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노릇 못해 먹게 생겼네
  • 고제규 기자 (unjusa@sisapress.com)
  • 승인 2006.12.01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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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대 국회, 법안 통과율 최악·1백97일 파행 식물 국회’가 ‘식물 대통령’ 탄생에 한몫

 
“임기를 다 마치지 않는 첫 번째 대통령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임기 단축을 언급한 지난 11월28일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은 나가도 너무 나갔다. 참모들은 ‘식물 대통령’이 된 자괴감의 표현이라고 전했다. 노대통령의 무력감은 꼬일 대로 꼬인 정국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임기 단축 발언 이후 꽉 막힌 정국은 숨통이 터졌다. 11월30일과 12월1일, 이틀간 본회의에서 미루어졌던 법안이 상당수 통과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3천여 개의 법안이 국회에서 잠자고 있다. 물론 발의된 법안을 무조건 통과시키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의원들이 발의한 법안에는 민생 관련 법안도 있지만 생색내기, 실적 올리기용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사저널>은 정부가 제출한 법안을 추적해보았다. 법안 제출은 정부와 국회의원이 할 수 있다. 정부 제출 법안의 진척도를 추적해보면, 대통령 못해 먹겠다는 발언이 단순히 책임 회피용인지, 아니면 어느 정도 근거가 있는지 판단하는 지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발언이 있었던 지난 11월28일을 기준으로 삼았다.

정부 제출 법안, 무려 9백70일 만에 통과

국회에 따르면 11월28일까지 노무현 정부가 제출한 법안은 6백73건이고, 이 가운데 2백89건이 처리되지 못했다. 법제처는 연초에 올해 꼭 통과해야 할 법안으로 1백92건을 꼽았다. 근로 장려 세제를 도입해 저소득 근로자를 지원하는 조세특례제한법, 차상위 계층을 위한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저출산·고령화 사회에 대비한 노인수발보험법·고령자 고용촉진법 등 각종 민생 법안과 사법 개혁 법안 13건, 국방 개혁 법안 8건 등 개혁 법안 등이 포함되어 있다.

조사 결과 1백92개 법안 가운데 21건(10.9%)은 정부가 미처 법안을 만들지 못했다. 예컨대 용산민족·역사공원 조성에 관한 특별법안은 지난 8월30일까지 국회에 제출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서울시와 마찰을 빚으면서 지난 11월27일에야 법제처 심사에 들어갔다.

 
21건을 빼고 국회에 제출한 법안 1백71건 가운데도 지각 제출한 법안이 있다. 내년 1월부터 시행하기로 목표를 세웠던 금융허브 조성 및 발전에 관한 법률안은 지난 11월21일에야 국회에 제출했다. 이렇게 11월에 제출된 법안만 19건이다. 정부가 제출도 하지 않은 21건과 지각 제출한 19건을 합친 법안 40건은 올해 정기 국회에서 통과될 가능성이 낮다. 이는 정부 잘못이다. 정부가 제대로 일을 하지 않으면서 국회 탓만 한 꼴이다. 이 수치만 놓고 보면 대통령의 임기 단축 발언은 책임 회피용이다.

그런데 11월28일을 기준으로 그 전에 통과된 법안을 따져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겨우 22건(11.5%)만이 본회의를 통과했다. 통과된 22개 법안은 국회 제출부터 본회의 통과 때까지 평균 3백33.1일이 걸렸다.

통과될 때까지 가장 오래 걸린 법안은 국가재정법안이다. 이 법안은 재정의 투명화와 효율화를 목표로 지난 1961년 제정된 예산회계법을 45년 만에 전면 개편시킨 법안이다. 지난해 노무현 대통령이 시정연설에서 언급할 만큼 관심이 높았다. 2004년 10월19일 정부가 국회에 제출했고, 지난 9월8일에야 통과되었다. 무려 7백20일이나 걸렸다. 2004년 10월 기획예산처가 국가재정법안을 제출하자, 그해 12월 한나라당은 국회의 예산 통제권을 강화하는 국가건전재정법안으로 맞불을 놓았다. 두 법안은 신경전을 벌이다, 병합 심사 끝에 지난 4월24일에야 국회운영위원회 법안심사소위로 넘어갔다. 심의 과정에서 원안이 바뀌는 소동도 있었다. 원안에는 없던 국회·대법원·헌법재판소 등 독립 기관이 자체 예산을 편성할 수 있게 수정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들통이 난 것이다. 행정부의 예산 편성권을 침해한다는 위헌 논란이 벌어졌고, 이 조항이 삭제된 채 본회의를 통과했다.

가장 빨리 처리된 법안은 해외자원개발사업 일부 개정 법률안이다. 해외자원개발펀드를 만들어 에너지 자원 확보에 민간 자금을 활용하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졌다. 지난 6월8일 국회에 제출되었고, 9월29일 본회의를 통과했다. 정확히 1백14일이 걸렸다.

그렇다면 통과하지 못한 정부 입법안 1백49건은 어떤 상태일까? 11월28일을 기준으로 국회에 제출했지만 상임위원회가 정해지지 못한 법안이 4개, 상임위에 회부된 법안이 24개, 상임위에 상정된 법안이 7개, 상임위 소위에 머무르는 법안이 85개, 상임위 심사를 거쳐 법사위에 넘겨진 법안이 29개다(표 참조). 1백49개 법안이 국회에서 잠자는 총 일수는 3만2천7백79일에 이른다. 평균 2백21.5일씩 국회에서 지체되고 있다. 가장 오래 지체된 법안은 국민연금법일부개정법률안이다. 국민연금이 바닥나는 것을 막기 위해 ‘더 내고 덜 받는’ 것을 골자로 한 국민연금개정안은 911일째 국회에 머물러 있다(지난 11월30일에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를 통과했다). 법제처가 연내 통과를 바라며 국회에 제출한 1백71개 법안 가운데 이렇게 1년 넘게 국회에 머물러 있는 법안은 27개에 이른다.

 
물론 법안을 만들 때 꼼꼼하게 따져야 한다. 법률을 제정하고 나서 부작용이 생기는 것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자세히 심사하는 것이 낫다. 또한 정부 발의 법안은 대개 의원 발의 법안과 겹쳐, 병합 심사하는 경우가 많아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그러나 법사위에 오랫동안 계류 중인 법안은 문제가 있다. 11월29일 기준으로 29개 법안이 법사위에 머물러 있다. 이들 법안이 법사위에 지체된 일수를 합치면 총 2천3백50일이나 된다. 평균 1백23.7일씩 머물러 있다.
가장 오래 법사위에 계류 중인 법안은 공공 기관의 감사에 관한 법률안이다. 지난 2월13일 행자위가 법사위에 넘겼지만 2백89일째 그대로다. 행정 개혁과 지방 분권화를 위해 입법화했지만, 중앙정부의 지나친 간섭이 염려된다며 한나라당이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100일 이상 법사위에서 잠자고 있는 법안이 총 8건이다.

법사위에 계류 중인 29개 법안 가운데 11월28일 기준으로 5개 법안은 본회의 상정을 앞두고 있다. 나머지 24건 가운데 법사위 소관 법안은 하나도 없다. 전부 다른 상임위에서 처리한 법안을 넘겨받아 뭉개고 있는 것이다. 법사위가 ‘원내 상원’이라는 비판을 받는 이유다. 법사위는 원래 자구 심사만 하게 되어 있지만 해당 상임위에서 충분히 논의되고 통과된 법안이 법사위에서 다시 충돌하는 경우가 많다. 17대 국회 들어서만 국가보안법, 공정거래법, 행정도시특별법, 비정규입법안 상정을 두고 법사위는 여야 의원들의 검투장으로 변했다. 원 구성을 할 때마다 법사위원장 자리를 어느 당이 맡을지 국회는 파행을 거듭했다. 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 실행위원을 맡고 있는 박찬표 목포대 교수는 “법사위를 다른 상임위처럼 법무부를 담당하는 사법위원회 기능만 남기고 자구 심사는 각 상임위에서 하는 것이 낫다”라고 말했다.

 
국회에 머물러 있는 1백72개 법안 가운데 공직자 부패 수사처의 설치에 관한 법률처럼 여야 견해가 첨예하게 갈린 법안이 있다. 다른 숱한 법안들은 쟁점이 없지만 국회 파행 때문에 지체된 경우가 많다. 여야의 정치력 부재로 국회가 파행을 거듭하면서 법안 처리가 늦어지는 것이다. 17대 국회 들어서만 국회가 파행한 일수를 따져보았더니 1백97일에 달했다. 그래서인지 15대, 16대 국회와 비교해보면, 17대 국회가 1년의 잔여 임기를 남겨두고 있지만 법안 발의 건수에 비해 가결율이 낮다. 정부가 법안 열 개를 제출하면 세 개 정도(35.5%)만 통과되는 셈이다.

식물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이 자초한 면이 있다. 그러나 정부 입법안의 진척도를 따져보면 ‘식물 국회’가 ‘식물 대통령’을 만드는데 한몫 했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울 것 같다. 여야가 사사건건 충돌하고 정부 법안 처리를 발목 잡는다면, 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못해 먹겠다는 푸념이 나올 만하기 때문이다. 이는 ‘노무현의 비극’이 아니라 한국 정치의 비극인 셈이다.

노대통령의 자해성 협박이 통했는지, 국회는 11월30일에서 12월1일 이틀 동안 법제처가 올해 처리되기를 바라던 법안 가운데 20개를 통과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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