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 속 태우는 '검은 민족주의'
  • 조재민(자유기고가) ()
  • 승인 2007.03.05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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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베네수엘라 등 산유국 '베짱 행보' 갈수록 심해...국제유가 불안 부채질

 
21세기 세계화의 시대에 민족주의는 발붙일 곳이 없어진 듯하다. 물자와 자본과 사람이 지구촌을 누비는 세상이 되었다. 국경이 없어진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이다. 그러나 경제적 측면에서 보면 민족주의가 꿈틀거리고 있다. 부시 대통령이 석유 때문에 이라크를 침공했다는 얘기는 진부한 뉴스다. 산유국들은 툭하면 석유를 무기화하고 정치적으로 악용한다. ‘검은 황금’에 비유되는 석유를 둘러싸고 오일 내셔널리즘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원유 빛깔 같은 검은 그림자이다.
러시아와 베네수엘라가 이 조류에 앞장을 섰고 에콰도르, 볼리비아, 심지어 태국까지 뒤를 따른다. 고속 경제성장과 함께 ‘오일 먹는’ 하마로 등장한 중국과 인도도 거든다. 문제는 이 불청객 같은 민족주의가 외국 투자를 감소시켜 석유 생산을 줄임으로써 유가 상승을 부추기는 데 있다.
유가 상승으로 재미를 본 산유국들은 배럴당 20달러 하던 1990년대에 체결된 생산 계약을 재협상하느라 여념이 없다. 협상 태도는 강경 일변도이다. 조건대로 하려면 하고, 싫으면 그만두라는 식이다. 유가가 배럴당 80달러까지 치솟았던 지난해까지도 이러지는 않았다. 가만히 있어도 거대한 수입이 확보되었기 때문이다.
이상 난동으로 유류 소비가 줄어들면서 상황은 변했다. 특히 반미를 부르짖으며 과격한 개혁에 착수한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대통령은 개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외국 석유회사들을 국유화하거나 일방적으로 협상 조건을 제시한다. 엑손·셸·세브론·BP·코노코 같은 대형 석유회사들은 오는 5월1일까지 계약을 갱신하라는 통고를 받았다. 그때까지 하지 않으면 지분을 국유화하겠다는 것이다.


유전 껴안고 외국 석유회사 쥐락펴락


지난해 유럽연합(EU) 일부 국가에 석유와 가스 공급을 일시 중단한 러시아도 마찬가지다. 이 나라에 진출한 엑손과 로열 더치 셸은 생산과 투자를 줄이면서 푸틴 대통령의 처분만 기다리는 처지이다. 뉴욕에 있는 레먼 브러더스의 수석 이코노미스트 에드모스는 오일 내셔널리즘이 석유 공급에 심대한 영향을 준다고 말했다. 특히 베네수엘라의 경우에는 외국 투자가 급감해 증산은 고사하고 현상 유지도 어려운 실정이다. 베네수엘라는 5월 시한이 지켜지지 않으면 일부 외국 회사들이 운영하는 유전들을 국유화하겠다고 경고하고 있다.
메이저 석유회사들은 최근 미국 휴스턴에서 긴급회의를 열어 오일 내셔널리즘에 대한 대책을 논의했으나 뾰족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부시 대통령은 연초 국정 연설에서 중동 석유 의존을 줄이기 위해 2017년까지 대체 연료 생산을 5배 늘리는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신 연료 개발 기술이 답보 상태에 있어 석유회사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유가는 배럴당 60달러선에서 상당 기간 머무르고 있다. 추가로 하락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공급이 수요를 충족하지 못하고 새로운 유전 개발을 위한 투자는 줄어든다. 유가는 기업 이윤과 유류 소비를 결정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글로벌 경제의 운명도 유가에 의해 좌우된다.
오일 내셔널리즘은 에너지 안보 확립이라는 긍정적 명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에너지 자주권을 해치는 자체 모순을 안고 있다. 유가는 무제한 오를 수 없다. 이른바 오일 ‘자주권’을 추구하는 나라들이 목표를 달성하고 나면 산유국들은 석유를 팔 곳이 없어진다. 그때 유가는 폭락할 것이다. 유가 폭락은 산유국들의 경제를 망가뜨리고 그 파장은 소비국으로 확산된다. 다 같이 망하는 사태가 온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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