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적 기아'의 배후 밝히다
  • 조철(출판기획자) ()
  • 승인 2007.03.26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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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유엔 식량특별조사관이 전하는 기아의 진실

 
"아빠! 우리나라에는 먹을 것이 넘쳐나서 사람들이 비만을 걱정하고 한쪽에서는 음식 쓰레기도 마구 버리고 있잖아요? 그런데 아프리카나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의 많은 나라에서는 아이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다니 정말 기막힌 일 아니에요?”
서두는 아들의 문제 의식을 담은 질문으로 시작한다. 이런 문제로 질문을 하는 학생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이 질문에는 많은 사람이 기아 문제에 더 많이 관심을 가지기를 바라는 저자의 간절함이 배어 있다. 아들과 대화하는 형식을 취한 것에서 저자의 의도가 금세 드러나는 것은 차라리 이 책의 장점이다.
기아 문제에 관한 한 대다수 사람이 ‘뭘 모르고’ 있고, 굶주린 아프리카 아이의 사진이나 방송 장면만 떠올리기 일쑤라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그래서 친절한 설명이 필요했고, 제대로 알아듣게 대화 형식을 택한 것이다. ‘못 먹어 죽어가는’ 아이들의 통계수치를 줄 이어 들이대고 흥분에 차서 이데올로기 논쟁까지 벌이는 기아 문제 연구자의 보고서를 끈기 있게 보아줄 ‘먹고 살기 바쁜’ 시민은 별로 많지 않기 때문이겠다. 알고 싶지 않은 지구촌 어두운 그늘의 실상을, 더 나아가 그 실상의 배경과 음모를 쉽게 알게 해줄 테니 보라는 것이다. 이 책은 독자를 ‘의식화’하기에 충분하다. 저자에게 물들지 않으려면 정신 바짝 차리고 읽어야 할 책이다. 그만큼 저자의 주장은 강렬하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는 유엔 인권위원회 식량특별조사관인 장 지글러가 기아의 실태와 그 원인들을 알기 쉽게 조목조목 설명하고 있는 책이다. 지금까지 세계의 빈곤과 기아를 다룬 책들이 어렵거나 피상적인 사실만을 전달했던 것과는 달리, 이 책은 청소년부터 성인들까지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문체로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아의 진실을 전달한다.


굶주림 조장하는 정부·기업·금융 그룹들


 
유엔식량농업기구는 2006년 10월 로마에서 제출한 보고서를 통해, 2005년 기아로 인한 희생자 수를 집계했다. 2005년 기준으로 10세 미만의 어린이가 5초에 1명씩 굶어 죽어가고 있으며, 비타민 A 부족으로 시력을 상실한 사람이 3분에 1명꼴이며, 세계 인구의 7분의 1에 이르는 8억5천만명이 심각한 만성적 영양실조 상태에 놓여 있다. 기아에 희생당하는 사람들이 2000년 이후 1천2백만명이나 증가한 것이다. 반면 지구촌의 농업 생산력으로 생산되는 식량의 양이 지금 인구의 2배인 1백20억명을 거뜬히 먹여 살릴 수 있다는 보고서도 있다. 
그렇다면 이처럼 불합리하고 살인적인 세계 질서는 어떠한 사정에서 등장한 것일까?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이 책은 다양한 요인들 중에서 사회 구조에 천착한다. 자연 재해나 실업으로 발생하는 ‘경제적 기아’와 구분해 저자는 ‘구조적 기아’의 실상과 그 배경을 분석해서 전한다. 
전세계에서 수확되는 곡물의 4분의 1을 부유한 나라의 소들이 먹어치우고 있는가 하면 세계 시장에 비축된 식량 가격이 인위적으로 부풀려지고 있다. 농산물 가격을 높이기 위해 유럽 등 선진국의 농업 담당 집행위원회는 식량을 대량으로 폐기 처분하거나, 법률이나 그 밖의 조처를 통해 농산물의 생산을 크게 제한하고 있다.
기아 인구의 25% 이상이 집중해 있는 아프리카에서는 내전이 끊이지 않는다. 인종 간의 갈등도 문제이지만 다이아몬드나 금·석유와 같은 토착 자본을 독점하려는 국제적 금융 그룹이나 국제 기업 같은 외부 세력의 개입이 더 큰 문제라고 전한다. 외부 세력은 은밀히 그 지역의 군부 지도자에게 무기를 대주거나 용병을 고용할 수 있도록 자금을 지원하기도 한다. 이들 전쟁의 희생양은 아프리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민들이다.
환경 파괴로 인한 사막화와 농지 황폐화로 생존의 위기에 내몰린 ‘환경 난민’들은 정치 난민과 달라서, 국제 사회가 정한 ‘난민조약’(1951년)에 규정된 난민의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1995년에서 2000년 사이에 2백만명 이상이 굶어죽은 북한의 기아 현실과 세계적 식품회사가 자신들의 시장을 지키려고 기아 문제에 등을 돌리는 현실 앞에서는 기가 막힌다.
너무도 골이 깊은 불평등한 세계. 오늘날 세계의 주된 갈등은 더 이상 개발도상국과 선진국 사이의 갈등이 아니다. 만성적 실업난과 빈곤, 사회의 계층화, 영양실조가 지금은 거의 모든 나라를 위협하고 있다. 저자는 그 주범으로 민족을 초월해 활동하는, 글로벌화한 금융 자본의 과두 지배를 지목한다. 금융 자본의 호화판 뒤에는 고통과 절망으로 가득 찬 세계가 존재하며, 불평등이라는 부당한 역동성이 현재의 세계 질서를 결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저자는 이런 상황에서 기아 문제가 심각한 나라에 제대로 지원할 방법들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인도적 지원의 효율화:도움을 줄 나라의 사회 구조가 어떤지 모른 채 지원한 대가로 기득권 세력을 강화하고, 부당한 사회 구조를 고착시키며, 가난한 사람들을 비참함과 수백년간에 걸친 약탈에 방치해두었다. 원조 식량뿐만 아니라 국제 단체가 제공하는 대부분의 개발지원금도 마찬가지다.

원조보다는 개혁이 먼저:농민에게 토지를 분배하여 그들에게 농사지을 수 있도록 사회적인 구조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

인프라 정비:그들에게는 자본, 도로, 적당한 종자, 비축 식량, 농경 전문 지식 등 모든 것이 부족하다. 인프라를 정비하기 위해 시급한 지원이 필요하다.


이 책이 제시하는 대안들이란 생각만으로 그칠 수도 있다. 시장 원리에 따라 움직이는 세계 질서를 욕하고 세계의 구조적 모순에 절망하기만 할 뿐이라면 그렇다.
기아 문제를 생각하는 것은 문제의 원인 제공자를 찾아내려는 것이 아니라 기아에서 벗어나도록 도울 방법을 고안하기 위함인 만큼, 이 책에서 저자는 할 일을 다 했다. 현장을 잘 아는 활동가이니 뭐라 할 말이 있다가도 없어진다.
정규 수업 시간에 전쟁보다 더 많은 목숨을 앗아가는 기아에 대해 가르치는 학교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다. 기아의 상황을 파악하고 그 원인을 분석하고 어떤 수단으로 극복할 수 있을지 토론하는 수업 같은 것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이 적어도 자녀와 기아 문제를 쉽게 토론하는 길잡이가 될 듯하다. 단순한 보고서가 아니라 끊임없이 원인과 과정, 그 결과에 대해 질문하고 대안을 고민하는 내용이어서 더 그렇다. 
감상에 빠지지 않으려 해도 이 책이 소개하고 있는 중앙고원의 한 난민 캠프의 사례가 가슴을 파고든다. 그곳에서 활동하는 구호 단체는 지금도 식량과 회생에 쓰이는 주사·비타민제가 충분치 않아 살아날 가망이 있는 난민을 선별하고 있을 것이다.
또 ‘기아는 부드러운 죽음이다. 점차 쇠약해지다가 마지막에는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고통 없이 죽는 것’이라고 자신을 세뇌시키던 저자가 현장에서 마주친 아이들을 보고 전하는 말도 뇌리에 맴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단다! 누더기 속에서 일그러진 작은 얼굴들은 그들이 가공할 고통을 겪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어. 작은 몸들이 흐느끼며 오그라들고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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