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전 의학은 가짜였다?
  • 조 철 (출판 기획자) ()
  • 승인 2007.06.11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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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의 진실>/역사 속 '나쁜 의학'의 자취 '진찰'

 
올해 초 공중파 TV에서 의학 드라마 두 편이 시청률 경쟁을 벌였다. <하얀 거탑>과     <외과의사 봉달희>이다. 드라마는 의사들의 현장을 밀착해 보여주면서 그들의 고민과 의료 행위의 불확실성 등을 시청자들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드라마의 여러 장치, 멜로나 등장인물 간의 갈등 등을 논외로 하고 본다면 리얼리티 면에서 진일보했다는 평도 받았다.
하지만 환자와 의사들의 고충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작가가 의사가 아닌 이상, 현장 다큐도 아닌 드라마에서 의학에 대해, 의사들에 대해 제대로 그리라는 것은 다소 무리한 주문일 터이다. 외과 수술 장면과 의학 전문용어를 대사에 넣고, 용어 해설을 자막으로 올린다고 의학 드라마라 할 수는 없다. 그래도 병원에 대한 궁금증을 조금이나마 풀어주었는지 드라마는 큰 기대에 못 미쳤음에도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런데 의학 드라마에서 ‘나쁜 의사’는 없다. 조금 나쁘게 그려도 그만한 이유가 있어 시청자들을 관대해지게 만든다. ‘나쁜 의학’도 없다. 사람을 살리는 일인데 의료 실수가 있어도 의사에게 돌을 던지지는 말라는 투다. 잘 알지도 못하는 의학에 메스를 댔다가는 큰코 다치기 십상이기 때문일 듯도 하다.
역사상 ‘나쁜 의사’와 ‘나쁜 의학’을 들춰낸다면 의사들은 뭐라고 할까? 의사와 의학 관련 연구자들에게 혹시 ‘나쁜 행위’를 하지 않는지 자문해보라면….
드라마를 보면서 그런 생각으로 목이 탔다면 <의학의 진실>을 알면 되겠다. 영국 요크 대학 역사학과 데이비드 우턴 교수가 썼다. 원제는 ‘나쁜 의학-히포크라테스 이래 해만 끼쳐온 의사들(Bad Medicine-Doctors Doing Harm Since Hippocrates)’이다. 밤새우며 진료하고 아픈 사람 돌보는 의료 현장의 의사들이 기분 나빠할 제목이다. 단정적이고 직설적인 어투가 반감을 불러일으킬 텐데도 이 책을 번역 출간한 출판사측은 의사들이 먼저 보기를 원한다.
불확실성의 의료 현장에서는 ‘용기와 겸손’을 최고의 덕목으로 꼽는다고 한다. 오만이 오판을 부르는 걸 경계하는 말일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까칠한 지적을 하는 듯하다. 저자는 자신이 의사가 아니라서인지 짐짓 겸손 섞인 말을 머리말에 남긴다. “본 책의 핵심 주장은 의학의 가장 흥미로운 면 하나가 ‘의학이 효과가 있다’는 것이며 따라서 의학의 진보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의학의 실패라는 오랜 전통에서 출발해야만 의학의 진보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더 좋은 의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쁜 의료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도 의료 분쟁은 곳곳에서 터져나온다. 환자 가족과 의사의 충돌을 보면서 의학사를 들춰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어느 병원인지, 의료진이 뭘 잘못해서 일어난 일인지, 특정 사건의 인과 관계만 놓고 시시비비할 것이다. 이 책을 접한다면 현대 의학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는  믿음이 얼마나 맹목적인지 돌아보게 할 것이다. 그렇다고 의사를 신뢰하지 말라는 말은 아니다. ‘나쁜 의학’을 말하는 저자는 의학계를 공격하는 의미도 아니니 오해하지 말라고 말한다. 좋은 의학이라는 주제는 나쁜 의학이라는 주제와 불가분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의학은 진보 아닌 단절과 재연의 반복”


 
지난 5월 각 언론에서 피를 뽑아 모든 병을 고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심천사혈’의 피해를 일제히 보도했다. 대체의학을 표방한 무면허 의료 행위가 곳곳에서 자행됐다는 것이 요지였다. 이 책에서는 “근대 의학이 ‘사혈요법’의 무용성, 아니 해악을 인정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진보할 수 있었다”라고 지적한다. 기원전 500년 무렵부터 19세기 말까지 서양의 의사들이 자신들이 의사임을 주장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이자, 질병을 치료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가 바로 사혈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폐기 처분했어야 할 것이 유령처럼 되살아난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병을 앓는 환자의 절박한 심정과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의사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 그리고 이에 기대어 지탱되어온 의사들의 권위가 가장 주요한 원인이 아닐까? 이것이 의학의 시조라 불리는 히포크라테스 시절부터 지배적인 모습이었다면,  진보를 거듭해온 것으로 기록된 의학사는 어떻게 쓰여져야 할까? <의학의 진실>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담담히 기술해나간다.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로부터 시작되는 의학사를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는 저자는, 항생제가 발명된 1940년까지 의사들은 대체로 환자들에게 도움보다는 해를 끼치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의심한다. 또 의사들은 환자들의 헛된 믿음, 의사들이 자신들을 치료해줄 것이라는 믿음에 의지해왔다고 말한다. 이 책은 의학이 질병 정복과 인간 생명 연장이라는 목표를 향해 지금까지 쉼 없이 걸어온 눈부신 진보의 역사라는 신화를 여지없이 깨뜨린다. 의학 명인 열전을 거부하는 이 책은 히포크라테스의 신화를 깨뜨리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히포크라테스는 병의 원인이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 안에 있으며, 병의 원인을 찾아 제거하는 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의사들의 기본적인 태도를 확립했다. 그런 점에서 히포크라테스를 의학의 시조로 숭상하기도 한다.
그러나 저자는 히포크라테스 의학이 피를 뽑고 토하고 설사를 하게 하는 방법을 거의 모든 질병 치료법으로 자리 잡게 했으며, 네 가지 체액들의 균형으로 건강을 설명하는 체액설을 확립함으로써 의학이 해악을 끼치는 데 절대적 권위를 발휘했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19세기 말까지 의사들은 환자에게 해를 입히지 않으면 다행이었다고 역설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저자가 의학의 발전과 진보를 전적으로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진보의 역사 이면에 감추어진, 해악을 끼친 의학의 역사를 함께 파악하자는 것이다. 그래야만 다른 학문의 진보를 살펴보듯 공평하게 의학 또한 학문으로서 온전히 비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책 전체를 관통하는 저자의 세 가지 주장을 보면, 우선 질병을 치료하는 기능으로 의학을 정의한다면 1865년 이전에는 의학이 거의 없었다. 사혈, 사하제, 구토제 등으로 상징되는 히포크라테스 이후 오랜 전통은 거의 효과가 없었으며 오히려 해를 입혔다는 주장이다. 둘째, 효과적인 의학은 의사들이 수치를 계산하고 치료법을 비교하면서부터 비로소 시작되었다. 그런데 질병의 개념도 정립이 안 된 상태에서 그런 노력을 실천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음을 밝혔다. 셋째, 근대 의학을 가능하게 한 주요 요인은 세균병인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또한 의학적으로 적용된 세균설이 체계화되기까지 오래 지연되었음을 지적한다.
이 책의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저자의 입장은 전통적인 의학에 새로운 발견들이 더해져 점진적이고 누적적으로 발전해온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전통 의학과 현대 의학 사이의 연속성을 설정할 수 없으며, 의학의 역사는 수많은 단절과 지연으로 형성되어왔다는 것이다. 또 의사들의 보수적인 집단 자의식, 전통과 권위에 대한 한없는 맹신을 빼놓고는 의학사의 수수께끼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 “내가 주장했듯 실용적이거나 혹은 이론적인 측면이 아니라 심리적이고 문화적인 측면이었다.… 의학은 제도와 사회적 관행에 깊숙이 침투했고 심리적인 많은 것을 기댄 활동이다.” 의학의 진보에서 주요 장애물은 의사들이 기존의 처방에 만족한 데 있다면서, 저자는 지식이 아닌 심리적 또는 문화적인 문제로 의학의 진보가 지연되고 단절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책은 현대 의학을 직접 건드리지는 않지만, 근대 의학까지의 의학사에 메스를 댄 것으로도 현대 의학에 경종을 울린다. 현대 의학이 어떤 위상을 가지고 있는지, 현대 의사들이 얼마나 혁명적인 자리에 와 있는지는 내세우지 말라고. 역사는 돌고 돈다는 말이 있다. 또 다른 단절과 지연의 역사가 펼쳐질지 모르므로, 의사들은 멀리 있지 않은 의학의 진실에 관심을 가져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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