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스 방북 약속이 김정일 움직였다
  • 남문희 전문기자 (bulgot@sisapress.com)
  • 승인 2006.12.18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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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6월까지 버티기 전략 접고 6자회담 재개 선언

 
“하자는 데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처음부터 호락호락 다 내줄 수는 없다.” 12월18일부터 베이징에서 열리는 제5차 2단계 6자회담을 며칠 앞둔 지난 14일 저녁, 베이징의 외교 소식통이 전한 북한의 ‘최종 협상 전략’은 파란을 예상케 했다. 지난 11월28·29일 힐-김계관 회동 이후 베이징 외교가에는 ‘북·미 수교와 핵 포기 간의 빅딜’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냐는 낙관론이 펼쳐졌다. 그러나 평양 내부의 치열한 논쟁을 통해 드러난 최종 견해가 ‘핵 보유와 핵 포기의 병행’이라는 중간 입장으로 드러남으로써 앞으로 속개될 6자회담에 전운이 감돌고 있다.

‘핵 보유와 핵 포기의 병행’이란 한마디로, 앞으로 핵무기를 더 만들지는 않을 테니 이미 가지고 있는 핵무기는 계속 보유하게 해달라는 것이다. 핵무기 보유를 인정해주면 핵무기 생산과 관련한 일련의 핵시설들에 대해서는 조건이 맞을 경우 가동 중단 및 폐지 그리고 국제기구의 사찰도 받아들이겠다는 내용이다.

미국이나 기타 6자회담 참가국 처지에서는 추가 생산과 관련한 핵시설의 중단 및 폐기가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기존 핵무기 보유에 관해서는 격렬히 반발할 수밖에 없다. 북한 역시 자신들의 계획이 거센 반발에 직면할 것이라는 점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마찰을 빚더라도 일단 자신들의 주장을 ‘막무가내’로 밀고 나가겠다”라고 한다.

“핵시설 폐기할 테니 핵무기 보유 인정하라”

11월 말의 북·미 회담에서 힐 차관보가 평화협정이나 북미 정상회담 등 북한으로서는 ‘처음’ 들어보는 많은 당근책을 내놓았음에도, 북한이 ‘모든 핵무기 포기’라는 화끈한 결론에 도달하지 못한 까닭은 무엇일까. 그 첫 번째로 미국에 대한 여전히 뿌리 깊은 불신을 들 수 있다. “최근 미국이 북한 체제 보장에 많이 접근한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여태까지처럼 약속해놓고 지키지 않을 경우는 어떻게 할 것인가.” 자신은 미국의 약속만 믿고 모두 다 포기한 상태인데 미국이 돌아서버리면 그때는 어떻게 하냐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이 몇 개의 핵무기를 가지고 있는 것은 미국이 딴생각을 못하게 억지하는 효과를 낼 것이므로, 서로의 관계 안정에 오히려 도움이 된다는 논리다. 일종의 체제 안전의 담보물인 셈이다. 두 번째로 현재의 북한 체제에서 핵무기 보유가 가지는 상징적·심리적 효과를 간과할 수 없다는 점이다. 여러 모로 힘든 북한 주민들로서는 핵 보유국이라는 자부심이 그나마 위안거리인데, 그것을 쉽게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얘기다.

완전 포기에는 못 미치지만, 북한이 이번 회담부터 마찰을 각오하고서라도 속내를 분명히 밝히겠다는 것은 기존의 협상 전략에 비추어보아, 상당히 진전되었다는 시각도 있다. 즉 북한이 기존에 수립한 협상 전략에 따르면, 내년 6월까지는 시간을 끌면서 핵무기고의 수를 늘려나가고, 핵 보유국 위상을 굳힌 뒤 미국과 담판에 나서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정리된 내용에 따르면, 미국과의 담판 시기를 거의 6개월이나 당긴 셈이다.

북한으로서는 획기적 진전이다. “북한의 행보가 그처럼 앞당겨진 것은 미국이 북한의 심경을 헤아려 여러 가지 과감한 제안을 미리 해버린 것이 주효했고, 그 중에서도 라이스 장관의 평양 방문에 대한 언질을 준 것이 결정적이었다”라고 앞서의 외교 소식통은 밝혔다. 즉 지난 11월 말의 북·미 회동에서 힐 차관보가 김계관 부상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라이스 장관의 방북도 가능하다고 선선하게 밝힌 바 있는데, 그것이 평양의 완고한 노선을 상당 부분 완화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라이스 평양 방문이 뭐기에 그토록 위력을 발휘한 것일까. 가장 중요한 것은, 북한의 ‘절대자’ 김정일 위원장이 그를 무척 보고 싶어한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부시 행정부 출범 초기부터 북한은 ‘클린턴 행정부 때 중단된 지점에서 북·미 대화를 시작하자’고 주장해왔다. 즉 지난 2000년 10월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평양을 방문한 뒤 더 이상 진전이 없었는데 바로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하자는 것이다. 따라서 현 국무장관인 라이스의 평양 방문은 부시 행정부가 끊어진 곳에서부터 대화를 시작하겠다는 대북 시그널이 되는 셈이다. 이밖에도,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미국의 세계 전략이나 대북 전략의 흐름을 살펴보면, 라이스가 지난 2000년 1, 2월 미국 외교 전문 계간지인 <포린 어페어스>에 기고한 ‘미국의 국익’이라는 논문 내용대로 진행되어왔다고 북한측은 보고 있다. 즉 미국이 어디로 갈 것인가를 알려면 부시 대통령보다 라이스를 먼저 만나야 한다는 인식이 김정일 위원장을 비롯한 북한 수뇌부에 깊이 새겨진 것이다. 현재 평양에는 ‘라이스를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 즉 ‘라이스 팬클럽’이 형성되어 있는 셈이다.

미국, 북한 핵무기 인정 후 ‘관리’ 전략 펼 수도

김위원장은 실제로 지난 2005년 5월 북한 외교 당국에 ‘라이스를 평양에 초청하라’고 특별 지시까지 내렸으나 미국은 뉴욕 채널과 중국 외교 당국을 통해 전달된 평양의 뜻에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그런 미국이 물론 질문에 답하는 형식이기는 하지만 라이스 방북 카드를 꺼내든 것이다. 북한 외교 당국으로서는 최우선 숙원 사업이 풀리는 것이요, 김정일 위원장을 비롯한 평양의 수뇌부로서는 ‘미국이 드디어 끊어진 선로 잇기에 나서는구나’라는 매우 중요한 사인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따라서 현재의 북·미 관계 양상은 매우 미묘하다. 당분간은 ‘기존 핵무기’ 보유라는 북한의 방침 때문에 티격태격하겠지만 심층부에서는 유례없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가는 중이다. 이런 가운데 ‘기존 핵무기’라는 난제에 대한 해법도 측면에서 거론되고 있다. 바로 ‘BDA 모델’이다. 마카오방코델타(BDA) 은행에 묶여 있는 북한 자금 문제는 최근 묘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피해 당사국인 북한은 최근에도 여전히, ‘제재가 해결돼 언제든지 쓸 수 있다’고 하는데, 미국은 여전히 제재 중이라고 한다. 다른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체제 담보용의 몇 개 핵무기만 남게 되었을 때 북·미 간에 이같은 해법이 다시 한번 등장할 수 있다는 얘기다.

워싱턴의 한반도 전문가에 따르면, 미국도 이미 북한과의 핵협상에 대해 ‘일단은 핵 포기를 전제로 협상을 진행하되, 북한의 핵 보유를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경우는 북한 핵의 관리까지 염두에 둔 2단계 전략을 마련해둔 상태’이다. 두 번째 단계인 북한 핵 관리 단계의 핵심은 바로 ‘핵을 가진 북한을 미국에 적대적인 국가로 남겨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북한 핵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하는 상태라면, 차라리 북한과 관계를 개선해 친미 국가화하는 것이 미국의 국익에 합당하다는 지극히 ‘현실주의적’ 전략이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북한이 최종 순간 방향을 미묘하게 튼 것은 바로 그 미국의 내면을 읽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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