다. 정동영 전 의장과의 연대마저 무산되면 최악의 상황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11월2일 의원총회 직전 김근태계인 민주평화국민연대(민평연)는 모임을 갖고 ‘통합 신당을 위한 GT·DY계의 선합의 추진. 친노 세력의 전당대회 추진 명분 제거. 선도 탈당 그룹 견제’ 등을 논의하기도 했다.

친노 진영에서는 정계 개편과 관련해 일단 전반전에서는 극적 반전을 통해 우세승을 거둔 것으로 보고 후반전 승부의 최대 전환점이 될 전당대회에 대비하고 있다. 이미 오래 전부터 노사모를 결집해 조직력을 강화하고 있고, 당에 복귀하는 정세균 산업자원부장관이나 이해찬 전 국무총리를 내세워 당 의장 경선에 임한다는 것이 복안이다. 이런 움직임에 대해 당내 반노·비노 진영에서는 “‘도로 우리당’으로 가자는 것이냐”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꼬마 우리당' 혹은 '제2 국민통합추진회의' 모형

당 내외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친노 진영의 독자 행보는 앞으로 더욱 선명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친노 진영의 이후 정치 행보를 설명하는 말은 ‘꼬마 우리당’ 혹은 제2의 ‘국민통합추진회의’다. 노대통령이 김영삼 전 대통령의 3당 합당에 반대해 꼬마 민주당에 남고, 정계 복귀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새정치국민회의’를 만들 때 이에 동참하지 않고 ‘국민통합추진회의’를 조직했듯이 독자 생존의 길을 모색한다는 것이다.

친노 진영의 기본 구상은 ‘멀리 있지만 확실한 목표를 겨냥해, 가까이 있지만 불확실한 목표에 대비한다’는 것이다. 즉 미래의 일정 시점을 놓고 역산해서 지금의 정치 행로를 정하는 것이다. 안희정씨의 한 측근은 “내년 대선을 생각하면 노무현 대통령을 배제하는 것이 정석일지 모르지만 그 이후의 정치 일정을 감안하면 오히려 그 반대다”라고 말했다.

2007년 대선 패배를 전제로 전개되는 친노 진영의 정치 시나리오는 2012년 19대 총선에서부터 시작된다. 차기 정부 집권 4년차인 이 선거는 야당에 최고의 기회가 되리라는 것이다. 이 선거에서 압승한 후 그 동력으로 그해 말에 치르는 18대 대선에서도 승리한다는 것이다.

친노 진영에서는 2010년 치르는 지자체 선거가 중요한 분기점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역대 지방선거 결과를 분석해보았을 때 대통령 임기 중반에 치러진 지방선거에서는 모두 야당이 압승했기 때문이다. 한 친노 의원은 “탄핵 당시 가장 비난받았던 한나라당이 가장 강력한 정치 집단으로 부상하기까지 딱 2년 걸렸다. 유권자들은 지금 ‘진보의 피로’에 젖은 것처럼 그때가 되면 ‘보수의 피로’에 젖게 될 것이다”라고 예상했다.

개혁세력 집토끼 지켜서 향후 정국 주도권 확보

2008년 18대 총선과 2007년 17대 대선에 대한 전략은 17대 대선에서 명분을 획득해 18대 총선 공천의 주도권을 확보한다는 것이다. 대선 승리만을 위한 정치 연합체는 대선에 패배할 경우 18대 총선에서 설 자리가 없어지리라는 것이 이들의 판단이다. 하지만 ‘개혁 세력’이라는 집토끼를 안고 있으면 대선에 패배하더라도 의미 있는 정치적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친노 진영이 내세우는 ‘당 사수론’의 골자다.

노대통령의 적극적인 정치 행보와 김 전 대통령의 묵시적 동의하에 진행되는 친노 진영 위주의 정계 개편에서 가장 큰 치명상을 입을 정치인으로는 한화갑 민주당 대표가 꼽힌다. 한 친노 의원은 “김대중 전 대통령은 대주주로서 당연한 영향력을, 노무현 대통령은 최고경영자로서 경영권을 행사하고 있다. 이들이 주도하는 ‘정치 구조 조정’이 끝나면 ‘고평가 부실주’인 고건 전 총리의 거품은 빠지고 한화갑 대표는 ‘관리 종목’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대표에게는 곧 있을 정치자금법 위반에 대한 대법원 확정 판결이 큰 전환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유죄 판결이 나면 민주당 내 반한화갑 세력이 당권 도전에 나설 준비를 하고 있다. 이제 한 대표로서는 한·민 공조 외통수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 친노 진영의 판단이다.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는, 대선 패배를 전제로 한 시나리오가 친노 진영의 기본 구상이지만 대선을 아주 포기한 것은 아니다. 개혁 세력을 결집시키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치적 아우라에 힘입어 호남의 지지를 회복하고 김혁규·김두관·문재인 등 가용 자원을 총동원해 부산·경남 지역의 지지를 이끌어내면 가능성이 없지만도 않다는 것이다. 특히 오픈 프라이머리와 대선 직전 후보 통합 과정의 역동성을 활용하고 대선 구도를 1 대 1로 가져가면 막판 역전으로 정권 재창출까지도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이 친노 진영이 그리는 최상의 시나리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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