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베스, '치킨 게임' 시작했나
  • 김충남(하와이 대학 동서문화센터 연구위원) ()
  • 승인 2007.05.28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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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에 맞서 세계은행 탈퇴 선언... '남미 국가 결집->미국과 일전' 노려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지난 4월30일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을 탈퇴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세계은행이 미국의 이익을 대변할 뿐이며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 긴축 정책 등 미국식 정책을 강요해 더욱 못살게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폴 울포위츠 세계은행 총재가 여자 친구에게 특혜를 베푼 사실이 스캔들로 비화되어 세계은행에 대한 신뢰가 크게 떨어진 시점이어서 차베스의 선언은 세계적 관심을 모으고 있다. 차베스는 과연 절호의 기회를 잡은 것인가, 아니면 허황된 만용으로 그칠 것인가? 
차베스는 미국과 특권층을 신랄하게 공격하며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겠다고 선언해 불만으로 가득 차 있던 베네수엘라 민중들의 열렬한 지지로 1998년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취임하자마자 그는 ‘사회주의 혁명’을 완수한다는 명분 아래 쿠바식 사회주의 체제를 도입하고 카스트로와 절친한 관계를 유지하는 등 반미 외교의 선봉에 서왔다.
그는 베네수엘라를 비롯한 대다수 중남미 국가들이 풍부한 자원을 갖고 있는데도 못살게 된 것은 미국 제국주의 또는 외국 자본의 착취 때문이고 외국의 영향력으로부터 해방되지 않으면 주체성 확립은 물론 빈곤으로부터 벗어날 수도 없다고 주장하며 미국 등 외국 자본이 투자하고 있던 석유·가스·통신·은행 등을 국유화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외국 자본은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국내 부유층들도 재산을 해외로 빼돌려 일자리는 줄어들었다.
베네수엘라는 세계 5위의 산유국이다. 따라서 나라 경제는 원유 가격에 따라 좌우된다. 차베스가 집권하기 직전인 1998년 1백20억 달러였던 석유 수입은 고유가 덕분에 2006년 5백80억 달러로 늘어났다. 국내총생산의 30%, 수출의 90%, 재정 수입의 55%가 석유에서 나온다. 석유산업은 모두 국가 소유이며 최근에는 배럴당 60~70달러 수준의 고유가에 힘입어 막대한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다. 원유 가격이 몇 년 사이에 두 배로 오르자 차베스는 미국 중심의 세계화에 맞서 남미 국가들이 단결해야 진정한 해방을 이룩할 수 있다며 주변국에 대한 선심 공세를 통해 중남미 지역에서 반미 연대 구축에 발벗고 나섰다. 차베스는 중남미 13개국에 특별 할인가로 석유를 공급하고 아르헨티나로부터 국채를 매입하는 등 지난해 중남미에 뿌린 돈만 1백65억 달러에 달한다.
차베스의 세계은행 탈퇴 선언은 미국 주도의 금융 질서에서 벗어나기 위해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출자·운영하는 ‘남미은행’ 설립 의도와 맞물려 있다. 남미은행은 오는 6월에 공식 출범하게 되고 내년부터 업무를 시작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 은행 설립을 위한 준비 모임에는 베네수엘라를 비롯해 아르헨티나 브라질 볼리비아 에콰도르 파라과이가 참여했다. 그러나 이 은행 설립 목적과 관련해 차베스와 브라질을 비롯한 다른 나라 지도자들 사이에 큰 견해 차이가 있어 설립 과정에서 논란이 표면화될 가능성이 크다. 차베스는 이 은행이 세계은행을 대체하는 지역 금융기구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물론 이를 통해 중남미 지역의 반미 연대를 구축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차베스의 세계은행 탈퇴 선언은 엄포용?


물론 풍부한 오일 머니를 가진 차베스는 자신만만해하지만 다른 나라들이 그의 극단적 반미 노선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는 해외 자본을 유치해 경제 성장을 도모하고 수출을 확대해 IMF 차관을 갚아가고 있기 때문에 남미은행에 가입하더라도 세계은행 탈퇴는 고려하지 않고 있다.
남미은행 설립자금으로 10억 달러 정도를 고려하고 있지만 이 규모로는 금융 위기가 빈발하고 있는 거대한 남미 대륙의 경제를 떠받치기 어렵다. 이는 2001년 아르헨티나 금융 위기 당시 9백50억 달러의 외채에 대해 지불 유예를 선언했던 사실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라틴아메리카 나라에서 금융 위기가 닥쳤을 때 그들이 구제 금융을 요청할 곳은 IMF이지 베네수엘라가 될 수 없는 것은 자명하다.
국제 금융 전문가들은 차베스가 IMF와 세계은행을 비난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실제로 탈퇴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세계은행 탈퇴는 베네수엘라 국채를 기술적 채무 불이행 상태로 전락시키고 향후 외채 도입 때 높은 이자 등 조건이 까다로워져 심각한 어려움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세계은행 탈퇴는 부속 기구인 투자분쟁조정기구 탈퇴도 수반되므로 베네수엘라가 다른 나라들과 맺은 투자 계약도 모두 무효가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따라서 차베스와 그에 동조한 중남미 지도자들의 의도는 세계은행에 변화를 유도하기 위한 압력으로 볼 수도 있다.
차베스가 사회주의 독재 체제를 구축하고 대외적으로 석유 달러를 무기로 반미 연대 구축에 열을 올리지만 국내 사정은 말이 아니다. 그의 급진적 개혁에 대한 반발로 정치적·사회적 혼란이 극에 달하고 있다. 고유가로 벌어들인 막대한 외화는 경제의 기초를 다지기보다는 무상 의료·무상 교육·빈민 구제 등에 쏟아붓고 있다. 2003년부터 3년 동안 무려 2백억 달러를 복지 사업에 투입했으며, 특히 2005년에는 전체 예산의 41%를 그러한 목적에 사용했다. 복지를 위한 지출은 70% 늘어났지만 일자리는 2% 증가했을 뿐이다. 지난 몇 년간 고유가로 재정 수입이 엄청나게 늘어났음에도 마구잡이식 선심 정책으로 정부 부채는 2000년 20억 달러에서 2006년 3백80억 달러로 급증했다. 이로 인해 베네수엘라 경제에 대한 국제 신뢰도가 추락해 화폐 가치는 올해 들어 16%나 추락했다.
중남미 국가들은 민중을 위한다는 포퓰리즘 정책으로 빈부 격차, 높은 실업, 인플레, 부정부패, 막대한 재정 적자와 외채 등으로 만성적 혼란에 빠져 있다. 국제 금융 기구는 이 국가들에 구제 금융을 제공하는 대신 긴축재정·국가 부채 축소·민영화·경제 개방 등을 요구하고 있다. 대중영합주의로 정권을 잡고 유지하는 중남미 집권자들은 그와 반대되는 정책만 추구해왔기 때문에 국제 금융 기구의 그러한 요구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래서 세계화를 반대하고 주요 산업을 국유화하며 부유층에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고 미국과 외국 자본을 비난하며 자신들의 실정 책임을 미국, 외국 자본, 또는 국내 부유층에게 전가한다.
상당수 중남미 국가들의 좌파 노선은 세계화에 대한 저항이 그 명분이다. 부시 행정부의 일방주의적 외교 정책이 그같은 추세를 부추겼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저항한다고 중남미 국가들의 뿌리 깊은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세계화는 세계의 흐름이며 어떤 국가도 경쟁력이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차베스를 비롯한 중남미 좌파 지도자들은 강대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평등과 사회 정의를 표방하는 새로운 사회주의를 이룩하려 하지만 이러한 시대착오적인 노선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세계 경제로부터 고립된 경제, 세계 발전 추세에서 뒤떨어진 나라는 결코 21세기의 승자가 될 수 없음은 물론이고 생존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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