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를 공부' NO! '영어로 공부' YES!
  • 김세원 (언론인) ()
  • 승인 2007.04.16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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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경쟁력 최상위' 유럽 국가들의 영어 교육 성공 사례

 

1위 스위스, 2위 핀란드, 3위 스웨덴, 4위 덴마크-. 지난해 세계경제포럼(WEF)이 매긴 국가경쟁력 순위이다. 이들 국가의 공통점은 모두 유럽 국가이면서 지난 10여 년 동안 경제적으로 급부상한 강소국이라는 점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4월6일 교육방송(EBS) 영어교육 채널 개국 행사에서 축사를 통해 “세계와 함께 호흡하기 위해서는 영어가 꼭 필요한데 핀란드 등 최근 선진국으로 급성장한 나라의 가장 큰 경쟁력은 영어 잘하는 국민”이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룩셈부르크·스위스·덴마크는 지난해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의 외국어 구사 능력 평가에서 1, 2, 3위를 차지했고 덴마크·룩셈부르크·네덜란드는 2004~2005년 토플(TOEFL) 응시생의 평균 점수 순위에서 차례로 1~3위를 기록했다. 비결은 어디 있는 것일까?
그들은 영어를 공부하지 않고, 즉 우리나라 학생들처럼 ‘영어 시험공부’를 하지 않고 ‘영어로 공부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자국어에 대한 콧대가 높기로 유명한 프랑스마저도 영어 교육에 적극 나서는 등 유럽 각국은 국가경쟁력 제고를 위해 영어 교육에 ‘올인’하고 있다.


덴마크


토플 평균 점수 세계 1위인 덴마크는 초등학교 4학년(10세) 때부터 영어 교육이 시작된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9학년(중학교 3학년)까지 6년 동안 학교에서 영어 교육을 받는다. 영어 시간은 초등학교 4학년의 경우 주 2시간, 5학년부터 주 3시간이다. 외형적으로만 보면 우리나라의 공교육과 별 차이가 없다.
하지만 영어 수업이 철저하게 말하기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영어뿐 아니라 다른 교과 시간에도 영어 교재를 활용하는 등 대부분의 수업에서 자연스럽게 영어를 쓰는 교육을 받는 것이 우리나라와 다르다.
특히 교사가 자신 있고 편안하게 영어로 수업을 진행하려면 상당한 정도의 영어 실력을 갖추어야 한다. 이 때문에 영어 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영어권에서 2년 이상 교육을 받아야 하는 등 총 교육받는 기간이 9~10년이 소요될 정도로 긴 시간과 노력을 요구하고 있다. 영어 교사 대다수가 석사학위 보유자이기도 하다. 따라서 굳이 비싼 돈을 들여 원어민 교사를 데려올 필요가 없다.


스웨덴


스웨덴에서는 국민 열 명 중 아홉 명이 영어를 구사할 줄 안다. 2001년만 해도 영어가 가능한 비율은 열 명 중 일곱 명이었다. 불과 5년 사이에 20% 이상 늘어난 것이다.
스웨덴은 세계화가 시작되자 곧바로 영어 교육 개혁에 착수했다. 그전에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영어 교육을 시작했는데 최근에는   1학년 때부터 가르치는 학교가 늘고 있다.
스웨덴 교육개혁청의 영어 교육 목표는 영어가 쓸모 있는 언어라는 사실을 학생들에게 자연스럽게 일깨우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에는 문법을 강조했지만 요즘은 일상 생활에서 마주치는 상황을 많이 다룬다. 앞으로는 수업 시간에 영어만 사용하도록 하는 몰입 교육을 확대할 방침이다.
스웨덴의 초·중·고 영어 수업 시간은 최소 5백80시간으로 최소 7백31시간인 한국에 비해 오히려 적다. 그렇다고 한국처럼 영어학원이 몇 집 걸러 하나씩 있는 것도 아니다. 다른 북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영어 실력 향상을 위해 사설 학원에서 영어를 배운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공교육만으로 완전 해결…철저히 회화 중심


초·중등 과정의 공교육만으로도 국민 대부분이 영어를 잘할 수 있는 비결은 영어를 접하는 환경의 차이에 있다. 스웨덴을 비롯해 핀란드, 노르웨이 등 대다수 북유럽 국가들은 영어로 제작된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공중파로 방영할 때 더빙을 하는 대신 자국어 자막으로 처리하고 있다. 국민들의 영어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되는 데다 더빙에 드는 비용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스웨덴어와 영어의 방송 비율은 교육문화부와 국회가 제시한 가이드라인에 따라 방송사가 자율 결정한다. 현재 공영방송 2개 채널의 4분의 1, 상업 방송 2개 채널의 절반 이상이 영어로 방송된다.
아이들은 유아기 때부터 자연스럽게 영어권 만화를 자주 접하며 정확한 영어 발음과 다양한 어휘를 익히게 된다. 청소년기에도 <위기의 주부들> <프렌즈> 같은 미국 드라마나 시트콤을 시청하고 학교에서 친구들과 이를 소재로 대화를 나누며 살아 있는 영어를 배우는 식이다. 대학에서는 수업과 연구를 영어로 진행하고 전체 석·박사 학위 논문의 78%가 영어로 쓰여진다.


핀란드


 
덴마크어나 스웨덴어가 인도·유럽어족 가운데서도 영어와 같은 게르만어파에 속한다면 핀란드어는 한국어·몽골어 등과 같은 우랄알타이어족에 속한다. 전치사나 관사가 없어 인도·유럽어족인 영어와는 어순이나 문법에서 큰 차이가 있다. 그러나 헬싱키에서는 택시를 타고 운전사와 영어로 의사 소통하는 데 문제가 없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핀란드의 초·중·고교에서는 일부 교과목을 대상으로 수업 시간에 영어만 사용하도록 하는 ‘영어 몰입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수업 내용은 물론 일상 대화도 영어로 하는 강제적인 방식이다.
교사들은 교과서는 밀어놓고 영화나 노래 등 학생들의 관심을 끌 만한 소재로 수업을 한다. 학생들은 역할극을 하거나 함께 노래를 부르면서 영어를 익힌다. 영어는 넘어야 할 산이 아니라 재미있는 놀이인 셈이다. 물론 영어를 처음 배울 때 힘들어하는 학생들에게는 별도로 전문 교사가 보충 학습을 시킨다. 핀란드 학생 중 보충 학습을 받는 비율은 20% 정도이다.
과학이나 수학 같은 교과를 영어로 가르치려면 영어를 잘하는 핀란드 교사만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아예 원어민 교사들을 초빙해 과목을 맡긴다.
핀란드는 ‘자일리톨 껌의 원산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1990년대 초 자일리톨 껌을 개발할 당시만 해도 핀란드 기업체들은 국제 시장에서 그 상품을 마케팅할 능력이 없었다. 관건은 영어였다. 핀란드는 영어 공교육에 주력한 결과, 세계경제포럼이 발표한 국가경쟁력 지수에서 2003년부터 2005년까지 3년 연속 1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네덜란드


히딩크 감독을 통해 우리나라에도 알려졌지만 네덜란드 사람들은 영국인 못지않게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유엔 등 국제기구와 다국적 기업에서 일하는 네덜란드 사람들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자원이 부족한 네덜란드는 오래 전부터 무역을 통해 돈을 벌어왔기 때문에 자국민의 언어 구사 능력을 국력으로 간주해 특별 관리를 해오고 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영어 교육을 의무적으로 실시하고 있을 뿐 아니라 1989년부터는 중·고등학교 과정에 ‘내용 중심 언어학습법(Content and Language Integrated Learning)’을 도입했다. 핵심은 역사·지리·생물·음악 등의 과목을 영어로 가르치는 것이다. 2006년 현재 90여 개 학교가 이 방식을 활용하고 있다. 영어와 사회 과목을 통합해 가르치거나 영어로 세계지리를 가르치는 식이다. 교사들은 원어민의 도움 없이 자체적으로 교재를 개발해 수업한다. 효율적인 교육 방식 덕분에 네덜란드에서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영어 구사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프랑스


자국어에 대한 자존심이 유달리 강했던 프랑스도 영어로 의사 소통을 할 수 없으면 국제 경쟁에서 뒤처진다는 절박감에 뒤늦게 소매를 걷어붙이고 영어 교육 강화 대열에 동참했다. 프랑스 하원은 2005년, 외국어로 자유롭게 의사 소통할 수 있도록 외국어 말하기 능력을 키우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새 교육법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초등학교 3학년부터 하고 있던 영어 교육을 올해 8월부터는 2학년부터 시작한다.


한국 영어 교육은 ‘고비용·저효율’


 
이들 유럽 국가에 비해 한국의 현실은 어떤가. 삼성경제연구소가 지난해 11월 발간한 <영어의 경제학> 보고서는 한국 영어 교육의 문제점이 ‘고비용·저효율’에 있다고 진단한다. 영어 사교육비로 일본의 3배 가까운 15조원을 지출하고 전세계 토플 응시 인원의 18.5%를 차지하는 등 한국인의 영어 투자는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결과는 보잘것없다.
국제경영개발대학원의 외국어 구사 능력 평가에서 61개국 중 35위, 토플 평균 점수는 1백47개국 중 93위를 각각 기록했고 공교육이 영어 교육을 감당하지 못해 외국 연수와 유학이 줄을 잇고 있다.
영어를 공교육의 테두리 안에 끌어넣으려면 교사의 자질 향상이 핵심이다. 그런데 교육부가 지난해 3월 영어 연수 프로그램에 참가한 2백72명의 중·고교 영어 교사들을 상대로 측정한 토익(TOEIC) 점수는 평균 7백18점이었다. 반면 같은 해 대기업 신입사원과 공기업 합격자의 토익 평균 점수는 각각 7백78점과 8백41점이었다.
사범대 영어교육과를 졸업한 영어 교사의 90% 이상이 문학이론 전공자들이다. 영어 교사를 양성하는 대학 교수들 자체가 난해한 영문학 이론이나 추상적인 교수법을 한국어로 강의하고 있으니, 영어 교사가 영어로 수업을 진행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비효율적인 영어 교육 때문에 한국인들은 국제회의에 나가면 예외 없이 ‘말 없이(silent)’ ‘미소만 짓다가(smile)’ ‘조는(sleep)’ 3S 현상을 보인다는 조크까지 나올 정도이다.
국민들이 영어를 잘하는 북유럽 국가들의 공통점은 일상 생활 속에서 영어를 접하되 ‘영어를’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영어로’ 공부한다는 점이다.
텔레비전을 통해 자막 처리된 영어 프로그램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익히고 기본적인 영어를 습득한 뒤에는 영어 자체를 배우는 것보다는 영어를 이용해 다른 과목을 학습하는 시스템이 자리 잡혀 있다. 이 때문에 영어가 외국어이지만 낯설지 않다. 물론 이런 제도가 운용되려면 수업을 이끌어가는 교사가 자유롭게 영어를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
실로 영어 교육 개혁 작업은 전체 유럽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다. 유럽의회는 2001년 말 유럽에서 사용되는 언어와 관련해 유럽 공통 기반(Common European Framework)을 개발해 교육 과정에 채용하도록 권하고 있다. 겉으로는 여러 언어가 사용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하기 위한 프로젝트라지만 실제로는 각국의 영어 교육 목표 수준을 비교하기 위해서라는 것이 정설이다.
유럽 공통 기반은 언어의 의사 소통 능력을 초급인 A1부터 고급인 C2까지 6단계로 평가하도록 표준화했고, 단계별 어휘나 문법을 규정하고 있으며, 언어가 실제 사용되는 상황을 53개로 정리했다. 핀란드의 경우는 고등학교를 마칠 때 영어 수준이 중상인 B2 이상이 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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